2018년 2월28일
임신테스터로 임신 여부는 확인했으나 초음파로는 어떤 것도 보이지 않던 임신 극 초기에 사타구니와 아랫배에 극심한 통증이 있었다. 자궁외임신이나 자연유산의 위험이 있어 복통에 막연한 두려움까지 더해져 정말 고통스러운 날들이었다. 수정란이 자궁에 제대로 착상한 걸 확인한 후로는 복통이 있어도 자연스러운 아픔이겠거니 하며 견뎌왔지만 어젯밤은 정말 힘들었다. 침대에 누우니 날카로운 칼로 아랫배를 푹푹 쑤시는 듯한 통증이 계속 돼 밤새 신음하며 앓았다. 통증도 무시무시했지만, 실은 그보다 아기에게 문제 있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에 더 무서웠다.
아직 얼굴도 모르는 뱃속의 아기가 나보다 중요할 일은 없지만, 아기가 내 몸에서 죽는 건 너무 무서운 일이다. 배가 너무 아픈데 앓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일이 없어 무력했다. 질 출혈이 있다면 새벽에라도 바로 내원하겠지만 그것도 아니라서 오전까지 계속 아프면 병원에 가보자, 하다가 지금은 조금 견딜 만 해졌다.
임신 초기에 자궁이 커지느라 아랫배가 콕콕 쑤시고 아프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큰 통증 없이 그럭저럭 잘 지내다, 임신 중기를 바라보는 지금 다시 너무 아프니 괴롭고 내 몸에 화가 난다. 남편이 또 지방으로 출장을 간 터라 나를 돌봐줄 사람이 없어 짐을 추려 당분간 내 모부의 집에서 지내고 있다. 지난 밤엔 엄마와 한 방에서 잤는데, 내가 밤새 데굴데굴 굴러다니며 신음하고 아파하니 내 걱정에 엄마도 불안하고 무서워 한숨도 못 주무셨단다. 내가 아플 때마다 엄마는 자기를 탓한다. 내일부턴 잠을 혼자 자야겠다.
임신 중 복통은 생리통과는 다른 고통을 준다. 내 몸도 부스러질 거 같이 너무 아픈데 정신으로 버텨내기가 좀 힘들다. 아픔의 원인을 찾으려고 수만 가지 생각으로 스스로 고통을 주입하면서도 결국엔 진료비 걱정에 병원 가기를 주저한다. 자궁과 함께 자궁근종도 커져서 아픈 건 아닐까, 아기가 유산 중이어서 아픈 건 아닐까, 이래서 아픈 건 아닐까, 저래서 아픈 건 아닐까, 걱정 한 바가지를 안고 병원에 가지만 그 때마다 담당의는 그저 자궁이 커지느라 아픈 거라고 별 일 아닌 듯 말했다. 이번에도 그런 거라면 어떡하지, 초음파 보고 검진하면 5만원은 순식간에 사라질 텐데, 하며 오늘도 나는 혼자 씨름한다. 나는 불안에 패배했고,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다.
모부 집으로 퇴근 후 통증이 다시 시작됐다. 배가 너무 아파서 배를 두 팔로 싸매고 "아 배야, 아 배야."하며 온 집안을 돌아다니니 소파에서 TV를 보던 아빠가 한 소리 한다.
좀 참아. 원래 임신하면 다 아파. 아프다, 아프다 소리내면 좀 덜 아프냐? 시끄럽기만 하지.
너무 화가 나서 아빠 팔을 강하게 꼬집었다.
아야!!!!
아야 소리내면 좀 덜 아파? 시끄럽네.
임신한 딸의 고통을 공감 못 하겠으면 공감해 보려는 노력이라도 좀 해야지. 며칠 전 아기가 내 뱃속에서 꿈틀꿈틀 움직이는 초음파 동영상을 보내줬을 때 아빠는 "너무 기뻐서 눈물이 난다"고 했다. 내 고통으로 이뤄낸 감동은 소유하겠지만, 정작 내 고통은 나 혼자 조용히 감당하길 바라는 마음인가.
내 일기는 나를 위한 기록이기도 하지만, 임신의 현실을 사람들이 아는 것에도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다만, 세상에는 여전히 아기를 원하는 사람들이 있고, 임신이 더 이상 여성 혼자 만의 고통으로 남겨져선 안 된다는 이야길 하고 싶다. 더 많이 알려지고, 더 많이 개선되어야 한다.
임신일기로 검색해보면 내 일기로 임신 생각이 더 사라진다는 글이 많이 보이고, 아직도 나 임신중절 안했냐는 트윗도 보인다. 여성이 제대로 정보를 숙지 한 후에 임신 여부를 결정할 수 있어야 하고, 그 고통을 알 수 없다면 공감하는 데 더 힘써야 한다는 것. 사회적 배려와 좋은 제도가 너무 없다는 것. 내가 기록으로 주장하고 싶은 것들은 이거다.
가부장적인 사회에서 비혼, 비출산을 선언하는 것에는 분명 의미가 있다. 한편 결혼 또는 출산을 결정한 여성에게도, 단지 여성이라는 이유로, 행복은 멀다. 비혼, 비출산, 결혼, 출산, 그게 무엇이든 여성이 하고 싶은 일을 모두 하면서도 행복할 수 있는 삶, 나는 그런 여성해방의 날을 꿈꾼다. 나는 남편을 사랑하고, 아기를 낳고 싶은, 그러면서 행복하게 살고 싶은 페미니스트이다.
2018년 3월3일
생리주기가 근접했을 때 집이 아닌 공간에서 팬티가 축축하면 싸한 공포가 온다. '터졌구나.' 생리 할 때가 아닌데 축축하면 더 싸하다. '주기 망가졌나? 부정출혈인가?' 임신 후 팬티가 축축하면 심장이 흔들린다. 팬티에 조금이라도 피가 묻어나면 유산일 확률이 높기 때문이다. 외출했다가 아래가 축축해 당황하며 집에 부리나케 돌아왔다.
휴. 다행이다. 질 분비물이다.
임신을 하니 질 분비물 양에 ‘헉’ 소리 날 때가 많다. 이게 다 질 분비물이라고? 생리컵에 받아도 몇 시간이면 꽉 차겠다. 많은 여성들이 공감할 테지만 질에서 나오는 분비물이란 건 섹스할 때 말고는 늘 성가시다. 임신 중기 이후론 팬티를 하루에도 몇 번 씩 갈아 입는 사람이 많다는데 생각만 해도 귀찮다.
늘 하는 이야기지만, 직장 다니는 임부는 어쩌라는 걸까. 회사에선 생리컵 비워내기도 영 쉽지 않아 생리컵 전도사였음에도 출근할 땐 탐폰을 썼는데 이젠 질 분비물 때문에 팬티까지 갈아입어야 한다면 임신이 더 끔찍해질 것 같다. 꼭 임신이 아니더라도 질 분비물이 많고 생식기가 습한 여성을 위한 팬티가 다양하게 개발되어 널리 상용화 되었으면 좋겠다.
2018년 3월5일
입덧이 빨리 끝났으면 좋겠다. 음식을 상상하기가 힘들다. 음식을 떠올리기만 해도 역해서 헛구역질이 나온다. 토덧하는 사람들은 음식을 입에도 못 댄다고 한다. 먹으면 그대로 토한다고. 그래도 나는 정작 먹을 땐 토하지 않고 잘 먹는 편이지만, 먹고 나서 명치가 너무 아파 몇 시간 동안 허리를 잘 못 편다. 안 먹으면 울렁울렁, 먹으면 위장 통증. 극한 무기력에 일상이 너무 힘들다.
요즘은 조금만 무리해도 바주카포로 명중 당한 듯 몸이 통째로 뻥 뚫린 것 같다. 구멍 난 몸으로 내 모든 에너지와 ‘나’라는 사람이 온통 빠져나가는 거 같다. 그러다가 식도로 뭐라도 흘려 보내면 그 구멍이 메워진다. 음식이 더 이상 식도를 흐르지 않게 되면 더 큰 구멍이 나지만. 입덧이 이런 거더라.
사탕을 매일 한 줌씩 먹고 있다. 음식이 식도를 다 넘어가는 순간부터 다시 울렁울렁 입덧이 오니까 입 안에 오래 남아있는 사탕을 찾게 됐다. 그러면서 임산부가 몸에 안 좋게 사탕만 먹는다는 둥, 당 많이 먹으면 임신성 당뇨 온다는 둥, 임산부는 치아가 더 잘 썩는다는 둥의 갖은 고나리도 함께 듣고 있다. 임신한 여성은 육체의 고통에 처했을지라도 뱃속의 아기를 자신과 분리해서 생각하기가 쉽지 않다. 자존심이 상하지만 정신을 잃어가면서도 아기를 걱정한다. 임부를 생각해서 하는 말이라는 그 고나리는 대개 무의미할 뿐 아니라 간악하다.
지하철에서 웃긴 일을 겪었다. 오늘 퇴근길이 유독 힘들었다. 요 며칠간 해내야 할 업무량이 너무 많았고 내 몸이 더 이상은 버틸 수 없을 것 같아 급한 일만 간신히 해치우고 그냥 퇴근했다.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은 몸으로 좀비처럼 영혼없이 지하철에 탑승했다.
소리 내어 말할 힘도 정신도 없어 임산부배려석에 앉아있는 젊은 남성을 손가락으로 툭툭 쳤다. 그리고는 바닥의 핑크색 스티커를 가리켰다. 무례한 행동일 수 있지만 나를 지키고 싶은 생각에 용기 내서 한 행동이었다. 그는 내 임산부 뱃지를 보고 놀라며 점프하듯 일어나 바로 내게 자리를 비워줬다. 그에게 목례를 하고 있는데 그 옆자리에 앉아 있던 다른 남성이 재빠르게 내가 앉으려던 임산부석으로 수평이동 하더라. 그 광경에 내게 자리를 비워줬던 남성은 빵 터졌고, 나는 새롭게 임산부석에 앉은 그를 다시 툭툭 쳤다. 그도 내 임산부 뱃지를 보더니 깜짝 놀라며 용수철 튀듯 원래 자리로 점프해 앉았다. 지하철의 양끝 자리가 그렇게 좋은 자리였던가. 이 정도면 코미디 프로의 소재로도 손색 없을 것 같은데. 정말이지 너무 힘든 하루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