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7월21일
임신 소식을 이제 들었다며 축하한다고 남자선배에게 오랜만에 전화가 왔다. 이제 막 돌 지난 첫째 아이를 양육하던 중에 아내가 둘째 아이를 가져서 자기는 아내를 떠받들고 있는 중인데 회사도 다니면서 퇴근 후 양육과 가사로 아주 힘든 나날을 보내고 있다며 네 남편도 임신한 아내를 돌보느라 많이 힘들겠다는 소리를 했다.
독실한 기독교 신자인 그는 이런 말을 했다.
요즘 나는 아내를 하나님처럼 섬기고 있어. 태초에 신이 말씀으로 천지를 창조하셨듯 아내가 설거지를 하라 말씀하시면 재빨리 설거지통을 비우고 빨래를 하라 말씀하시면 언제 빨래감이 있었냐는 듯 빨래통을 비우고 있어. 내 아내는 말씀만으로 온 집안을 지휘하셔. 그래도 내가 잘 못해서 계속 혼나.
선배는 그런 말이 아내를 욕보이는 일이란 걸 모르고 있었다. '아내를 위해 온 몸으로 희생하지만 열심히 해도 혼나는 나'가 그렇게 고귀하고 소중할까? 그렇게 대단한가? 스스로 좋은 남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에 대한 환멸이 쌓인다. 다른 남편들과는 다르다는 정체성도 어쩜 그리 우스울까.
당신들이 고생하며 하고 있는 게 '원래는 아내 몫'이라는 당신의 저급한 인식만 드러날 뿐이다. 아내가 임신하고 고생 하는 건 자연스러우면서 남편이 양육과 가사를 맡은 건 어쩜 그리 특별하고 숭고한지 모르겠다. 어쨌든 나와 아내는 동등한 위치는 아니라는 거지. 가사'돕는'다는 남편들이 제일 싫다.
남자선배들은 나와 말 섞어서 좋은 소리 들을 일 없다는 걸 알면서도 왜 그렇게 내게 '좋은 남편'임을 어필하려고 하는 걸까. 이 가부장사회에서 좋은 남편이란 건 없다. 개인이 아무리 노력한대도 한국에서 나고 자란 남성은 한국남자 못 벗어난다. 시스템이란 게 그런 거다. 노력없이 이룬 자기 위치를 인식하고 인정하는 데서부터 시작해야 좋은 남편 길로 들어서는 구멍에 빛이라도 들어올 걸?
2018년 7월22일
와. 정말 덥다. 몸이 원래 약해 여름에도 추위로 고생하는 편인데 올 여름은 정말 너-무 덥다. 여름에도 덥단 소리를 잘 안 하던 내가 ‘밤새 더워서 못 잤다. 땀을 뻘뻘 흘린다. 이상하다.’ 했더니 아이 둘을 양육하는 지인이 "당연하지! 자기 몸 속에서 심장이 두개나 뛰는데!"라고 하더라. 아이 더워라.
여름에 출산한 지인은 실내외 할 거 없이 너무 덥고 몸에 열이 나는데도 찬 바람 쐬면 안 된대서 긴 팔, 긴 바지로 산욕기를 버티며 힘든 시간을 보냈다고 했다. 에어컨 시원하게 못 켜게 하는 조리원에서 도저히 못 참겠어 반팔 차림으로 복도에서 땀을 식혔다고. 그때 출산으로 벌어진 뼈 사이로 바람이 들어왔는지 지금 너무 시리고 힘들단다.
나는 춥디 추운 한국의 겨울날에 출산하는 여성들이 더 힘들지 않을까 하고 생각하곤 했는데, 출산 경험이 있는 이들은 출산 예정일이 여름인 사람들에게 날씨 때문에 힘들어서 어떡하나, 엄마가 고생이 많겠다, 하는 말을 더 많이 하더라.
임신을 하면 기초체온이 올라간다. 내 몸 안에선 나보다 더 뜨거운 타 생명체가 자라고 있고. 그런 몸으로 여름을 맞이하니 그 어느 때 맞이한 여름보다 더 지독하다. 출산 후 '나'를 위해 에어컨도 못 켜는 여름을 지내야 한다면 진짜 죽고 싶지 않을까.
2018년 7월24일
나와 임부시기를 같이 보낸 지인이 막 아기를 낳고선 신생아 사진을 보내왔다. 사진을 보자마자 내 입에서 이 말부터 나왔다.
헉, 너무 사람이다.
지금 내 뱃속에 한 ‘사람’이 있다는 느낌은 잘 안 드는데 갓 태어난 아기는 너무 사람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지금은 아기가 아무리 움직여도 내 뱃속 무언가 일 뿐인데 말이다.
태어나는 순간부터 아기는 나와 별개의 인격으로 존재하겠구나. 지금은 분리가 잘 안되는데 말이다. 내 뱃속에 한 인격이 자라고 있다고 생각하면 이거 너무 부담스러운데. 아직은 더 내 위주로 생각해야지, 하고 마음먹지만 신생아 사진이 계속 아른거려 몹시 신경 쓰인다.
2018년 7월25일
아빠에게 전화가 왔다.
배부른데 덥고 고생이 많겠지만 아기 태어나면 더 힘들어. 지금이 제일 좋을 때야.
아빠는 임신을 해봤던 걸까?
임신출산육아에 말을 얹는 남성들에겐 특징이 있다. 그 이전엔 안 해도 됐던 일을 아내의 임신출산으로 조금씩 거들어야 했는데 처음 하는 일이라 힘들긴 했지만 스스로 너무 대견했던 거지. 아빠도 나 아기 때 기저귀 가느라 너무 힘들었다고 뱃속에 있을 때가 좋았다고 한다. 내가 엄마 뱃속에 있을 땐 아빠나 좋았지 엄마는 힘들었어.
아기가 뱃속에 있을 때가 더 낫다는 얘기는 임신출산을 경험한 여성이 말해도 그 공감능력이 의심되는데 하물며 도움도 안되는 남성이 말할 때면 저 스스로나 잘하란 말이나 하고 싶다.
2018년 7월26일
이런 게 ‘후기입덧’인가. 토할 거 같다. 미식거리고 울렁거리는 초기입덧과는 확실히 다르지만 토할 거 같은 고통이 또 다시 나를 괴롭힌다. 조금만 먹어도 숨이 벅차고 가슴이 답답하다. 어제는 밥먹고 다섯시간 후에도 구토가 목 밖으로 넘어왔다. 그간 소화가 하나도 안됐다는 걸까.
이제는 가슴 바로 밑부터 불룩하다. 심장, 위, 폐가 다 눌리고 있다. 폐환자처럼 계속 마른기침을 하고 답답함을 호소하는 중이다. 임신을 8개월간 지속하면서 별 다양한 증세를 다 겪고 있는데, 어째서 인간은 여성의 몸에서 10개월이나 자라다 나와야 하는 걸까. 똑같은 업무에 똑같은 일상을 살아내면서 내 몸에선 제대로 규명도 안 되는 어마어마한 일들이 계속 일어나고, 나는 이렇게 속절없이 고통만 받아야 하다니. 21세기 현대과학 뭐야, 뭐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