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a pro 2. 이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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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m a pro 2. 이아리

이그리트

일러스트레이션: 이민

여성 디자이너는 많다. 그런데 알고 있는 여성 디자이너는 없다. 잘 나가는 여성 디자이너도 드물다. 커리어를 꾸준히 쌓아가고 더 ‘잘나질’ 기회는 수많은 여성 디자이너를 제치고 남성 디자이너에게 먼저 주어진다. 한두 번이면 그건 상사의 편애다. 쌓이고 쌓여 그게 암묵적인 법칙이 되면, 그건 고루하고 공고한 성차별이다.

그 벽에 가로막혀 우리는 알고 있는, 잘 나가는, 잘 하는 여성 디자이너를 모른다. 그래서 <핀치>는 알 만한, 잘 나갈 만한, 그리고, 잘 하고 있는 현업 여성 디자이너를 만나기로 했다. <I’m a pro>는 그렇게 자신의 영역을 구축해 나가고 있는 여성 프로 디자이너를 소개한다. 

망원역 근처에 거미줄처럼 복잡하게 뻗은 골목엔 ‘나만 알고 싶은 가게’가 몇 군데 있다. 오래오래 있었으면 좋겠지만, 너무 유명해져서 입소문을 타면 괜히 속상한 그런 곳들. 좋아하는 사람과 함께 가서 차를 마시고 식사를 하고 싶지만 <수요미식회>에는 나오지 않았으면 하고 바라게 되는 곳들. 그 중 하나가 디자이너 이아리를 만난 미드나잇 카페 pers다.

여기 테이블 서랍을 열어보시면, 호텔 어메니티처럼 카페 로고가 찍힌 메모지도 있어요.

그는 카페 pers의 브랜드 아이덴티티와 카페에 배치된 메모지와 문진 등 소품을 디자인했다. 디자인의 결과물엔 클라이언트의 요구와 취향이 당연히 들어가 있지만, 그만큼 당연하게 디자이너의 취향과 감성 역시 들어갈 수 밖에 없다. 그래서 그가 디자인한 브랜드가 살아 숨쉬고 있는 공간에서 만난 디자이너 이아리는 무척 편안해 보였다.

Q. 당신은?

브랜드 아이덴티티와 인쇄 전반을 다루는 그래픽 디자이너. 얼마 전까지는 웹디자인도 했지만, 최근엔 내가 더 잘 할 수 있고 좋아하는 일로 방향을 좁히고 있다. 그게 전문성을 쌓아가는 방법인 것 같기도 하고.

Q. 당신은 어떤 디자인을 하기를 좋아하는 디자이너인가?

직접적이지 않은 디자인. 목소리가 크지 않은 디자인. 처음 봤을 때 왜 이렇게 되었는지 형태적으로 곧바로 닿지 않는 것들. 그래서 브랜딩이라는 일에 매력을 느낀다. 이를테면 어떤 로고가 있다면, 그 로고 타입에 담긴 의미가 무엇인지 궁금해하고, 한 번 더 살펴보고, 그 의미를 파악했을 때 오는 함축적인 즐거움이 있지 않나. 이처럼 의미가 깊이 담긴 디자인을 좋아한다.

Q. 왜 디자이너가 되었는가?

진로를 한 번도 고민해 본 적이 없다. 손으로 무언가 하는 걸 좋아했고, 그래서 청소년기에는 인테리어 디자이너가 되고 싶었고. 디자인을 하고 싶다는 생각을 어렸을 대부터 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시각디자인 학교를 들어갔다. 하지만 그래픽 디자이너가 아니라 광고 대행사의 아트 디렉터로 커리어를 시작했다. 그건 전적으로 친한 친구가 광고홍보학과를 다녔기 때문이다. 5년 동안 아트 디렉터로 일했다. 아트 디렉터는 실무를 처음부터 끝까지 진행하기보단 마지막의 마지막에 관여하는 일에 가깝다. 그러다 보니 처음부터 끝까지 내가 했다고 말할 수 있는 프로젝트가 없었다. 

그리고, 광고 대행사의 업무 프로세스가 합리적이지 못한 면도 있고. 경쟁 PT를 할 때 일주일만에 시안을 뽑고, 프로덕션을 뽑고, 그걸 영상으로 만들고. 그런 식으로 폭력적인 일정이 부지기수다. 내가 너무 납작해지고 내 일상이 사라지는 것 같았다. 퇴사하고 6개월 정도 프리랜서 생활을 거쳐 2013년 11월 경에 스튜디오 BATON을 열었다.

처음을 정하는 일

Q. 해 왔던 작업 중 기억에 남는 작업을 소개해 달라.

2014년 즈음에 <허핑턴포스트코리아>(아래 <허포코>)가 창간됐다. <허포코>의 브랜드 구축 작업을 BB&TT에서 했는데 거기서 내게 의뢰를 해 디자인 실무를 담당했다. 

광고 일을 할 때는 하나의 브랜드가 있으면, 그 브랜드가 어떤 성격을 가지고 어떤 식으로 이야기를 할 건지 전부 결정이 되어 있고 거기서 나는 가장 끝단의 작업을 하게 된다. 이를테면 인쇄 광고에서 어떤 색을 쓸지를 결정하는 일. 하지만 브랜딩은 브랜드가 어떤 이름을 가져야 하는지, 어떤 성격을 지니는지, 어떤 철학을 가지고 있는지 처음부터 설계해 나가는 작업이다. <허포코>의 브랜딩이 나에게 첫 브랜딩 작업이었고, 브랜드에게 성격을 부여하는 게 무척 어려우면서도 재밌던 기억이 있다. 그래서 그 때부터 브랜딩 작업을 주로 해야겠다고 생각하게 됐다.

pers의 브랜딩은 나의 애정도를 1에서 100까지의 척도로 표현한다면 150의 애정을 담은 작업이다. 일단 클라이언트의 성향과 취향을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 취향의 결이 나와 비슷했다. 이 공간이 어떤 공간이었으면 좋겠다는 상상을 공유할 수 있었다. 이 곳은 조용하고, 차분하고, 심야에 밥과 술과 커피를 혼자 마실 수 있는 곳이다. 혼자만 가질 수 있는 여유를 누릴 수 있는 공간이다. 그 분위기를 디자인에 반영했다. 카페의 로고에 음악 기호를 녹였다. 그리고 그 기호가 하나의 선으로 연결이 돼 있다. 혼자 있으면서도 연결돼 있는 공간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뜻을 담았다.

Q. 커리어를 지속하는데 도움이 되었던 것들, 그리고 방해가 되었던 것을 꼽는다면.

‘아는 사람’. 도움이자 방해인 것 같다. (웃음) 지인의 의뢰일 때 가끔은 일정과 견적을 고려하지 않고, 심지어 공짜로 좀 해줬으면 좋겠다는 뉘앙스를 풍기면서 연락을 하는 경우가 있다. 내가 그 일을 하면 클라이언트의 일을 하고 있는 시간을 그만큼 비워야 하는데도. ‘살짝만 네가 만져주면 돼.’ 라고 하면서. 그 사람은 그러면 내가 하는 일을 얕고 가볍고 쉬운 일이라고 생각하는 셈이지. 잘 몰라서 하는 말이겠지만, 그런 얘기를 들을 때면 섭섭하다. 선의로 해 주는 일은 대부분 공짜고, 공짜로 일을 해주면 오히려 공짜 취급을 받는 것 같기도 하다. 그래서 요즘은 거절하는 법을 배우는 중이다.

물론 도움이 됐던 것도 그 ‘아는 사람’들이다. <허포코>를 브랜딩했던 2인조 중 한 분이 pers의 사장이다. 브랜딩 일을 계속 하셨던 분이고. 일이든 일상이든 공유하는 부분이 많고, 일하면서 공감을 주고받을 때가 많다. 본인이 가지고 있는 섬세한 취향을 일관적으로 지속하는 모습에서 브랜딩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한 영감을 얻곤 한다.

Q. 디자이너가 된 지 몇 년차인가?

광고대행사에서는 5년, 스튜디오 바톤을 한 지 5년이니 이제 10년차다.

Q. 디자이너로서 자신의 장점을 꼽는다면?

디자이너로서도, 사람으로서도 말할 수 있는 장점인데, 나는 감탄을 잘 한다. 금방 무언가에 빠져들고 열광한다. 업무적으로 얘기하자면, 흥미로운 일이 들어올 때 몰입도가 좋아서 집중을 잘 하게 되고.

환상은 없다

Q. 흔히들 디자이너는 번쩍이는 영감이 중요한 직업이라고들 생각한다.

광고대행사를 다닐 때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지만, 어디서 영감을 얻느냐는 질문을 받을 때가 있다. 아트 디렉터든 디자이너든 엄청 아이디어 뱅크 같고, 기발한 발상을 해내야만 할 것 같은 인상이 있다. 하지만 실제 작업을 이뤄내는 것을 영감이라고 말할 수 있을 지는 잘 모르겠다. 매일매일이 누적되는 게 더 크다. 일상에서 힌트를 얻고. 환상은 없다. 성실하게 꾸준히 책상 앞에 앉아 있는 시간이 있어야 하고, 떠올린 아이디어를 실제로 작업을 하는 시간도 필요하다. 발상이야 한강변에서 자전거를 타다가도 얻을 수 있는 거지만 구현하는 단계에 다다르면 디자이너도 결국 노동자다. 특별할 게 없는 직업이다.

Q. 작업비 얘기도 짚고 넘어가야 할 필요가 있다. 일을 맡기는 입장에서도, 일을 받는 입장에서도 늘 까다로운 사안인데 적절한 작업비를 산출할 때 고려해야 할 기준으로 무엇을 꼽을 수 있을까?

일단 연차부터. 내가 1년차 때 할 수 있는 업무의 역량과 2년차 때 할 수 있는 업무의 역량이 다르니까. 그리고 정해진 일정 안에서 내가 쏟아부어야 하는 일의 강도가 어느 정도인지도 고려해야 한다. 같은 마감 일정이어도 그 안에 해 내야 하는 과제의 갯수가 많은 때가 있고, 적은 때가 있기 마련이니까. 일정이 매우 빠듯하면 급행비라고 생각하고 작업비를 더 받을 때도 있다. 그만큼의 노동 시간이 추가되는 셈이라서. 그렇게 견적을 낸 다음에, 내 기분을 거스르지 않는 범위 안에서 클라이언트와 조정을 거친다. 예산의 규모와 일을 맡기는 회사의 규모도 고려한다. 거기에 들어온 일에 내가 매력을 느끼고 있는지도 생각해 본다.

Q. 올해에 계획하고 있는 프로젝트가 있는지?

<여가여배>라는 비정기 원데이 클래스를 친구와 운영하고 있다. 여자가 가르치고 여자가 배운다는 말의 줄임말이다. 지난 7월에 주짓수로 첫 클래스를 열었고, 9월 1일에 농구 클래스를 열었다. 여자가 주체가 되어 운동을 가르치고 배우고 그 경험을 공유하자는 취지로 프로젝트를 시작했는데 이 프로젝트에 갤러리팩토리에서 관심을 보여 오는 10일부터 운동하는 여자에 대한 전시도 열게 됐다. 굿즈도 판매할 예정이다. <여가여배>의 다음 클래스가 언제 열릴 수 있을 지는 모르겠지만. 이 프로젝트를 같이 하는 친구도 나도 각자의 일이 있는데, <여가여배>를 하고 난 다음엔 너무 기쁘고 즐겁고 난리가 나서 이러다 흥분사 할 것 같더라고. (웃음) 에너지 소모가 꽤 극적이다. 그래서 그 에너지를 감당할 수 있을 만큼의 텀이 필요한 것 같다.

Q. 언젠가 꼭 해보고 싶은, 버킷리스트 같은 작업이 있다면?

손에 잡히지 않는 아름다운 것들에 대한 작업. 꽃, 음악, 술. 예전에 시, 차, 향을 엮어서 시집과 향초와 차를 판매하는 사이드테이블이라는 브랜드 런칭을 작업한 적이 있다. 그 때 일을 맡겨주신 분이 개인이기도 했고, 예산도 매우 적었지만 너무나 나의 카테고리에 속하는 일이었기 때문에 브랜딩을 했다. 혹시 이 인터뷰를 읽고 있을 클라이언트 중 꽃이나 음악이나 술에 관한 브랜드를 맡길 일이 있다면 꼭 연락 주세요. (웃음)

Q. 디자인 업계에서 나를 가장 힘들게 하는 관습 혹은 고정관념을 한 가지 꼽는다면?

연대감. 내가 디자이너로 커리어를 시작한 게 아니기 때문에 주변에 인력 풀이 적다. 학교 동기들이 있기는 하지만 지금까지 여성 디자이너로 남아 있는 사람이 거의 없다. 그래서 FDSC(참고 기사: 여성 디자이너, 우린 여기에 있다)에 함께하게 됐다. 이제 FDSC가 시작되고 한 세 달 정도 된 것 같은데, 매우 좋다. 얼굴도 모르고 이름도 모르지만 여성 디자이너들이 한 데 모여있다는 존재감 자체만으로도 큰 위안이 된다. 최근엔 FDSC 운영진에도 합류해서 SNS를 담당하고 있다. 

저는 선동에 재능이 있나봐요.

<여가여배>의 농구 클래스를 위해 디자이너 이아리가 만든 포스터는 온통 빨갛다. 뽑아놓고 나니까 스스로 ‘선동’이 되더라니까요? 힘이 나고. 이아리가 말한다. 그렇게 긍정적으로, 강하게 이야기를 이어 나가고 싶어요.

그의 말이 맞다. 때로는 얼굴도 모르고 이름도 모르는 여성 동료가 어딘가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큰 위안이 된다. 하지만, 얼굴도 알고 이름도 아는 여성 동료가 늘어나면 그건 더 큰 위안이고 짜릿한 ‘선동’이 될 것이다. <I’m a pro>도, 매일 FDSC의 소셜 미디어에 동료 여성 디자이너를 소개하는 이아리도, 우리는 바로 그 ‘선동’을 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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