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겐 취미라 하기엔 뭐한 수집벽이 하나 있다. 바로 여행 다니는 도시에서 제공하는 각종 무료 지도를 모으는 것인데, 때로는 비싼 값에 파는 두툼한 관광지도보다 몇 번 접힌 팜플렛 형태의 이 지도들이 가지고 있는 도시에 대한 정보값이 높다. 그리고 사실, 예쁘다. 각 도시가 관광청이나 방문자 센터에서 무료로 제공하는 이 지도들은 대표적인 공공디자인의 사례다. 디자인과 공공성의 접목에 대해 고민하는 이응셋 스튜디오의 이예연 디자이너는 그런 작업을 꾸준히 해온 디자이너다. 12월의 <I’m a pro>는 이예연 디자이너를 만나 그의 디자인 커리어와 1인 디자이너로서 일하는 방법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Q. 당신은 어떤 디자인을 하는 사람인가?
인쇄매체부터 행사 아이덴티티, 로고, 웹사이트 디자인까지 그래픽 디자인에 속하는 영역은 모두 다루고 있다. 그 중에서도 지도 디자인과 벡터 일러스트레이션 작업도 비중있게 하고 있다.
Q. 당신은 어떤 디자인을 하기 좋아하는 사람인가?
디자인은 시각적으로 트리거가 되는 요소가 아름답게 정리되어 있는 게 중요하지만 동시에 콘텐츠와 맥락이 빠지지 않는다. 그 두가지가 잘 드러나는 동시에 시각적인 요소와 끈끈히 연결되는 디자인이 좋은 디자인이라고 생각한다. 특히 내용과 맥락을 디자인에 노출시킬 때 자칫하면 유치해지기가 쉬운데 - 예를 들면, <변화의 물방울>이라는 전시의 포스터에 물방울 모양을 고스란히 그려버리는 것처럼 - 그렇게 유치해지기 쉬운 함정을 피하고 세련되게 맥락을 표현한 디자인을 좋아한다.
시각적인 것에서 시작을 해 내용을 여기에 맞아떨어지게 다듬는 디자이너가 있는가 하면, 내용에서 시작해 시각적인 요소를 보강해 가는 타입이 있는데 나는 후자다. 거기에, 디자인과 예술 영역 바깥까지 영향을 끼치는 디자인에 쾌감을 느낀다. 그 바깥의 영향이란 것이 최고점에 도달하면 아주 큰 공공성을 획득하게 된다고 생각한다. 노토 산스처럼 완성도 높은 무료 폰트라던가, 잘 디자인된 버스 정류장이나 지하철 노선도, 지금 여기 서울스퀘어 앞의 미디어 파사드 같은 것들 말이다. 그런 것들은 디자이너나 클라이언트를 넘어서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큰 유익함을 가져온다고 생각한다.
Q. 어떻게 디자이너가 되었는지?
주변의 멋진 여성들의 영향이 컸다. 할머니는 의상 디자인을 하셨고 사촌 언니는 디자인을 전공했다. 매일 같이 노는 소꿉친구이자 또래 언니도 그림을 정말 잘 그렸다. 나는 그들을 보면서 저렇게 멋있는 옷을 만드는 할머니가, 또 저렇게 멋있는 그림을 그리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들이 내 롤모델이었던 셈. 그래서 디자인을 하는 사람이 될 거라는 막연한 생각으로부터 출발해 예술고등학교에 진학했고 시각디자인을 전공하게 되었다.
Q. 언제부터 스스로를 디자이너라고 정의했는지 궁금하다.
대학 초반까지는 디자이너를 지망하는 학생이었지만, 대학교 2학년 후반에서 3학년 즈음부터 외부 활동에 흥미가 생겼다. 그래서 고등학교때부터 친구였던 이혜림 디렉터와 <생각버스>라는 독립잡지를 만들기 시작했다. 한창 독립출판이 유행을 할 때기도 했고. 3~4년간 잡지를 발행했다. 전혀 모르는 불특정 다수에게 나의 디자인을 직접 전달하게 되니까 더 진지하게 작업에 임하게 됐다. 그 뒤로 코드 포 서울(Code for Seoul)이라는 커뮤니티 활동에도 참여했는데, 디자이너가 아닌 사람들과 협업을 하면서 디자이너로서의 나의 재능을 활용하게 되더라. 그 즈음부터 스스로를 진지하게 작업을 하는 디자이너로 생각하게 됐다.
Q. 해 왔던 작업 중 기억에 남는 작업을 소개해 달라. 특히 커리어 측면에서 중요한 인사이트를 남긴 작업이 있다면?
역시 방금 언급했던 <생각버스> 작업이다. 스튜디오를 열고 난 후의 작업들도 떠오르는 것을 많지만, <생각버스>를 만드는 과정에서 만난 사람들이 지금까지 나에게 도움을 주고 나 역시 많은 것을 배웠다. 실력도 늘었고. <생각버스>는 서울의 버스 노선을 다루는 잡지다. 472, 7011 같이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사람이라면 자기가 자주 타는 노선이 하나쯤은 있지 않나. 그 하나의 노선을 정해 버스가 들리는 지역과 지역에 담긴 이야기, 버스를 타고 내리는 사람들의 사연을 갈무리했다. <생각버스>는 그래서 버스에 대한 잡지기도 하지만 서울이란 도시를 주제별로 파헤치는 작업이기도 했다. 결국 내가 좋아하는 디자인에 속하는 작업이었다. 시각적인 결과물이 공공성을 획득해 대중들과 만난다는 점에서 그랬다.
최근에 작업하고 있는 것 중 꼽자면, 트러스트 무용단의 디자인이다. 시각적으로 더 과감하고 자유롭게 표현할 수 있는 분야라서 재밌게 작업하고 있다.
Q. 프리랜서 디자이너로 일을 시작하기 전까지 디자인뿐만 아니라 다양한 영역의 프로젝트를 거쳐 왔는데, 이 경험이 디자이너로 일하는 데 도움이 되었는가?
프리랜서 디자이너로 일하겠다고 선언한 후 큰 공백없이 나름 꾸준히 일을 받아왔는데, 대학생 때부터 다양한 분야의 사람을 만나 온 덕분인 것 같다. 그때부터 작던 크던 디자인을 완성해 결과물을 보여주었기 때문에 조금 더 쉽게 나를 신뢰하고 작업을 의뢰하지 않았을까. 프리랜서로 처음에 일을 시작하면 굉장히 막막할 수도 있었는데, 생각보다 빠른 시간 안에 자리를 잡을 수 있었던 것 같다.
그래서 후에 프리랜서 디자이너를 고려하고 있는 사람이라면 학부 때부터 외부활동을 하며 다양한 사람을 만나고 작업물을 발표해 보는 건 상당한 도움이 된다고 조언하고 싶다. 디자인이 필요해서 일을 주는 사람의 90% 이상은 디자이너가 아닌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그 사람들을 많이 만나고 관계를 쌓아나가는 방법을 아는 게 중요하다고 느낀다.
Q. 1인 디자인 스튜디오를 준비하고 꾸려나가는 과정도 궁금하다.
스튜디오를 열 때 제일 중요한 것이자 첫걸음은 포트폴리오 사이트를 구축하는 것 같다. 기존에 했던 작업물을 잘 정리해 보여주고 있어야 클라이언트도 이 사람이 어떤 결과물을 냈는지 보면서 나에게 맡길 작업을 연결해 생각해 볼 수 있다. 그래서 자기를 어필할 수 있는 포트폴리오 사이트를 만드는 것이 가장 먼저다.
사람들에게 각인될 수 있는 네이밍도 중요한 것 같다. 나의 경우 ‘이응셋’은 학부 시절 외부활동을 할 때부터 쓰던 닉네임이다. 그걸 그대로 이어서 썼는데 일종의 개인 브랜딩이 되었다.
그 다음엔 내가 빠짐없이 나의 업무를 파악하고 매끄럽고 수월하게 이어갈 수 있는 루틴과 환경을 만드는 것이다. 작업하는 시간, 미팅하는 시간, 서류처리 하는 시간, 제작에 투자하는 시간 등 해야 할 일이 굉장히 많아서 자칫하면 놓치기 쉽다. 그 일을 하는 사람은 오로지 나 하나, 책임지는 것도 나 하나이기 때문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그중 어떤 한가지라도 빼먹거나 잊으면 그냥 넘어가거나 대신하게끔 할수가 없기 때문이다. 일정관리를 완벽하게 할 수 있는 방법이나 툴도 나는 매우 중요하게 생각하고, 효율을 가져다주는 새로운 툴이나 대체제 같은 것에도 투자를 많이 하는 편이다.
Q. 얘기를 들어보니 디자인 스튜디오, 그 중에서도 1인 스튜디오는 디자인 작업에 할애하는 시간 외에 다른 일에도 상당히 많은 시간을 들이게 되는 것 같다.
그렇다. 각종 세금이나 견적을 내고, 또 돈을 지급하고 지급받는 등등의 일에서 내가 감당해야 할 것들이 있는데, 그걸 처음에 시작할 때는 몰랐다. 사실 시작할 때부터 그런 점을 미리 대비하고 갖출 필요까진 없는 것 같다. 일단은 시작하고 필요할 때마다 알아가고 배우는 게 더 중요하다. 1인 스튜디오로 활동하려면 그렇게 알아가고 배우는 과정을 두려워하거나 힘들어하면 안 된다. 일이 생길 때마다 배워야 하는 것들을 배우고 노련하게 대처할 수 있어야 한다.
나는 프리랜서로 활동을 1년가량 하다가 2017년 디자인 스튜디오 사업자 등록을 했는데, 프리랜서로 활동하던 기간에 같은 분야에서 일하는 친구와 작업실을 쉐어했다. 비슷한 일을 먼저 시작한 친구에게 1인 스튜디오 사업자로 일하기 위해 필요한 것들을 많이 배우고 알아갔다. 둘 다 새롭게 마주해야 했던 것들은 함께 고민하고 들어줄 수 있었다. 친구와 작업실을 쉐어하지 않았다면 초기에 어려워했을 것 같다. 그래서 이제는 FDSC의 존재가 큰 의미로 다가온다. 멋진 분들이 정말 많아서 작업적으로도 자극을 받지만 그 외에 다양한 사업적인 문제나 노하우를 많이 얻고 있다. 디자이너로 커리어를 시작하거나 발전시켜나갈 때 비슷한 생각과 고민을 나누는 모임이 큰 도움이 된다.
Q. 앞으로 5년 후에도, 또 10년 후에도 디자인을 하고 있을까?
5년, 10년 뒤 뿐만 아니라 20년, 30년을 넘어서 꾸준히 활동하는 디자이너가 되고 싶다. 예전엔 당장 디자이너로 돈을 벌면서 생계를 유지할 수 있을지에 대한 걱정이 앞서 그런 생각을 못했지만 지금은 10년후에는? 20년후에는? 장기적인 미래를 자주 떠올리게 된다. 굉장히 막연하고 가끔은 그 생각이 자주 나서 괴로울 때도 있었지만, 그것을 목표로 삼기로 했다. 목표로 삼아버리는 순간 갑자기 편안해지고 더 의욕이 생겼다.
Q. 디자이너로서 자신의 장점을 꼽는다면?
클라이언트와의 관계맺기. 양민영 디자이너가 디자인은 서비스업이라고 말했는데, 여기에 공감을 많이 한다. 클라이언트와 대화하고 응대하는 게 1인 스튜디오의 일에서 비중이 크다고 생각한다. 거기서 나는 잘 하고 있는 것 같다. 스스로 잘한다고 툭 말하니까 모양새가 웃긴데, 여기서 잘한다는 건 내가 뛰어나서 모든 것이 좋게 흘러간다는 말이 아니라 크게 나를 그 문제에 얽매지 않는다는 것이다. 클라이언트를 상대할 때 힘들 때가 왜 없겠나. 그 문제에 나를 지나치게 가깝게 두기 시작하면 상황은 악화되기 마련이다.. 클라이언트와 나 그리고 작업이 오갈 때 발생하는 감정적 노동과 행위의 완급조절이 필요한 시점이 꼭 있다.
특히 관계의 끝을 잘 마무리한다는 점이 중요하다. 뭐든지 시작은 설레고 재밌어 보인다. 그러다가 작업을 진행하면 환상도 깨지고 난관에 부딪힌다. 처음과 같은 설렘을 유지하는 것은 어렵다. 지나치게 물질적인 유혹이나 부당한 상황에 휩쓸리지 않는 것도 포함된다. 1인 스튜디오를 운영하다보면 그 고민과 일련의 행동이 또다른 작업으로 직결되기도 한다.
Q. 디자이너로서 일할 때 나를 가장 힘들게 하는 것 한 가지를 꼽는다면 무엇일까?
시간. 작업을 쫓기면서 할 때. 일정 관리가 상당히 힘들다. 왜 그런가 생각을 해 봤는데, 단순히 일이 많아서가 아니다. 일이 몰려 있지 않을 때도 자주 쫓기는 기분이 들거든. 어떤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과정 전체 중에서 디자인에 배분하는 시간이 너무 적어서 그렇다고 생각한다. 완성도가 높은 디자인을 만들기 위해서는 끝까지 뚝심있게 끌고 나갈 시간이 필요한데, 작업하다 보면 ‘이정도면 됐고, 일단 빨리 결과물을 만들어 달라’는 식일 때가 잦다. 의뢰를 받을때 디자인 자체에 드는 시간 뿐만 아니라, 결과물을 제작하는 데에도 시간이 들어가는데 제작과정에 시간을 제대로 쓰려면 디자이너가 스스로를 갈아넣어 디자인 구상에 드는 시간을 줄여야만 한다. 좋은 결과물을 내려면 결국 나를 희생해 빠른 시간 안에 뭔가를 만들어내야만 하는 것이다.
그래서 프로젝트의 구상, 기획 단계부터 디자이너가 과정에 참여할 수 있으면 매우 큰 도움이 된다. 물론 과정 전체에서 디자인에 배분하는 시간을 늘려야 하기도 하지만 기획 단계의 내용을 인지하고 있으면 디자인을 훨씬 수월하게 진행할 수 있다.
또, 디자인이라고 퉁치고 있는 업무 안에서도 역할분담이 필요한 점을 고려해야 한다. 예를 들어 책 작업을 하면 들어갈 일러스트를 작업해야 하는 경우도 있고, 레터링을 작업해야 하는 경우도 있다. 그 모든 걸 처음부터 끝까지 혼자 하는 디자이너가 있을 수도 있지만 대부분은 그렇지 않다. 결국 한 사람의 디자이너에게 일을 맡겨도, 그 디자이너는 다른 디자이너와 협업을 요청해야 할 수도 있다.
Q. 언젠가 꼭 해보고 싶은, 버킷리스트 같은 작업이 있다면?
디자인 작업 자체라기보단, 나만의 사업을 떠올려보곤 한다. 거기에 필요한 디자인은 내가 하게 되겠지. 그게 어떤 일이 될지, 언제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나만의 콘텐츠로 처음부터 끝까지 만들어진 무언가를 세상에 남겨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