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보건사회연구소가 ‘출산력’ 조사를 한다고 했을 때, 반발이 거셌다. 기본적으로는 여성의 의지와 상관없이 생리만 하면 ‘임신이 가능한 신체’로 대상화하겠다는 발상이 역겹고, 국가가 여성의 몸을 관리하고 통제하겠다는 헛된 욕망이 진부했다. 그리고 그들은 부재중인 집에 쪽지를 붙였다.
(출산력 조사) 대상자이십니다. 연락 주세요.
이 집에 15~49세 기혼 여성, 또는 20~44세 미혼 여성이 산다는 표시를 한 것이다. 1인가구가 많이 사는 원룸촌이나 오피스텔에 이런 쪽지가 붙어 있다면 20~44세 미혼 여성이라고 표시해 준 것이나 마찬가지다.
여성에게만 부과된 세금 같은 주거비용, 안전
저성장 불경기 여파인지 성인들의 독립이 점점 늦어지는 한국에서 오로지 여성만이 독립을 결심할 때 듣는 말이 있다.
위험하지 않겠어?
오로지 여성만이 자취방을 알아볼 때 파출소와의 거리를 계산한다. 오로지 여성만이 현관에 남자 신발을 갖다 놓으라는 둥, 군복을 걸어 놓으라는 둥 집에 ‘남자가 있는 척’하라는 조언을 듣는다. 오로지 여성만이 이미 결제가 끝난 택배나 음식 배달원들에게 문 앞에 놓고 가라는 부탁을 한다. 오로지 여성만이 범죄자들이 초인종 옆에 마커로 ‘여자 혼자 사는 집’이라는 표시를 해 놓는다는 괴담의 피해자가 된다. 출산력 조사 과정에서 문 앞에 쪽지를 붙인 행위가 유난히 ‘바이럴’을 타고 즉각적인 비판을 받은 것은 우연이 아니다. 익숙한 괴담과 정확히 같은 행위였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곧바로 그 의미를 눈치챈 것이다. 우리는 여자 혼자 사는 집이 노출되는 게 얼마나 위험한지 그만큼 잘 알고 있다.
이 시리즈에서 다른 것보다 먼저 국가에서 정책적으로 공급하는 임대주택에 대해 하나씩 소개하려고 했던 이유도 여기에 있다. 안전이 보장되는 저렴한 집이 많지 않기 때문이다. 경험상 돈을 모으는 데 있어 가장 핵심적인 요소는 주거 안정이었다. 그리고 여성은 오로지 여성이라는 이유로 주거 결정에 있어 안전에 그야말로 ‘목숨’을 걸게 된다. 주거 복지 정책으로 공급되는 임대주택은 같은 지역의 같은 가격대 주택에 비해 치안이 훨씬 좋고 관리 주체가 분명하다.
천왕여성안심주택 시범 사업
국가도 이를 알고 있다. 그래서 2014년 서울주택도시공사(SH)는 구로구 천왕동에 ‘천왕여성안심주택’을 만들었다. 총 96세대를 전부 여성 1인가구에게만 공급했다. 공급 1순위는 도시근로자 월평균소득의 50% 이하인 여성, 2순위는 도시근로자 월평균소득의 50% 초과 70% 이하를 버는 여성이고, 이 조건에 해당하는 동시에 중소기업에 6개월 이상 재직 중인 여성은 우선공급 대상자였다.
방은 전용면적 14제곱미터(약 4.2평) 원룸이다. 주방과 베란다가 있고, 화장실이 있다. 지하 1층에 공동세탁실이 있다. 천왕여성안심주택은 처음부터 안전을 위주로 설계했다. 불필요한 외부인의 출입을 줄이기 위해 출입구 바로 옆에 무인 택배 시스템을 설치했다. 배달원이 건물 안에 들어오지 않고도 택배를 전달할 수 있다. 전기, 가스 검침도 주택 외부에서 처리하도록 되어 있다. 검침원을 사칭한 범죄 피해를 애초에 걱정할 필요가 없다. 가격은 보증금 736만원, 월세 12만 5100원.
천왕여성안심주택 입주공고문에는 이런 문장이 있다.
본 건물은 서울시 시책에 따라 1인 여성 전용 시범주택으로 남성의 출입을 제한할 수 있음.
나는 여성 1인가구가 살기에 이보다 더 안심되는 조건이 붙어 있는 부동산을 본 적이 없다.
천왕여성안심주택은 2015년에 입주가 끝났다. 입주 조건에 해당하는 한 2년 단위로 계약을 연장할 수 있어, 누군가 결혼이나 더 큰 집에 이사하느라 공가가 생기지 않는다면 입주할 수 없다. 좋은 소식은, 천왕여성안심주택은 시범사업이었고, 국가가 여성안심주택 사업을 확대하기로 했다는 점이다.
2018 여성안심주택 사업
2017년 말 국회를 통과한 2018년도 정부 예산안에 여성안심주택 예산이 포함되어 있다. 올해부터 한국토지주택공사(LH)에서 시범사업으로 250가구를 공급할 예정이다. 정부가 역세권 같은 교통이 편리한 지역의 원룸, 오피스텔을 매입해 저소득 1인 여성가구 전용 임대주택으로 공급한다는 계획이다. 2017년 10월에는 서울 송파구 잠실동에 여성안심주택 40가구 건설이 추진된다는 기사가 나오기도 했다.
여성안심주택 사업은 문재인 정부가 야심차게 내놓은 ‘국민참여예산’ 6개 사업 중 하나로, 주택 공급 예산이 포함되어 있다 보니 전체 국민참여예산 422억원 가운데 84%(356억)를 차지하는 대규모 사업이다. 한 40대 시민이 제안한 사업이 실제로 채택된 것이다. 한겨레가 보도한 해당 시민의 제안서 내용은 이렇다.
중장년층 1인 가구가 늘어나는데 저소득층이 많아요 특히 여성은 월급이 적어서 주거비 부담이 크잖아요. 새로 짓기는 어려우니까 비어 있는 원룸, 오피스텔을 활용하면 어떨까 싶었죠.
재미있는 건 이 사업에 대한 남자들의 반응이다. 남성들은 잠실로 대표되는 서울 주요 역세권 지역에 저렴한 임대주택이 들어서는데 자신이 지원 대상 자격조차 되지 않는다는 걸 견딜 수 없었다. 그래서 청와대에 국민청원도 하고, 인터넷에 여성가족부 탓도 하고, 댓글로 “돈 많은 동거남과 함께하는 러브하우스가 되겠군요~” 하고 비꼬며 허수아비를 때리기도 한다(천왕여성안심주택 시범사업 사례로 알 수 있듯이 여성 1인가구 전용 임대주택에는 남성 동거인이 입주할 수 없다). 특히 마지막 댓글은 인상적이다. 여성을 위한 사업이 결국 자기보다 돈 많은 남성을 위한 사업이 될 거라는 상상을 하고 있다. 여성은 질투의 대상조차 아니다!
그들이 물고 늘어지는 건 하나다. 같은 저소득층인데 왜 여성만 가능하냐는 거다. 대한민국에서 여성의 삶에만 부과된 안전 비용을 무시하기 때문에 할 수 있는 말이다. 같은 저소득층이라도 여성이 더 위험하고, 안전한 주거환경이 절실하다. 그래서 여성만 주거 복지 대상이 되는 일이 가능하다. 억울하면 성범죄자들과 여성 대상 범죄자들을 빨리 빨리 소탕해서 혼자 사는 여자들이 남자 있는 척 안 해도 되는 대한민국을 만들자. 그 때는 여성 전용 임대주택이 어색해 보이겠지. 그날까진 여성안심주택을 많이 보급해야 한다. 그리고, 만약 그런 날이 온대도, 전 세계가 다 아는 통계적인 사실이지만, 평균적으로 여성이 남성보다 더 저소득이다.
2018년도 예산안이 반영된 여성안심주택 사업은 아직 본격적으로 공고된 바가 없다. 2018년도 연말까지 LH 홈페이지를 예의주시하거나, 청약알리미를 등록해서 관련 공고를 실시간으로 안내 받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