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신일기 16, 17주차

생각하다임신과 출산

임신일기 16, 17주차

ND

일러스트레이션: 이민

2018년 4월13일

회사에 임부들이 더 생겼다. 30명 남짓한 우리 부서에 임신한 직원이 4명이 되었다. 나보다 한 달 앞서 임신한 선배가 임신 소식을 알릴 때도, 내 소식을 알릴 때도 따뜻하게 축하하는 분위기는 아니었지만, 지금은 보스부터 신입까지 부서의 위기라고들 이야기한다. 한창 널뛰는 호르몬에 고생하고 있을 7~8주차 초기 임부 동료들이 걱정이다. 내가 느끼는 이 위화감이 그들에겐 더 크게 느껴질 텐데. 

보스가 우리 부서의 전 직원을 불러모았다. 급격히 많아진 업무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가 싶더니 결국 임신한 여성직원들에 대해 말을 꺼낸다. 임신 당사자도 같은 공간에 불러놓고 "임산부가 많지만 업무에 빈틈 생기지 않도록 긴장하라."는 말을 하려면, 업무 중 임부에 대한 배려도 같이 언급해야 온당하지 않나 싶지만 역시 그런 건 없다. 그 자리에서 그저 임신한 죄인이 된 것만 같았다. 고개를 들어 동료들을 바라보기가 힘들었다. 육아휴직자의 대체근로자를 채용하지 않는 회사이지만 상황이 상황이라며 다급하게 신규채용을 논의했다. 신규채용자는 학력, 경력, 실적 다 필요 없고 남성이면 합격이라는 우스갯소리를 하지만 전혀 웃기지 않았다.

이런 뻔한 질문을 던지고 싶다. 다음 중 잘못은 누구에게 있는가? 비난은 누가 받아야 하는가? 미안함은 누가 느껴야 하는가?

  1. 회사에 일이 많은 시기에 임신한 여성직원
  2. 일이 갑자기 더 많아져 임신한 직원이 얄미운 동료
  3. 직원이 임신하더라도 업무에 공백이 생기지 않는 시스템을 마련하지 않은 회사

정답이 1번 혹은 2번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대로 한강으로 가도 괜찮을 것 같다.

2018년 4월17일

태동이라는 게 뱃속 아기가 건강하게 자라고 있음을 느끼고, 보이지 않지만 어쨌든 내 아기인 생명체와 교감하는 낭만적인 일일 줄만 알았다. 처음에는 뱃속에서 기포가 보글보글 올라오듯 간지럽고 귀여운 느낌에 신기하기도 했지만, 지금은 자궁이 요동칠 때마다 깜짝 놀라 심장 떨어질 거 같고 무섭다.

아기가 더 크면 발로 자궁벽을 강하게 차기도 하고 머리로 박기도 하면서 모체가 심한 통증을 느끼기도 한다던데. 임신 이야기를 미디어에서 제일 많이 들은 나는 이게 다 낭만적일 줄만 알았고 실제로 경험한 태동이 기쁘지 않은 나를 보면서 내가 차가운 엄마인가 고민하기도 했다. 원통하다.

아기가 뱃속에서 모체를 건드리는 게 임부에겐 불편한 감각이라는 공통의 정서가 필요하단 생각을 한다. 월경이 아기를 준비하는 신비하고 고귀한 과정이라는 기존의 가르침에서 아프고 짜증나고 번거로운 일이라는 인식이 퍼졌던 것처럼 말이다. 태동에 움찔하며 오늘도 모성애신화와 홀로 씨름한다.

일러스트레이션 이민

배가 커지면서 지인들에게 배 한번 만져봐도 되냐는 소리를 종종 듣고 있다. 이런 요상한 요청을 하는 사람들에게 열심히 얘기해주고 있다. 당신에겐 '와 신기하다, 와 아기다' 하는 느낌이겠지만 사실 내 입장에선 이건 그냥 내 배다. 내가 당신 배를 만질 때 당신이 느낄 감정과 내 감정이 다르지 않다.

아기가 들어있는 네 배를 한번 만져봐도 되겠냐, 신기하겠다, 하는 이야기는 나를 아기 캐리어로 느끼게 한다. 장난감 같은 기분도 들고. 여성으로 살면서 객체화 대상화되는 기분은 언제나 더러웠고 이를 공감하는 사람도 많았는데 임신 이후엔 더 속절없이 "임신한 여성"이라는 객체가 됐다.

아기를 출산한 이후에 내 몸은 어떻게 될까? 아기와 함께하는 장밋빛 미래를 아무리 상상해보려 해도 내 몸에 대해서만큼은 포기하게 된다. 아무런 꿈도 희망도 없으니까.

2018년 4월19일

태동을 느끼면 배에 손을 대고 아기에게 말을 건네라는 조언들을 듣는다. 한참 뇌가 성숙 중인 아기에게 태담보다 효과적인 태교는 없다면서. 내가 태동을 불편해하는 게 아기가 스스로의 존재를 부정적으로 느끼는 건 아닐까 하는 마음에 당황하는 마음을 감춰보려 하지만 영 쉽지가 않다.

태담과 태교에 부담을 느끼고 있다. 늘 나 잘난 맛에 내 멋대로 살아왔지만, 내 생각과 행동이 내가 아닌 다른 인격체를 형성한다는 건 무서운 이야기다. 아기가 내게 종속되지 않고, 독립적인 한 사람으로 자기 인생을 살아가길 바라는데 태중에서부터 내게 묶인다면 난 크게 고통을 느낄 것이다.

태담과 태교의 이야기가 논리적인 것 같아 불안함에 논문을 검색했다. 그저 90년대 초반에 일었던 담론을 여전히 되풀이하고 있을 뿐이란 걸 확인한 후에야 마음의 안정을 찾았다. 17주차의 태아는 엄마의 감정을 동일하게 느낀다기에 걱정이 되기도 했지만 최근의 연구들은, 외려 그렇기에 임부의 평안이 최우선이라는 결론으로 흐른다.

이 시기의 아기는 엄마 목소리를 식별하고 엄마의 감정을 그대로 느낄 수 있다고 한다. 그래서 아기에게 엄마의 차분한 목소리로 사랑한단 이야기를 자주 들려주고 행복을 교감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최근의 연구들을 찾아보니 계속 나 잘난 맛에 내 멋대로 사는 게 아기 정서에 가장 건강한 일이겠다는 생각이 든다.

2018년 4월20일

유륜이 온 가슴을 다 덮을 기세다. 내 생애 없을 줄만 알았던 큰 가슴에 기분이 좋았던 것도 사실이지만 수유 후 바람 빠진 풍선처럼 탄력없이 쳐질 걸 알고 있다. 유두에 각질이 일어나고 사이사이 노란 때가 계속 껴 있다. 오일을 발라 살살 밀어 보려다 혼자 오르가즘만 느끼고 자궁수축이 와서 고통받았다.

샤워를 하려다 결국 남편을 불렀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서서 머리를 감고 상반신을 씻는 일뿐이었다. 허리를 굽히거나 쪼그려 앉으면 배가 땡겨서 한참을 고통받는다. 아무리 사랑한대도 남편에게 내 항문세척을 맡기고 싶진 않았는데 말이다. 남편이 없거나 미운 날에는 나는 씻지도 못하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전엔 임신이라 하면 예쁘게 배 나온 여성이 뱃속 아기와 교감하며 좋은 음식 먹고 좋은 이야기만 듣는 모습이 자연스레 연상됐다. 발은 커녕 내 항문도 내가 스스로 못 닦으면서 오르가즘을 느낄까봐 내 모든 섬세함을 끌어 모아 유두의 때를 닦아내고 있을 줄 누가 알았겠는가. 임부의 일상은 상당수 절망이다.

2018년 4월21일

양치를 하다가 칫솔을 너무 깊이 넣었는지 배에 힘이 들어가더니 요도괄약근에 힘이 풀려 그대로 오줌을 쌌다. 내 몸이 계속 나에게 모욕감을 준다. 빨리 나가야 하는데 별수 없이 속옷을 빨고 샤워를 했다. 나는 샤워하는 시간이 너무 싫다. 육체적으로 힘들고 정신적으로도 괴롭다.

이렇게 구구절절하게 내 몸이 나를 괴롭힐 줄 몰랐다. 임신을 경험했대도 이런 이야기는 너무 수치스럽고 불편해 친구에게라도 이야기하기 쉽지 않았을 거다. 이런 세세하고 노골적인 이야기는 우리 엄마도 듣기 싫어하겠지.

내가 고생하고 있으면 사람들이 내 배에 대고 이렇게 말한다. "아기야, 엄마 힘들게 하지 마." "아기야, 커서 얼마나 효도를 하려고 엄마를 이렇게 괴롭히니?" 내가 원해서 아기를 가졌다. 이건 아기가 날 괴롭히는 게 아니라 임신 중 일어나는 일이다. 아기에게 효도를 주문하는 게 아무래도 불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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