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3월14일
임산부 배려석을 양보 받을 때 더 이상 고맙단 말을 하지 않기로 했다. 그들은 임산부 뱃지를 달고 있는 나를 한참 노려보고는 내 어린 얼굴과 마른 몸을 판단하고 꼭 한 마디씩 거든다. 감사하다며 얼굴의 근육을 움직여 미소 짓는 데도 에너지가 든다. 하나도 고맙지 않다. 나는 출퇴근길이 너무 밉다.
나를 잘 아는 사람이든 생판 처음 본 사람이든, 내 마르고 약한 몸에 고나리질 하기를 좋아한다. 사람들은 내가 임신한 여성이라는 이유로 내 몸을 아주 자연스럽게 품평한다. '주수에 비해 배가 작네.' '골반이 작아 애 낳기 힘들겠네.' 배가 더 나오고 사람들이 내 배를 공공재마냥 만져댈 생각을 하면 끔찍하다.
몸이 그래서 자연분만은 하겠냐고. 아기가 자연분만으로 질의 건강한 세균을 훑고 태어나야 건강하다고. 자연분만으로 아기도 고통을 겪어봐야 태어날 때부터 어려움을 극복하는 걸 배우는 거라고. 엄마가 건강 관리를 못 해서 자연분만을 못 하면 평생 아기에게 죄가 되는 거라고. 아주 쉽게들 이야기한다.
어떤 이들은 제왕절개로 태어난 아이들은 스스로 죽을 힘을 다해 머리를 밀고 태어난 게 아니라, 의료진의 인위적인 도움으로 쉽게 태어나서 연약하고, 자라서도 끈기가 없다는 말을 아주 쉽게 내뱉는다. 그 앞에 제왕절개로 아기를 낳은 여성이 있대도 말이다. 여성들 스스로 자연분만이나 제왕절개한 산모를 편가르고 각자의 모성애에 점수를 부여한다. 남성 중심의 사회가 만들어 낸 자연분만 모성신화가 이렇게 임산부들을 천천히 죽여왔다. 내 몸에 대한 내 권리가 이런 식으로 쉽게 묵살된다.
2018년 3월15일
지하철에서 마주하는 사람들은 종종 이런 말들을 한다.
아가씨가 임산부 표식을 왜 달고 있어?
학생 같은데 임신했어?
어, 그러고보니 다 반말이네. 아가씨건 학생이건 가임기 여성이 임신한 게 그렇게 이상한가? 심지어 내 나이는 아이를 낳아줘야 하는 세대라고, 이 세대만이 희망이라고 맨날 뉴스에 나오는데? 아무튼 이상한 사람들은 절대 하나만 이상하지 않다.
2018년 3월16일
사실 그저께 내게 12주의 기적이 찾아온 건가, 싶어 설렜는데 그 날만 컨디션이 좋았던가 보다. 아직도 입덧이 끝나지 않았다. 내가 뭔가를 먹고 있는 걸 보면 사람들이 묻는다.
그건 괜찮아요?
그럼 나는 대답한다.
토하더라도 일단 살기 위해 먹어요.
오늘 아침도 두유 한 팩 다 먹기가 너무 힘들다.
생각 없이 말을 내뱉는 사람들이 참 많다. 그들에겐 그저 한마디겠지만, 나는 그런 사람들을 너무 많이 마주한다. 입덧이 심한 내게 아기 낳을 때까지 입덧을 하는 사람도 있다는 말이나, 그러게 평소에 건강했더라면 좀 나았을거란 말을 아무렇지 않게 하는 사람들. 그게 그들 사유의 수준이라 생각한다.
늘 같은 시간, 같은 열차에 타다 보니 자주 보는 사람들이 있다. 내가 임산부 배려석 앞에서 모욕을 당하는 걸 목격한 한 분은 다음 번에 뵀을 때 임산부 배려석에 앉으려는 동행인을 막으며 내게 앉으라셨다. 오늘은 나를 발견하곤 임산부 배려석에 앉은 분께 양보를 부탁하셨다. 이 분께 목례를 하고 자리에 앉았다.
실은 참 고맙다. 내 몫이었던 눈치 싸움과 감정 싸움을 대신 종식시켜줬다는 게. 전에 내가 모욕당할 때 이 분이 건너편에서 그 장면을 목격하시며, 임산부 뱃지 처음 봤다고, 저런 경우가 있으니 꼭 비워둬야겠다고 동행인들과 얘길 나누시는 걸 들었다. 그 이후 계속 임산부의 존재를 인식하고 도움을 준 것이다.
나는 매일 이상한 사람들을 만나고 매일 모욕을 당한다. 임신 전에도 여성인 내게 지하철은 무섭고 긴장되는 공간이었지만, 임산부가 된 후로는 사람에 대한 불신과 증오가 더 커졌고, 사회적 배려와 일반적인 인식에 대한 기대를 거둬버렸다. 그러다 가끔 선인을 만나면 또 지나치게 감동을 해버린다.
개인의 선의가 사회의 부족한 부분을 채우도록 맡겨선 안 된다고 생각한다. 선한 개인은 완전할 수 없고, 언젠가 피로해지기 마련이다. 나는 오늘 선인을 만났지만, 그가 나의 내일까지 보장하지 않는다. 약자에게 안전한 사회라는 건, 선한 의지를 가진 소수의 사람이 아니라 섬세하고 체계적인 시스템만이 제공할 수 있다.
2018년 3월18일
1차 기형아 검사가 무탈히 끝났다. 1차 검사로는 40% 확률로 기형을 확인할 수 있다고 했다. 태연하려 했으나 검사날짜를 예약할 때부터 검사대에 누워 검진을 받을 때까지 긴장이 됐다. 혹여 아기에게 이상이 있을까 두려웠다. 검사 후에야 안도했지만, 여전히 두려운 마음이 있다. 60%는 모르는 것이고, 만약 이상이 있다고 해도 내가 할 수 있는 게 있을까?
임산부라면 자연스러운 절차로 주수에 맞춰 기형아 검사를 안내 받고 두려운 마음으로 검사를 받는다. 그리고 낮지 않은 확률로 위험군에 속하게 된다. 40%만 보장할 수 있는 검사로 말이다. 이 검사에서 위험군이라 진단을 받으면 더 많은 검사료를 지불해 고도의 검사를 받도록 요구받고, 결과가 나올 때까지 온갖 걱정과 두려움과 씨름하게 된다.
임산부를 의학적 위험성을 안고 있는 환자로 분류하고, 미미한 소견에도 병리학적 진단을 내려 임산부의 불안을 가중시키는 이 출산 문화가 과연 올바른가 하는 생각을 한다. 임신은 힘들고 아프고 괴로운데, 적절한 처치는 부족한 반면, 쉽게 위험군이라 라벨링하고 지난한 검사만 요구하는 건 아닌가 싶다.
임부 커뮤니티에선 이 고가의 검사들을 꼭 해야 하는지, 자신이 병원에서 '이상 소견'이라고 받은 검사 결과가 진짜 이상 소견인지 묻는 글들이 많다. 불필요한 고가의 검사를 겁주듯 요구하는 거 아니냐는 의료인에 대한 불신이다. 그러면서도 의사의 소견 밖엔 기댈 곳이 없는 임부들은 혹시 모를 가능성 때문에 두려워하며 검사에 응한다. 임신 당사자의 정보결핍과 임부-의료인 간의 신뢰부재가 큰 문제라고 생각한다. 임신과 출산이 인류가 겪어온 자연스러운 일이라면서 정작 당사자들은 왜 이렇게 정보로부터 멀까.
2018년 3월19일
내가 지하철에서 겪는 일을 트위터에 적으면 소설이라느니, 사실인지 의심스럽다느니, 내가 말하는 한남은 가상의 한남일 뿐이라느니 하는 멘션이 달린다. 내 일상에서 벌어지는 일들이 소설이라고 생각할 수 있는 것도 참 권력이다. 임신한 여성이 실제 겪는 일이라고는 상상도 못하겠지. 임신한 여성으로 다시 태어나야만 알려나.
오늘은 임산부 배려석에 덩치 큰 중년 남성이 앉아있었다. 내가 쳐다보니 "왜. 뭐." 하길래 익숙하게 "아 제가 임산부라서요." 했더니 그 옆에 앉아있던 교복 입은 여학생이 자리를 비켜줬다. 내가 그의 옆자리에 앉는 순간에도 나를 쳐다보며 "뭐." 하길래, 그가 앉은 자리를 가리키며 "여기 임산부 배려석이라서요." 하며 내가 얼마나 덜덜 떨었는지 당신들은 절대 모를 거야.
임신 후에 지하철 타면서 정말 별별 일 많이 겪었다. 그 때마다 내 성격이 곱상하거나 살갑지도 못해 그냥 웃으며 지나가지도 않았다. 매일, 정말 매일 이상한 사람을 만나지만 그렇다고 또 매일 지하철 얘기를 트윗하기도 뭐해 오늘은 다른 이야기를 적어봤는데, 저런 멘션이 오니 기가 찬다. 그들 말처럼 내가 겪는 일들이 모두 소설이라면 얼마나 좋을까? 누구보다 내가 제일 좋아할 텐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