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번째 에피소드(서바이벌 게임 - 길모어 걸스)에서 잠깐 스치고 지나왔던 지점으로 되돌아가 본다.
2014년 6월의 일이다.
누군들 그 시절이 편했겠냐마는, 나는 잠을 못 잤다. 잠을 자는 것이 삶에 꼭 필요한 휴식이며 밤이면 잠자리에 가만히 누워서 몸과 마음을 진정시킬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조금도 들지 않았다. 새벽까지 뉴스 사이트를 새로고침하다가 두어 시간 눈을 붙인 뒤 출근을 했고, 점심시간에는 밥을 먹지 않고 휴게실에 숨어 있었다.
원양어선을 타던 큰아버지가 사고를 당한 것은 내가 아홉 살 때였다. 친척들은 나머지 아들, 즉 우리 집 거실에 대책반 비슷한 것을 꾸렸다. 놀랍게도 가장 가까운 유가족인 큰어머니와 내 또래의 사촌들은 큰아버지의 사고와 관련해 아무런 발언권을 갖고있지 않았다. 큰 소리로 울지도 못했다. 가장 목소리가 컸던 것은 고모들이었다. 고모들은 누가 현장에 가봐야 하고 회사 측과 이렇게 저렇게 싸워야 하며 보상금을 받으면 어떻게 나눠야 한다고 큰 소리로 떠들었다. 가부장제는 큰아버지의 젊은 아내와 그의 어린 아이들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었다. 90년대 초반에는 ‘아이들이 뉴스를 못 보게 해야 한다’거나 ‘아이들에게도 적당한 설명을 해 줘야 한다’는 생각을 하는 어른들이 아무도 없기도 했다.
어쩌다가 어른들이 물러가고 조용해진 거실에서 혼자 TV를 보던 순간이 있었다.
너른 바다에 배 한 척이 떠 있는데 그게 마치 멋진 배경이라도 된다는 듯 바다 위로 실시간으로 업데이트된 사망자와 실종자 명단이 <스타 워즈>의 오프닝처럼 흐르고 있었다. 큰아버지의 이름은 실종자 명단에 포함되어 있었다. 사망자는 죽은 사람이라는 뜻, 실종자는 잃어버린 사람이라는 뜻, 놀이공원에서 가족을 잃어버린 아이들처럼. 나는 그렇게 생각하고 큰 소리로 주방에 있던 엄마에게 “저거 봐! 큰아빠는 죽은 게 아니잖아? 실종자잖아? 그러면 찾을 수 있지?”하고 외쳐 물었다. 과거로 돌아갈 수 있다면 그때의 거실로 가서 아홉 살짜리 내 뒤통수를 후려치며 말해주고 싶다. ‘어린 게 눈치가 없어! 저건 시신을 인양하지 못했다는 뜻이야.’
아버지는 큰아버지의 죽음, 즉 자신의 형의 죽음을 계기로 급격히 나쁜 선택들을 하기 시작했다. 안정적인 직장을 그만두었고, 옮겨간 직장의 사장으로부터 빠르게 버림받았고, 이후 계속해서 실직자에 가까운 인생을 살았다. 집에 돈을 가져다주지 못한다는 죄책감과 굳이 내세우지 않았더라면 좋았을 자존심의 합작으로 아버지는 카드빚을 졌다. 액수가 감당할 수 없게 불어나면 가족 앞에 고지서를 들이밀었다. 뭘 해보겠다고 모아둔 목돈들이 때마다 깨끗하게 사라졌다.
사고를 쳐도 누군가 수습을 해준다는 것을 학습한 아버지의 기행은 이후 습관이 되었다. 내가 직장을 얻자마자 아버지는 내게 신용대출을 받아 자기 카드빚을 갚아달라며 천오백만 원짜리 고지서를 내밀었다. 한때 유행하던 서바이벌 프로그램의 최종 상금이 1억원이라는 것을 알고는 저기 나가서 우승해 상금을 타오겠다며 지역 예선에 나가기 위해 전국 팔도 유람을 하기도 했다. 인기 소설가의 신작이 베스트셀러에 등극해 몇만 부를 팔았다는 뉴스를 보면 책을 써서 큰돈을 벌겠다며 컴퓨터 앞에 구부정하게 앉았다. 그리고 짬이 나면 나를 때렸다.
사람이 누군가의 부모이기만 하면 최후의 순간에도 모욕당해서는 안 되는 숭고한 존재로 여겨지는 문화에서 저런 남자를 아버지로 모시고 사는 것보다야 차라리 짐을 싸들고 거리로 나오는 게 쉬웠다. 딸이 공부를 곧잘 하자 ‘그깟 영어 수학 좀 배웠다고 부모를 무시하느냐’며 국그릇을 뒤집어엎는 남자라면 두말할 나위가 없다. 내 아버지 같은 남자도 누군가에게는 연민의 대상일는지 모르겠다. 그러나 그 누군가에 피해자인 나는 포함 안 된다. 저런 남자들이 주인공 되는 소설을 써 주는 한국 문학계가 망할까봐 전전긍긍하는 것보다야 영어공부를 하거나 신경망 번역 개발에 참여하는 게 낫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