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신일기 - 22주차

생각하다임신과 출산임신중단권

임신일기 - 22주차

ND

일러스트레이션: 이민

2018년 5월18일

병원에서는 보통 임신 3개월이 되면 아기의 성별을 넌지시 일러준다. 임신한 지 6개월이나 되어버리니 더 이상 아기 성별을 모르는 척 할 수가 없어 누군가 성별을 물어오면 여자아기라고 이야기하는데, 그럼 항상 듣는 소리가 있다. 

딸이라 아빠가 좋아하겠네.

열댓 번을 들었지만 나는 도대체 이 말이 무슨 뜻인지 모르겠다.

아기의 성별이 모부에게 어떤 기쁨을 준다는 건지, 그렇다면 우리는 도대체 어느 지점에서 기뻐해야 하는지. 그 성별 자체가 기쁨이 될 수 있긴 한가? 성별에 따라 양육에 대한 고민 지점이 다를 순 있는데, 모부 중 “부”만 특정 지어 “아빠가 좋아하겠네” 하는 말은 도대체 무슨 의미일까.

2018년 5월19일

낙태를 처벌하는 형법 조항의 위헌 여부를 가리는 헌법소원의 첫 공개변론이 5일 앞으로 다가왔다. 2018년의 우리나라에는 여전히 ‘부녀가 낙태한 때에는 1년 이하 징역 또는 200만원 이하 벌금에 처한다’라는 규정과 ‘의사, 한의사, 조산사 등이 부녀의 촉탁을 받아 낙태한 때에는 2년 이하 징역에 처한다’는 규정이 담겨있는 형법이 있다. 국가가 주체가 되어 여성의 몸을 탄압하는 비인권적 폭력을 법으로 보장하고 있는 셈이다.

공개변론을 앞두고 한국여성민우회에서 진행하는 낙태죄 폐지 해시태그 운동에 나도 참여했다.

아주 놀랍게도 임신한 여성도 인간이고, 인간은 자기 몸에서 일어나는 일에 대해 스스로 결정할 수 있다.
병원에서 안전하게 임신을 중단할 권리, 여성의 기본권이어야 한다.
내 몸은 나의 것이다.

#낙태죄폐지를_지지하는_임신일기

2018년 5월23일

임신 6개월의 나는 뒤뚱뒤뚱 걷는다. 한걸음 내딛을 때 마다 "아이고, 엉덩이야." 소리가 입에서 절로 나온다. 5년 전 유럽여행 갔을 때 매일 3만보씩 걸으면서 허리와 엉덩이 통증을 호소했었는데 딱 그 때 느낌이다. 지금은 온종일 3천보도 안 걷지만 말이다.

뒷모습은 예전과 크게 다른 게 없어 임산부 같아 뵈지 않나보다. 양쪽 엉덩이를 한 손 씩 부여잡고 “아이고” 소리 내며 한 발 한 발 열심히 내딛고 있으면, 옆에서 보던 누군가는 꼭 배도 별로 안 나오고 살도 안 쪘으면서 저런다고 무심코 말을 던진다. 아기가 뱃속에 생긴 뒤로 지금까지 5kg의 체중이 증가했는데 이게 다 자궁 안에서만 일어난 일이다. 주먹만 했던 자궁이 커지고 커져 골반을 비롯한 뼈의 지형까지 바꿔놓아 작은 움직임에도 몸에 무리가 가는 건 잠깐만 생각해도 알 수 있는 간단한 개념이 아니었던가. 그 정도의 성의도 없으면서 입으로 문장을 구사해 내뱉는 수고는 왜 하는지 모르겠다.

그렇지만 나는 슬프게도 임신 이후 약자가 된 나를 너무 잘 알아서, 무기력하게 무례한 말들에 당하다가 내가 어떤 상황이고 어째서 이렇게 힘들어하는지 차근차근 일러줄 때가 많다. 결국엔 내가 배려를 구해야 할 때가 오기 때문이다. 임신한 내 몸에 대해 이야기하다 보면 내가 이렇게까지 구구절절하게 설명해야 하나 싶어 마음이 차게 식는다.

사람들의 무지는 어째서 당연한 것으로 여겨지는지. 그들의 무례가 어찌나 당당한지. 왜 설명은 모두 내 몫이어야 하는지. 과거와 현재의 임산부들은 도대체 얼마나 수모를 겪어 온 건지. 왜 달라지지 않는지.

2018년 5월25일

제발 아기를 낳으라면서도 아기가 생긴 이후의 삶에는 관심 없는 국가가 괘씸했다. 아기가 태어나면 내 삶은 어떻게 될까? 육아휴직을 하고 집에서 아기를 돌보겠지만 다시 복직을 한대도 그 전과 같은 역량을 발휘하며 내 커리어를 쌓아갈 수 있을까? 아기 낳은 여성이 업무적 기량을 뽐내며 능력 있는 사람으로 인정받는 걸 용납하지 못하는 지금 사회에서 여성에게만 주어지는 “일-가정 양립”이란 짐을 혼자 짊어지면서 버텨낼 수 있을까? 아기를 낳기로 결정했지만 잿빛 미래까지 내 선택은 아니었고, 아기가 뱃속에 생기면서 정신과 육체 역시 내 미래만큼 망가졌다.

낙태죄 폐지에 대한 헌법소원이 이뤄지자 헌법재판소가 낙태죄 관련 형법 269조1항 등에 대한 공개변론을 진행했다. 어제 퇴근길, 하루를 별탈 없이 마쳤다고 안도하며 느긋하게 포털사이트 메인의 법무부 변론 요지서를 읽고는 상심에서 벗어나기 힘들었다. 올해가 가기 전 임신 전기간 동안 근무 단축이 가능하도록 법이 개정된다는 이야길 듣고 임신기 단축근무 확대가 발표됐는지 법제처 페이지를 매일 확인하는 내 작은 세계를 견딜 수가 없었다. 

법무부는 낙태죄 폐지를 요구하는 여성에 대해 “성교는 하되 그에 따른 결과인 임신과 출산은 원하지 않는” 사람으로 폄훼하며 태아의 생명권과 여성의 자기결정권이 마치 대치되는 양 그 둘간의 우위를 논하려 했다. 국가에게 임신한 ‘나'는 삶의 주체이자 서사를 가지는 인격체라기보단 법으로 허용된 관계 내에서 성교를 하고 아기를 낳는 국가의 충직한 재생산 도구였을 뿐이다.

이 모욕감에 손이 떨린다. 대한민국 법무부는 임신하거나 임신하지 않은, 아기를 낳았거나 낳지 않은 이 나라의 모든 여성을 모욕했다. 실은, 태어나는 모든 생명을 모욕한 것이다.

나를 아는 어떤 사람들은 뱃속에 아기를 가진 여자가 그렇게 모든 사안에 민감하게 반응하고 성질을 부려대면 어떡하냐고 나무란다. 본디 어떤 사람이든 임신을 했으면 이전의 삶과 결별하고 뱃속의 아기를 위해 온순해지려고 노력을 해야지 태에서 부정적 감정부터 배울까 걱정이란다. 태아가 여아라는 게 밝혀지면서 이런 폭언이 더 심해졌다. 그 말이 맞다면 아기는 말 그대로 모태 페미니스트다. 아주 잘 크고 있다. 걱정들 마시라.

가만 생각하면 좀 이상하다. 뱃속의 아기는 그렇게나 걱정하는 사람들이 임신한 여성의 건강과 근무환경에는 어쩜 이리 무관심할까. 그저 난자와 정자가 결합한 세포덩어리 불과한 배아에 인격까지 부여해가며 그 생명의 소중함을 주장해대면서 진짜 인생이라는 걸 살아내고 있는 여성의 존재는 아주 쉽게 무시해버린 대한민국 법무부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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