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신일기 - 25주차. 아빠가 없는 육아서적코너

생각하다임신과 출산

임신일기 - 25주차. 아빠가 없는 육아서적코너

ND

2018년 6월10일

배가 계속 커지니 이제 책 한 권 들고 다니는 것도 버거워 이북리더기로만 책을 읽다가 오랜만에 종이 책 구경을 하고 싶어 서점에 들렀다. 아기 낳을 준비를 하는 만큼 생애 처음 육아서적코너에 갔다가 놀라운 걸 봐버렸다.

<아이의 잠재력을 깨우는 엄마의 질문 수업>
<아들 때문에 미쳐버릴 것 같은 엄마들에게>
<초보 엄마 육아 대백과>
<엄마 마음 사전>
<엄마표 감정코칭>
<엄마도 모르는 엄마 말의 힘>
<엄마가 놓쳐서는 안될 결정적 시기>

아. 아기는 엄마 혼자 만들고, 엄마 혼자 낳고, 엄마 혼자 키우는 거였구나.

2018년 6월11일

일러스트레이션 이민

크게 무리한 것도 없는데 입술에 좁쌀 같은 두드러기가 올라왔다. 느낌으로는 입술 헤르페스 같은데 두드러지게 보이는 물집은 아니라서 일단 약국에 갔다. 약사는 아무래도 임산부에겐 약 쓰기가 조심스럽다며 연고를 선뜻 내주지 않았다. 청결유지와 보습을 잘 해보고 그래도 낫지 않으면 병원에 가보란다. 면역력이 쉽게 떨어지는 임산부에게 입술포진이 종종 난다는데 걱정이네.

전일제로 실험하고 논문 쓰던 대학원생 시절엔 워낙 피곤한 일상이라 입술 헤르페스를 달고 살면서도 대수롭지 않았다. 연고를 잘 바르면서 어려운 시기를 견뎌내면 한동안은 살만해지니까. 이제 임신을 하니 헤르페스 하나도 전혀 다른 문제로 다가온다. 임신으로 면역체계가 쉽게 망가져 헤르페스에 자주 걸리는데도 임산부라 약을 못쓰는 것부터 임신 중 모체의 헤르페스가 아기에게 유전될 수 있고, 아기의 면역에도 영향을 준다는 이야기까지 어느 하나 가벼운 게 없다.

2018년 6월12일

우리나라는 없는 예산도 끌어다 쏟아 부으면서 가임기 여성의 인구분포지도를 만들고 전시한다. 그만큼 ‘가임기 여성’의 출산에 집착한다. 나는 그 '가임기 여성'이 많은 직장에 다니고 있다. 사내를 걷다 보면 임부들이 어렵지 않게 보인다. 그런데도 회사의 시스템이 어쩜 이럴 수 있나 싶다.

육아휴직자의 대체인력을 채용하지 않는 상황에서 출산 이후 공백을 메울 대무자를 스스로 찾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회사에 일이 많은 시기라 요즘 사무실엔 늦은 밤이나 주말까지 사람들로 가득하다. 근로기준법 상 임산부의 시간외근로는 금지이기 때문에 임부는 정시퇴근을 보장받지만 동료들에게 미움 받는 것까지는 보호받지 못한다. 여기에 휴직 후 내 업무를 이어받는 걸 누가 달가워 할까. 일의 총량은 그대로인데 일하는 사람만 줄어들 때 사람들은 그 원인을 체제가 아니라 공백을 만든 사람에게서 찾는다. 그리고 미워한다. 문제의 원인과 해결 모두 체제에 있는데 말이다.

여기저기서 출산휴가를 언제 시작할거냐는 질문을 받는다. 몸이 약해 일찍부터 쉬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지만 그것도 내 맘대로 정하기가 어렵다. 언제 개시하건 내게 할당된 시간은 출산휴가 90일, 육아휴직 1년으로 최대 총 1년 3개월이다. 일찍 휴직하면 복직도 빠르고, 늦게 휴직하면 복직도 느리다. 어째 되었든 정해진 기간만큼만 쉴 수 있지만 내 맘대로 개시가 어려운 건, 일하던 사람이 사라지면 당장 힘들기 때문이다.

출산휴가는 출산 예정일 전 최대 44일을 이용할 수 있다. 출산 후 45일을 보장하기 위해서다. 법정 기간 내에서 출산 휴가를 일찍 개시하고 싶다고 에둘러 말했다가 출산이 한달 반이나 남았는데 벌써 들어가냐며 한 소리를 들었다. 상사는 "어떤 직원은 야근까지 하고 집에 돌아가는 길에 애 낳았어." 하며 자랑스럽게 이야기하더라.

우리 회사는 출산휴가와 육아휴직을 보장한다. 육아휴직자의 복직율이 매우 높고, 내가 아는 바로는 복직 이후 불이익도 없다. 유자녀 여성의 비율 또한 높아, 회사는 이것들을 대내외적으로 큰 자랑으로 삼는다. 그러나 우리회사는 육아휴직 대체인력을 고용하지 않고, 대무자는 휴직자 스스로 알아봐야 하며, 출산휴가를 보장하더라도 출산이 목전에 있어야만 출산휴가를 개시하도록 눈치를 준다. 이런걸 빛 좋은 개살구라고 할까.

회사는 정말 딱 법만 지킨다. 그럴 때 이 시스템은 구성원이 서로를 미워하고 서로의 노동력을 갉아먹으며 유지된다. 출산하는 여성을 위한 나라는 없다.

2018년 6월14일

자궁을 고정하는 인대인 자궁원인대의 통증이 심각한 수준이다. 침대에 눕는 것조차 너무 힘들고 누워서 조금 움직이기라도 하면 오른쪽 왼쪽 엉덩이가 몹시 아파서 절로 으악 소리가 나온다. 남편의 도움 없이는 옆으로 돌아눕지도 일어나지도 못한다. 스트레칭이나 요가를 한다고 풀리는 거 같지도 않다.

병원에서 초음파침대에 눕고 일어날 때도 원인대 통증에 소리를 지르다 결국 남편이 나를 통째로 들어서 움직였다. 담당의는 너무 아파하는 나를 안쓰러워 하지만 달리 방법은 없단다. 양수 좋고, 태반 좋고, 경부길이 좋고, 아기는 주수에 맞게 아주 잘 크고 있단다. 나는 내가 아파 이거 괜찮은 거냐, 덜 아픈 방법은 없냐, 문의하는데 담당의는 아기는 건강하단 말만 한다.

사람들은 아프면 병원에 가라고 한다. 일반내외과로 가면 임부는 산과전문의가 살펴야 한다며 잘 봐주지 않는다. 참고 참다가 산과 정기검진 때 두통이나 근육통, 복통, 입술포진 등을 문의하면 담당의는 정 견디다 안되겠으면 타이레놀을 먹고 그저 잘 쉬라는 안내만 한다. 뱃속 아기가 괜찮은 이상, 산모가 아픈 건 산과에서도 잘 모른단다. 아기는 늘 잘 크고 있다는데 나는 늘 별 수없이 아프네.

2018년 6월15일

오늘은 종일 엉거주춤 걸었다. 질과 항문을 자궁 속 돌덩어리가 묵직하게 누르는 거 같아 불편한데 그런다고 생식기를 부여잡고 걸을 수도 없는 노릇이다. 출산 경험이 있는 동료직원에게 증세를 이야기하니 그게 바로 "밑빠짐" 증상이란다. 출산 후 심해지는 경우도 있고, 생리 중일 때도 종종 나타난다고.

얼마 전 트위터에서 출산 시 정말 밑이 빠진, 그러니까 아기와 함께 자궁이 같이 배출된 이야기를 본 적이 있어 공포가 몰려왔다. 15주 이후부턴 질을 만지면 부어있는 듯 했는데, 그게 자궁이 밑으로 내려와 그랬나보네. 자궁이 만져지는 건 아직도 생경한, 기분 나쁜 경험이다.

퇴근 길 버스가 과속방지턱을 덜컹덜컹 넘을 때 마다 자궁이 질로 빠져나올 것 같다. 나는 지금 편안히 넓은 의자에 앉아가지만, 아무도 양보해주지 않는 대중교통에서 고생하며 귀가할 다른 임부들을 생각하니 속이 쓰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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