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신일기 35주차. 여성은 뭘 해도 욕 먹는 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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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신일기 35주차. 여성은 뭘 해도 욕 먹는 나라

ND

일러스트레이션: 이민

2018년 8월19일

계속 커져만 가는 내 배를 보면서 이것 참 야만적이란 생각을 했다. 도대체 인간의 몸을 어디까지 부풀릴 셈인가, 하는. 인공지능 알파고가 바둑 거장을 이기고, 유전자가위로 난치병도 고친다는 2018년에 사는데 인간이란 존재는 여전히 여성의 몸에서 열 달 동안 자란 후에야 비로소 세상에 나올 수 있다니.

곧 터질 것만 같이 커다래진 내 배를 바라보고 있으면, 여성의 몸을 통해야만 재생산이 가능한 현대라는 건 그 자체로 너무 여성을 배제하는 사회란 생각이 든다. 이렇게까지 여성에게 가혹할 일인가? 다른 기술들은 다 발달했는데 어째서 여성의 몸을 파괴하는 방식으로 이뤄지는 재생산 부분에서만 진보가 없냔 말이다. 여성의 몸에 대한 연구엔 펀딩하지 않으면서 여성에게만 아기 낳으라고 떠미는 국가에게 도대체 여성이란 무엇일까.

2018년 8월21일

혈변을 보았다. 그저 올 게 온 거라고 나를 다독이지만 손가락으로 아무리 눌러봐도 들어가지 않는 치핵에 결국 한 숨을 쉬었다. 대부분의 후기임산부가 치질(치핵)을 앓는다고 하는데 해결방법은 출산 후 좌욕 혹은 수술이라고 한다. 어쨌든 출산 전엔 안고 가야 하는 질병이라고. 아기가 뱃속에서 계속 커지니 몸 속에 있어야 하는 조직이 결국 밖으로 나오는구나. 그러잖아도 치골과 골반이 아파 앉기도 서기도 걷기도 힘든데 이제 항문까지 내 고통을 증가하는데 동참했다.

우스꽝스러운 질병이란 건 아무것도 없는데 항문질환은 어쩐지 더럽고 우스운 소재로 종종 취급되어 임부들이 고통을 이야기할 때 더 장벽을 느끼는 것 같다. 치질은 임신 후기에는 물론 출산 후 심화되기도 한다. 치질 그 자체로도 불편하고 고통스럽지만 일반적인 임신증세까지도 부끄러워 말 못하게 만드는 사회가 더 큰 문제가 아닐까 생각한다.

2018년 8월22일

나는 임신을 했고, 사회의 무지와 편견, 혐오 속에 9개월을 지냈다. 간신히 버티고 버텨 근로기준법에서 출산휴가의 시작을 허가하는 시기까지 회사를 다니다 드디어 휴직을 시작했다. 나로서는 내가 해 온 공부와 경력에 아쉬운 일이지만 더는 회사를 다닐 수 없는 몸이 되었고, 회사에선 나를 두고 바쁜 시기에 도망간 사람처럼 수근댔다.

기혼여성은 뽑아서 가르쳐 놓으면 결국 애 낳으러 간단 얘기를 수없이 들었다. 비혼 동료들은 그 나이 되도록 시집 안가고 뭐하냐는, 젊어서 아기 많이 낳는 게 최고라는 얘길 잊을 만하면 들었다. 여성은 뭘 해도 욕먹고 차별 받는 사회에서 우리가 부수어야 할 건 가부장제이고, 거기에 필요한 건 여성연대라고 믿었다.

일러스트레이션 이민

나는 변화 많은 시기를 살고 있다. 지금 우리가 보내는 이 시기는 여성이 여성이라는 이유로 사회로부터 억압 당하고 차별 당해 온 숱한 역사를 여성의 목소리로 고발하고, 여성해방의 새로운 나라를 꿈꾸는 희망찬 격동의 시기라 생각한다. 결혼하고 아기를 낳아 제도 안에서 변혁을 도모하며 삶으로 투쟁하는 여성의 이야기와, 기존의 가부장 질서 자체를 거부하고 비혼과 비출산을 실천하며 여성 존재로서의 생을 올곧이 살아내는 여성의 이야기 모두 ‘여성의 이야기’다.

각 세대의 여성은 저마다 맞닥뜨린 차별의 파도를 견뎌 왔다. 여성 스스로가 원하는 삶을 살도록 가만 내버려두지 않는 사회에서, 그럼에도 여성들은 제가 살아내고 싶은 삶을 그리고 각기 모습대로 투쟁하며 여기까지 왔으리라. 결국 여성해방은 여성연대로부터 온다고 믿는다. 나란히 가지 않아도 함께 갈 수 있다고 믿는다.

2018년 8월24일

임신 35주차. 배는 날로 날로 커지고, 밥을 맛있게 먹고도 얼마 후면 호흡곤란이 오고, 가진통은 정말 시도 때도 없이 오고 있다. 집 안에서 조금 돌아다니면 가진통이 오니 다시 눕게 되더라. 이렇게 온종일 자다 먹다 깨다 했다. 여전히 움직일 때마다 치골이 너무 아프고, 치질이 고통스러워 항문을 쪼개고 싶은 마음을 억누르며 시간을 보내고 있다.

그런데 사회 생활을 하지 않고, 지하철을 타지 않고, 불필요한 말들을 듣지 않으니 훨씬 살 만하다. 몸이 아프면 더 아팠지 그 전보다 괜찮아지지도 않았는데, 임신으로 겪는 사회적 스트레스가 사라지니 마음만은 한결 편해졌다. 내가 임신기 동안 그렇게도 힘들어 했던 게 대부분 사회적 요소 때문이었다는 게 더 분명해졌다.

그리 아파서 어떡하냐 걱정하는 지인들에게 "괜찮아요. 이제 회사 안 가도 되니 마음 편히 아플 수 있어요. 아파도 걱정 없어요."라고 대답했다. 말하는 나도 울고 듣는 지인들도 울었다. 조기진통이 와도, 치골 통증으로 걸을 수가 없어도, 두통 현기증에 쓰러져도, 고열에 시달려도, 적절한 약은 못 쓰지만 출근은 해야 하는 ‘일하는 임산부’의 애환을 더 많은 사람들이 널리 알았으면 좋겠다.

2018년 8월25일

보건복지부에서 낙태 수술을 비도덕적 진료행위로 규정하고 행정상 불이익을 주는 개정안을 시행했다. 임신한 여성이 어떤 하루하루를 보내고 그 몸에선 어떤 일들이 벌어지는지 알기는 할까. 밥을 먹고, 경제 활동을 하고, 사회적 관계를 맺고, 인생을 고민하면서 진짜 삶이란 걸 살고 있는 여성이란 존재엔 관심도 없으면서 국가가 여성의 몸과 그 재생산권을 통제한다는 기만이 또 어디 있을까.

여성은 국가를 위해 존재하지 않는다. 여성의 몸은 국가에 봉사하기 위한 도구가 아니다. 여성의 삶은 여성이 선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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