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신일기 - 18주차

생각하다임신과 출산

임신일기 - 18주차

ND

일러스트레이션: 이민

2018년 4월23일

오랜만에 지하철을 탔다. 한동안 지하철 외 교통수단을 이용하면서 비교적 평안하게 지냈는데 이번 주엔 지하철로 퇴근을 할 것 같다. 여전히 임산부 배려석은 빈 자리 없이 채워져 있다. 한숨 한 번 깊게 쉬고 고민 없이, 지체 없이 물었다. 임산부 배려석에 앉아 있는 사람이 여성이면 혹시 임산부냐고 묻고, 남성이면 제가 임산부인데 좀 앉아도 되겠냐 물었다. 오늘 만난 두 명의 비임산부는 건조하게 묻는 내 말에 대답 없이 기계처럼 일어나 자리를 비켜줬다. 나도 기계처럼 목례를 하고 조용히 앉았다.

매일 지하철을 탈 때는 배려없는 사회와 사람들을 마주하는 게 너무 힘들었는데 이제는 전처럼 상처 받지 않는다. 배려를 간청하거나 혹은 구걸해야만 ‘임산부 배려석’에 ‘배려 받아’ 앉을 수 있다는 건 정의로운 타인에겐 분노할 하나의 사건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것이 일상인 당사자는 모욕감에 무뎌지지 않으면 자신을 지키기가 어렵다. 전처럼 상처 받지 않는다는 건, 상처 받지 않으려 노력한다는 말일 뿐이다.

기계처럼 배려를 요청하고 비켜주면 기계처럼 앉는다. 안 비켜줘도 마음 쓰거나 분노하지 않겠다고 다짐하면서. 지금도 매일 지하철을 이용해야 하는 다른 임산부들은 어떻게 마음을 지키고 있을까. 이런 배려 없는 사회에서 아기 낳는 거, 정말 괜찮을까?

2018년 4월24일

오늘도 지하철을 탔다. 임산부 배려석에 앉아있던 분이 내 배와 임산부 뱃지를 차례로 보더니 자리에 앉으라 눈짓을 한다. 목례를 하고 앉으려는 찰나 내 옆에 서 있던 사람이 비는 자리에 앉으려고 움직이니, 일어나시던 분이 나를 의자로 밀어버렸다. 쿵 소리 나게 엉덩이를 의자에 찧었다.

양보란 뭘까? 임산부 배려석이란 뭘까? 인간이란 뭘까? 엉덩이는 물론 배까지 충격이 강하게 닿았다. 지하철만 타면 평범했던 일상도 다이나믹해진다. 다이나믹 코리아의 다이나믹 임산부.

2018년 4월25일

가슴 아프지만 오늘도 쓰는 지하철 일지. 내가 지하철에서 겪은 일만 모아도 보통의 사람들이 임산부를 어떻게 대하는지, 임산부가 일상에서 어떤 일을 겪는지에 대한 좋은 자료가 될 것 같다는 슬픈 생각이 든다.

여느 날처럼 임산부석 앞에 섰다. 그 자리에 앉아있던 사람은 내 뱃지를 봤지만 모르는 척 계속 스마트폰만 보더라. 고개를 돌려 숨 한번 길게 내쉬고 혹시 임산부냐 물으니 "임산부요? 아닌데요?"하며 계속 스마트폰을 보더라. 다시 불러 제가 임산부인데 좀 앉아도 되겠냐 물으니 어이가 없다는 웃으며 "그러세요..." 했다. 모욕이 익숙해지지 않는다. 나를 지키기가 이렇게나 어렵다.

2018년 4월26일

임신하고서 너무 듣기 싫은 말들. 기록해 뒀다가 아기를 낳고서도 이런 말은 절대 하지 말아야지.

- 아기가 뱃속에 있을 때가 제일 편한 거야. 아기 태어나면 진짜 지옥이야.
- 입덧이 아기가 건강하다는 증거야. 그러니 엄마 힘들어도 좀 참아.
- 아기 낳을 때까지 입덧 하는 사람도 있더라.
- 애가 애를 가졌네.
- 임산부가 커피 마셔도 돼? 초콜릿 먹어도 돼? 그것도 먹어?
- 아직도 배가 하나도 안 나왔네. 아기가 크고 있기는 하나.
- 마른 몸에 배만 볼록 나오니까 외계인 같아.
- 엄마가 마르면 아기가 안 건강해. 억지로라도 먹어. 토하더라도 먹어.
- 너 임신했다고 피해의식이 너무 심해졌어.
- 너만 힘든 거 아니야. 엄마라면 누구나 다 겪는 일이야.
- 임신했다고 쉴 궁리만 하면 일은 누가 해. 그러면 다 임신하지.
- 이제 슬슬 둘째 계획도 해야겠네?
- 딸이야? 다음엔 아들 낳으면 되겠네. 성비가 맞아야지.
- 입덧 더 심하게 하는 사람도 있더라. 너 정도면 살 만하지.
- 이제 살찌겠네. 살찌면 어떤 모습일지 궁금하다.
- 임산부가 그런 말을 하면 어떡해. 아기가 뱃속에서 다 듣는데 좋은 말만 해야지.
- 그러게 임산부가 지하철을 왜 타. 남들도 눈치 볼 뿐더러 육아하려면 어차피 운전해야 해.

한 마디 한 마디 기억해 낼 수록 화가 나네.

입덧이 없어진 후로 커피를 매일 한 잔 마시고 있다. 이것만으로도 내 행복도가 많이 올랐다. 지독했던 입덧이 끝나자마자 왜 그때 내가 그렇게 힘들어했는지 모르겠더라. 이미 고통에서 벗어난 사람이 그 감각을 기억하기란 쉽지 않다. 내가 죽고 싶을 만큼, 아기를 죽이고 싶을 만큼 괴로웠다는 그 감정만 어렴풋하게 남아있다. 그 당시 적었던 내 일기를 보면서 조금씩 기억을 되짚을 뿐이다. 경험했다고 쉽게 말해선 안되는 이유다.

2018년 4월27일

임산부 배려석에 무섭게 생긴 아저씨가 앉아 있어서 조용히 자리를 피해 교통약자 배려석에 앉았다. 평소라면 험한 일 겪을까봐 교통약자 배려석은 쳐다 보지도 않았을텐데, 마침 옆에 교통공사 승무원이 계셔서 용기를 냈다. 아니나다를까 내가 앉으려니 교통약자 배려석에 앉아 계신 온 노인들이 나를 훑어본다. 임산부 배려석에 앉아있는 저 아저씨는 이런 눈빛 안 받았겠지. 노골적으로 나를 위아래로 훑어본다. 나, 당장 일어나라는 걸까?

오늘은 속은 안 좋고 태동은 심한데 운까지 안 좋은 날이다. 지하철을 갈아탔는데 임산부 배려석에 힙합 할 거 같고 덩치 큰 젊은 남성이 앉아있다. 양해를 한 번 구해볼까 하다가 손등을 덮은 문신을 보고 그만뒀다. 지하철을 오래 타다 보면 위기의 상황에서 사람들이 나를 도와줄 거란 기대를 안 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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