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신일기 4. 임신 8주차

생각하다임신과 출산

임신일기 4. 임신 8주차

ND

일러스트레이션: 솜솜

2018년 2월14일

입덧의 절정기라는 임신 8주를 지내고 있다. 음식을 먹으나 안 먹으나 목구멍으로 신물이 올라온다. 속쓰림에 신음하지만 마음 편히 먹을 수 있는 약도 없고 마냥 축 처져있다. 회사에서는 점심시간이 다가오면 마음이 불안해진다. 사람들은 이상하다. 식당에서 풍기는 밥 냄새가 역겨워 집에서 도시락을 싸와 혼자 먹거나 휴게실에서 점심시간을 보내는 나를 못마땅해하는 눈치다. 내가 입덧으로 유난을 부린다고 생각하는 걸까. 임신했다고 단체생활에 잘 복무하지 않는 사무실 막내가 그저 아니꼬운 걸까. 내가 눈치를 심하게 보는 건가 싶다가도 점심시간만 다가오면 상사와 동료들의 눈빛과 뼈있는 말 한마디에 심증이 확신으로 바뀐다. 신체에 별다른 이벤트가 없는 사람과 동일할 수는 없는 노릇인데, 아무래도 막내가 제 몸 불편하다고 몸을 사리면 언짢은 게지.

오늘도 입덧 때문에 힘들어서 점심을 거르고 휴게실에서 쉬고 있는 중에 아빠에게 전화가 왔다. 휴식을 방해 받고 싶지 않아 통화를 거절하고 점심시간이 끝날 때쯤 사무실로 복귀하는 길에 전화를 드렸다. 왜 전화를 안받았냐고 하시기에 몸이 안 좋아서 휴게실에서 자고 있었다고 하니 아빠는 늘 내게 하던 말을 하신다. 

아프다, 아프다 하지 말랬지. 사람들이 싫어해. 아파도 참아.

엄마는 나를 임신했을 때 입덧이 정말 심했다고 했다. 음식 냄새만 맡으면 구토를 하는 게 왠지 이상해서 병원에 갔고 그제서야 임신 사실을 알았단다. 내가 우량아로 태어난 터라 낳는 중에도 엄마는 생사를 오고 갔다고. 이걸 아빠는 이렇게 회고했다. 

네 엄마는 임신을 확인하기 전 까지는 멀쩡하더니 병원에서 임신이라고 한 순간부터 별 거에 다 웩웩 거리더라. 얼마나 유난이었는지.

내가 입덧으로 힘들어 하면 엄마는 내가 당신 닮아서 그런 건 아닐까, 자기 탓은 아닐까 미안해 하고 날 안쓰러워 한다. 아빠는 내가 엄마 닮아서 꾀병이나 부리고 유난 떤다고 비아냥거린다.

아빠 말이 일부 맞는지도 모른다. 임신했다고 '아프다, 힘들다’ 하니 사람들이 정말 싫어한다. 그런다고 혼자 견디고 참아내야 한다는 건 틀렸다. 말하고 소리치고 유난이라도 부려서 나만이 홀로 감당해야 할 일이 아니라고 계속 이야기할 것이다. 임신한 여성을 대하는 당신의 낯짝을 그대로 까발리고 배려 없는 사회의 맨 몸을 그대로 폭로할 것이다. 아기가 성장했을 땐 사회가 더 성숙해져 있었으면 좋겠다.

2018년 2월15일

드디어 연휴다. 몸이 비루하여 이번 명절엔 어디에도 가지 않고 집에서 남편과 휴식에만 집중하기로 했다. 오랜만에 여유로운 낮 시간을 맞이하여 그 동안 방치했던 긴 머리를 다듬고 싶었다. 집 앞 미용실이 한가하다. 대기 없이 바로 착석해 커트를 요청했다. 미용사가 명절인데 어디 안 가냐 물으시기에 입덧 때문에 남편과 집에서만 쉬기로 했다 답하니, 학생 같아 보이는데 새댁이냐며 한번 놀라고, 고작 입덧한다고 명절에 시가에 안 가냐며 두 번 놀란다. 

비용을 지불하여 미용 서비스를 구매하고자 미용실에 방문했다가 예상치 못한 공격(?)을 받아 적잖이 당황했다. 미용사는 둘째 아이가 뱃속에 있어 한참 입덧할 때에도 돌 안된 첫째 아이를 등에 업은 채 시가에서 전 부치고 아픈 시아버지 수발을 다 들었는데, 시동서가 임신했을 때는 명절에 코빼기도 안 비쳐 시가의 모든 어른들에게 미움을 받았단 얘기를 늘어놓았다. 갈수록 젊은 사람들이 자기중심적이라느니 이기적이라느니 하며 당신의 동서를 험담하는데, 미용사는 도대체 나를 뭐라고 생각하는 걸까. 

기분 나쁜 미용을 마치고 나오는데 미용사가 만오천원인 미용비를 만원으로 할인해주었다. 이건 또 뭔가 싶다. 미용비 2만원 지불해도 좋으니 어리고 순하게 생긴 임부라도 사람으로 여겨주는 곳에서 미용하고 싶네.

2018년 2월19일

일러스트레이션 솜솜

깊은 휴식을 취했던 설 연휴가 끝나고 일상으로 돌아오니 회사 사람들이 묻는다. 

자기, 설에 시댁에서 힘들었을 텐데 어째.

대답도 하기 전에 여기저기서 마음에 안 드는 임신한 친지를 욕한다.

우리 동서는 둘째 가졌다고 설에 안 오더라. 나는 임신 2개월 때도 가서 전 부치고 일했는데.

내 조카며느리는 시어른들 다 계시는데 임신해서 힘들다고 시골 집 방에 누워만 있었어.

내가 임신한 몸으로 얼마나 힘들게 시집살이를 당하고 명절노동을 했는지 듣고 싶어하는 눈빛들을 향해, 시부모님이 먼저 우리에게 시가에 오지 말고 집에서만 쉬라고 말씀하셔서 그대로 남편과 둘이서 집에 있었다고 말할 땐 어딘가 통쾌한 기분이 들었다. 임신한 막내 여직원의 험난한 명절나기 포르노를 기대했다면 부끄러운 줄 알아야 한다. 당신들의 ‘되바라진’ 친지에게서 얻지 못한 임신한 며느리의 고통이란 걸 내게 기대했다가 실패한 멋쩍은 얼굴들을 바라보며, 그들이 부디 부끄러워하길 바랬다.

2018년 2월20일

지하철의 임산부 배려석에 앉아 있는 비임산부에게 내가 초기임산부임을 밝히면서 자리 양보를 요청할 때 겪는 괴이한 일들을 성토하면 사람들은 대개 그 상대가 남성일거라 추측한다. 성별 표기를 하지 않았는데 당연히 남성일거라 생각하는 것이 흥미롭다. 경험적으로 남성이 임산부 배려석에 앉아있는 경우가 많았고, 일상에서 남성에게 당하는 무례가 많으니 그렇게 생각하는 것도 무리는 아닐 것 같다. 

그러나 내 지하철 이야기의 주인공은 대부분 중년 여성이다. 나는 중년 여성이 앉아있는 임산부 배려석 앞에만 서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무슨 말이냐 하면 임산부 배려석에는 높은 확률로 중노년 남성이 앉아있지만, 그들 앞에 임산부 배지를 달고 서거나 내가 임산부임을 밝히면 등산 스틱으로, 손으로, 눈초리로, 폭언으로 공격 받을 것 같은 두려움 때문에 남성은 내 성토의 대상조차 될 수 없었다는 이야기이다. 

내게 자리를 내어주는 사람도, 배려 없이 모욕하는 사람도 모두 여성일 수 밖에 없었다. 이걸 여성들 간의 싸움이라 읽는 여성은 없을 거라 생각한다. 값을 치르지 않고 태어날 때부터 지닌 젠더권력에 대한 이야기란 걸 남성 당사자만 모른다.

2018년 2월21일

잠을 잘 자고 싶다. 호르몬 때문에 낮에는 꾸벅꾸벅 졸고, 밤에는 불면증에 잠을 못 잔다. 커진 자궁이 방광을 압박해 자다가 두 번씩 깨서 화장실에 다녀 오고 나면 또 잠이 안 온다. 어젠 속이 너무 안 좋아 탄산수 한 병을 들이키고 잤더니 밤새 다섯 번이나 화장실에 다녀왔다. 자다 깨서 화장실에 계속 가다 보면 내 인간성이 손상되는 기분이 들곤 하는데 이건 누가 보상하고 치료해주나. 수면은 인권이다. 아무도 내가 수면할 권리를 박탈하지 않는데 나를 구제해줄 사람도 시스템도 방법도 없다. 임신이란 이런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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