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바이벌 생활경제 15. 쉬어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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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바이벌 생활경제 15. 쉬어가기

신한슬

일러스트레이션: 이민

어른은 다 아는 줄 알았지

어렸을 때, 나는 돈에 대해 관심이 별로 없었다. 그냥 누구든지 자라서 어른이 되면, 엄마나 아빠처럼, 또 주변의 많은 어른들처럼, 학교에 가듯이 자연스럽게 돈을 벌게 되는 줄 알았다. 나의 양육자들은 내 앞에서 돈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당연하다. 아직 경제능력이 없는 아이가 돈 걱정을 하게 만들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그런데 정신을 차리고 보니, 놀랍게도 내가 벌써 ‘어른’이 된 게 아닌가! 이러쿵저러쿵 굴러 다니다 보니 돈도 벌게 되고, 독립 생활도 하게 됐다. 부모에게 첫 보증금 천만원을 빌리고, 매달 월세를 내고, 공과금을 내고, 그 와중에 나름대로 조금씩 저축도 하고, 그러다 어느 정도 모이면 해외여행을 가서 왕창 쓰기도 하고. 여전히 돈에 대한 관심은 별로 없었다.

생각이 바뀌기 시작한 건, 친구들과 미래에 대해 얘기하면서부터다.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든, 결혼만 하든, 비혼을 결정하든, 자신이 그리는 미래의 모습이 어떻든 간에, 그 때에 평화롭기 위해 가장 필요한 것은 결국 돈이다. 게다가 내 또래 친구들은 모두 양육자들이 슬슬 은퇴하는 시점. 그들의 노후에 돌봄과 비용이 필요할 때에도 우리에게 필요한 건 결국 돈이다.

혼자서 찾아 배우는 ABC

물론 이게 다 개인이 책임져야만 할 일은 아니다. 학자들의 논쟁 속에만 존재하는 듯한 ‘이상적이고 강력한 복지국가’라면 미래에 대한 걱정도 조금은 덜 수 있을지도 모른다. 강력하지 않아도 좋으니 약간의 도움이라도 기대할 수 있다면. 이에 관해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크게 두 가지가 있는 것 같다. 하나는 증세와 복지 확대를 지지하는 정치적 참여를 통해 국가적 차원의 노후 지원이 좀 더 확대되도록 노력하는 장기적인 일이다. 다른 하나는 현재 존재하는 제도인 국민연금에 꾸준히 돈을 넣는 것이다.

어쨌든 철학이나 정치로 당장 돌파되지 않는 현실은 나의 노후는 약 3~40년 뒤로 정해져 있고, 살아가기 위해서는 돈이 필요하며, 국민연금만으로는 그걸 다 마련할 수 없다는 것이다. 나는 너무 막막하고 자신이 없을 때에는 그냥 노인이 되지 않고 일찍 죽고 싶다는 대책 없는 생각도 자주 했다. 이것은 노인 혐오가 아니라 스스로 그 때까지 자기 자신을 책임질 수 없을 것 같다는 자기 신뢰 부족이다. 그런데 알고 보니 안락사를 하려고 해도 돈이 필요하다고 한다. 그것도 많이.

일러스트레이션 이민

그렇게 혼자 막막해하기보다, 말도 안되는 스위스 안락사에 대한 망상으로 도피하기보다, 한 발자국이라도 돈에 대해 같이 공부해보자는 생각으로 <서바이벌 생활경제> 연재를 시작했다. 당장 부자가 되거나 노후가 대비되는 정보를 알아내겠다는 건 아니었다. 당장 청약통장도 없고, 체크카드 한 개에 통장 하나만 가지고 살아온 내가 어떻게 그런 고급 정보를 알겠는가? 그런 사람들끼리 부모도 대학도 가르쳐주지 않았던 경제생활의 ABC부터 같이 익혀보자는 취지로 시작했다. 당장 나에게, 아니면 내 친구에게라도 도움이 될 가장 최신의 정보를 모아서 정리해 두고 싶었다.

시작이 반이다

물론 이런 정보는 시시각각 변한다. 은행이 내놓는 적금의 이자도, 체크카드와 신용카드의 혜택도, 정부의 주거복지 정책도 매년 다르다. 당장 <서바이벌 생활경제>에서 통신비를 할인 받기 좋다고 추천했던 신용카드는 신규 발매가 중단됐다(왜 좋은 건 빨리 사라져버리는 걸까?).

중요한 건 시작이다. 어쨌든 <서바이벌 생활경제>를 보면서 나에게 딱 맞는 신용카드 사용 방법을 고민하고, 최대한 혜택을 얻을 수 있는 체크카드를 골라 보고, 그에 맞게 통장을 쪼개서 용도별로 관리해 저축을 열심히 늘려본 독자라면, 앞으로도 알아서 최신 정보 업데이트가 가능할 것이다. 이런 것들은 한 번 시스템을 갖춰 놓으면 된다.

너무 어렵고 그림의 떡만 같은 공공임대주택들도 일단 무조건 청약을 넣어 보면 대기자 명단에라도 들어간다. 지난 2월23일, <서바이벌 생활경제> 독자들과 함께 했던 <집을 찾는 훈련: 공공임대주택 편> 세미나에서 강사 임경지 서울시 청년정책위원회 공동위원장이 가장 자주 했던 말이다. “일단 한 번 해 보세요.” 자고 일어나서 SNS 보듯이, 주택공사 앱을 열어서 어떤 공고가 떴는지 보고, 내가 사는 지역이다 싶으면 넣는 거다.

물론 새로운 습관을 들이는 건 참 어렵다. 나는 최근 SNS 인증샷 미션을 완료하면 50원, 100원씩 보상을 주는 작은 ‘앱테크’를 시작해봤는데, 딱 2주 동안 열심히 하다가 바쁜 생활 속에 또 금방 잊어버리고 말았다. 이렇게 게을러서 도대체 목돈을 모아도 제대로 굴릴 수 있을지 불안하기만 한 나날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소한의 ‘현명함’을 갖추는 것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보다는 낫다. 누구나 허리띠를 졸라 매고 ‘한 달에 10만원으로 생활하기’ 같은 극단적인 생활을 할 수는 없다. 그런 건 장기적으로 병원비가 더 든다. 대신 어떤 사람은 취미에 돈을 5만원 쓰면 그 때마다 5만원씩 ‘매칭 적금’을 넣는다. 나 역시 올해 들어 처음으로 취미에 드는 돈에 ‘월 상한선’을 정했다. 나에게 ‘적당한’ 소비가 어느 정도인지, 그 경계선을 가늠해보기 시작한 것이다.

<서바이벌 생활경제>는 재정비를 위해 잠시 쉬어 가고자 한다. 그 동안 ‘경알못’들이여, 함께 <서바이벌 생활경제>에서 제안했던 것들 중 아주 작은 것이라도 실천해보자. 여전히 경알못을 벗어났다기엔 부족함이 많지만, 아직 재테크의 어려운 단어나 문법은 몰라도, 이제 ABC 정도는 안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영어를 처음 배울 때 사용했던 줄이 네 개 그어진 알파벳 노트가 떠오른다. 영어를 처음 배울 때처럼, 노트를 꽉 채워서 ABC와 abc를 열심히 쓰다 보면, 어느새 노트가 없어도 무난하게 알파벳을 쓸 수 있게 될 것이고, 단어와 문법을 공부하는 건 거기서부터 시작일 것이다. 다시 돌아올 때까지 나도 ABC를 연습하는 한 편 단어와 문법을 좀 더 공부해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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