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신일기 27주차. 태동은 사랑스럽기만 하다더니

생각하다임신과 출산

임신일기 27주차. 태동은 사랑스럽기만 하다더니

ND

2018년 6월23일

화장실에 들어가려다 미끄러운 바닥에 발을 잘못 디뎠다. 한쪽 발이 쭉 미끄러졌는데 평소 같았으면 금세 날렵하게 바로 섰을 걸, 무게중심이 옮겨지면서 다른 쪽 다리의 무릎이 굽혀졌고 그대로 바닥에 엉덩이를 쿵 박았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기도 하지만 내 무거운 몸이 이 일련의 진행과정을 조금도 주체하지 못했다. 가만히만 있어도 아픈 내 엉덩이가 이제 꼬리뼈까지 욱신거린다.

화장실 바닥 미끄러웠던 게 어제 오늘 일은 아닌데 이렇게 미끄러져 넘어진 건 처음이다. 다년간의 장시간 대중교통 이용으로 휘청거림 속에서도 무게중심잡기의 고수가 된 내가 이렇게 속절없이 미끄러지다니. 내 맘 같지 않은 몸뚱이가 야속해서 속상하고 꼬리뼈가 아파서 괴롭다. 병원을 가봐야겠는데 또 병원에선 임산부에겐 해줄 게 없다고 하면 눈물이 날 것 같다.

2018년 6월26일

화장실에서 미끄러져 엉덩방아를 찧은 후 꼬리뼈 통증 때문에 타이레놀을 달고 지낸다. 혹시나 했지만 역시나 병원에서는 임산부에겐 해줄 수 있는 치료가 없다며 타이레놀 복용만을 권유했기 때문이다. 임신했더라도 하루 최대 6개까지는 괜찮다며. 최첨단이라는 현대의학도 임산부는 열외로 치는구나.

일반적인 한의원에서도 임산부에겐 해줄 수 있는 게 없다기에 임산부 진료에 특화 되어있다는 여성전문 한의원을 찾았다. 타이틀이 임산부 전문이라 그런지 나를 내쫓지는 않았지만 임부에게는 침을 깊게 놓을 수 없다며 느껴지지도 않게 침 서너개 놓고는 임부가 환부에 효과를 보려면 보통 사람보다 3-4배의 시간이 더 걸린다고만 했다. 그 말 외엔 상담 같은 것도 없었다. 임신한 환자라는 존재를 귀찮아하는 느낌이었다. 임부를 대상으로 진료한다는 건 임신 혹은 임신의 지속을 돕거나 임신 소양증 같은 임신관련 질환을 살핀다는 의미였다.

양방에서나 한방에서나 의료인들은 나를 보면 그 몸으로 어떻게 회사를 다니냐고 한다. 어떤 분은 나무라기까지 했다. 사나흘이라도 치료받으면서 잘 쉬면 살만해지지 않을까 싶어 내 상태에 대한 진단서를 발급해줄 수 있냐 물으면 해당되는 병명코드가 없고 임신하면 원래 다 아픈 거라서 진단서는 발급해줄 수 없다고 했다. 그럴 거면 그 몸으로 어떻게 회사를 다니냐고 혼은 왜 내나. 알면 알수록 신기하고 서러운 임부의 세계다.

2018년 6월28일

'태아딸꾹질'이란 게 있다. 태동의 일종인데 보다 규칙적으로 나타난다. 딸꾹질이라 불리긴 하지만 정말 딸꾹질인지는 모를 일이고 아기의 횡격막 운동에 의해 나타나거나 그냥 일상적 태동의 일환일 수도 있단다.

요 며칠 아기딸꾹질 때문에 잠들기가 힘들었다. 내 자세가 편할 때 아기가 더 잘 움직이는데 딸꾹질이 잘 느껴지기 시작하면 괴롭다는 말 밖에는 안 나온다. 누가 내 속에서 단전 주위를 톡톡 1초 간격으로 자극하는 느낌이다. ‘톡톡’이란 말은 귀엽지만 그보단 아픈 감각이다. 단전에서 강하게 심장 뛰는 느낌 같아 징그럽기도 하고.

도무지 잠에 들 수가 없다. 남편이 아기딸꾹질을 느껴보겠다며 내 배에 손을 댔다가 나를 측은해했다. 아기는 한 시간 넘게 매 초마다 딸꾹거렸고, 중간중간 강한 움직임도 잊지 않았다. 그럴 때면 손을 대고 있는 남편은 놀라서, 나는 아파서 동시에 소리를 질렀다.

뱃속 아기의 딸꾹질에는 괴롭다는 말 밖에는 안 나오지만, 늘 그랬듯 아기의 자연스런 성장과 움직임에 괴로워하는 내 마음을 아기가 느낄까 봐 내 생각을 결박하게 된다. 살면서 이런 적이 없어 설명도 어렵네. 타인에 의한 자발적 자기통제라. 이런 말이 성립은 하는 걸까. 내 뱃속에 있는 아기를 타인이라 명하는 것도 시원한 설명은 아니다.

아기의 태동을 귀엽고 사랑스럽게만 그린 미디어 제작자들 다 만나보고 싶네. 남자면 가만 안 둬.

2018년 6월29일

임신출산카페를 보면 출산직전까지 일을 한다는 임부들이 자주 보인다. 임신 초기 지독한 입덧으로 괴로움에 신음할 때 도대체 막달까지 회사를 어떻게 다니냐며 성을 냈지만, 특별한 경우가 아니고서야 일하는 임부에겐 '퇴사'와 '막달까지 출근'이라는 선택지 밖에 없는 게 현실이다.

퇴사를 선택할 때는 그 이유야 다양하겠지만, 회사에서 퇴사를 종용하는 경우도 많은 것 같다. '네게 출산휴가 육아휴직을 보장할 수 없으니 몸도 힘들 텐데 알아서 일찌감치 퇴사하라'는 압박을 은근히 혹은 대놓고들 한다고.

배가 남산만큼 부르는 때가 오면 거동이 힘들 뿐 아니라 다리엔 부종이 오고 골반 인대는 늘어나고 척추는 계속 뒤로 눕는다. 그런데도 서서 일해야 하는 서비스직 임부들의 고통스런 이야기가 자주 들려온다. 처음엔 만삭의 임부를 서서 일하게 하는 관리자들의 도덕적 감각에 분노했지만 생각을 거듭할 수록 여성의 현실과 권리에 대한 논의는 이렇게 단순할 수 없다는 결론에 다다랐다.

인사관리자의 부덕함을 탓하는 것은 쉽지만, 실은 임신과 출산을 한 여성과 그 아기를 부양해줄 인력이나, 일하지 않고도 일상생활이 보장되는 공공지원이 없는 사회에서 여성의 퇴직과 휴직을 이야기하는 건 그 누구라도 무책임한 일이다.

일상의 삶을 살아내야 한다는 것은 임신한 여성에게도 그렇다. 임신을 했대도 밥 먹고 옷 입고 공과금을 내야 하는 건 그 이전과 동일하다. 그래서 출산 직전까지 노동하기를 택할 수 밖에 없는 임부들이 많다. 이건 체력이 좋아서도 욕심이 많아서도 아니고 살기 위해서다.

회사는 익숙한 사람의 익숙한 노동으로 익숙하게 이윤을 발생시키길 원한다. 퇴직이나 휴직으로 그 공백이 발생하는 걸 회사의 손해로만 본다. 임부의 노동이 임부의 몸이나 태아에 큰 무리로 다가올 수 있단 걸 인지하는 사람들은 회사나 구조를 지적해야 하지만 대부분 그 화살은 임부가 받는다.

회사에 일이 많아 직원 모두가 힘든 날들을 보내고 있다. 모두가 바쁘고 건강한 사람도 지치는 시기다. 그러다 문득 처음으로 뱃속의 아기가 걱정됐다. 지금까지는 내 몸이 아프고 힘들어 괴로웠다면 업무가 과도해진 후로는 정말 아기가 죽을 수도 있겠단 생각이 들어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주변 사람들이 너무 쉽게 왜 휴직하지 않냐 왜 퇴직하지 않냐 묻는 게 화가 난다. 그들은 이렇게 과로하다간 유산하겠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회사를 다닐 수 밖에 없는 내 처지를 고려하지는 않는다. 임산부의 과로에 대한 사회적 책임을 묻지는 않으면서 '아기를 위해 담대히' 일을 그만 둘 것을 상사에 고하지 않는 나를 지적하는 건 너무 간편하고도 괴상한 일이다.

임신 이후에 회사에서 겪는 어려움들이 너무 많다. 임신 사실만으로 회사에서 눈치를 봐야 하는 것도, 휴직시기를 언급할 기회를 어떻게든 노려서 잡아야 하는 것도, 휴직 이후 내 대무자를 신규채용 없이 스스로 찾아야 하는 것도, 아픈 중에 조퇴나 휴가를 써야하는 것도 너무너무 어렵다. 모두 다 나 혼자서 하는 씨름이다. 시스템이란 게 없다.

이렇게 일하다 아기와 나 모두 죽을지도 모르겠다. 회사에선 이렇게 일이 많을 땐 임산부도 초과근무와 주말근무를 해야 한다며 뼈있는 농담을 나누는데 나는 그저 "허허" 멋쩍은 웃음을 지을 뿐 이다. 임신한 사람의 휴식권이 연약한 건 임신이 여성에게만 일어나기 때문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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