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적 영역에 관해 타인에게 불쾌한 조언을 듣는 것. 그리 놀랄 일은 아니다. 한국은 관심과 간섭을 구별하지 못하고, 오지랖을 정으로 둔갑시키는 괴상한 집단주의 문화를 가진 곳이니까. 다 너를 위해서고, 너를 염려하기 때문이라는 핑계까지 잘 마련되어 있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 놀랍지 않은 일은 결혼제도 안에서 유독 한쪽에게만 자주 발생한다. 불편함을 드러낼 수 있는 정도에도 성차가 존재하여 ‘싹싹하게’ 웃어넘겨야 하는 감정 노동조차 한쪽에게만 더욱 강하게 요구된다.
머리 짧게 자르지 마, 긴 게 예뻐.
예쁘다니 칭찬일까? 칭찬을 가장한 외모 평가일까? 분명한 건 머리를 막 자르고 온 사람이 듣기에 기분 좋을 만한 말은 아니라는 점이다. 듣는 사람의 기분이나 입장을 고려하지 않고 본인이 하고 싶은 말을 할 수 있는 사람은 누구인가. 자신에게 해가 될 일이 발생하지 않을 거라 확신하는 사람만이 마음껏 무례할 수 있다. 나는 머리를 자른 후, 위 말을 시모에게 들었다. 머리가 긴 게 낫네 뭐가 어울리네 하는 말을 살면서 많이 들어왔지만, 이번엔 묘하게 느낌이 달랐다. 다음에 머리를 자르려면 왠지 모르게 눈치가 보일 것 같달까, 내 머리길이를 통제당하는 기분이었다.
시모는 왜 나에게 아무렇지 않게 무례를 저지를 수 있는 걸까? 시모 입장에서는 마냥 자식 같아서 편하게 개인적인 감상을 이야기한 것일 수 있겠다. 그러나 편하다는 것은 발화자의 기준이고, 권력자의 입장이다. 편하게 한 말이라고 편하게 받아들여지는 것은 아니다. 이러한 권력 관계는 무례한 말을 듣고도 그 말의 무례함을, 내가 기분이 상했음을 시모에게 표현하기 어려운 이유이기도 하다.
어디에서 온 권력인가
나이가 권력이 되는 때가 종종 있지만, 그것만으로는 설명이 불충분하다. 연장자라고 하여 어느 정도 무례를 용인받는 것도 아니다. 더구나 기본적으로 타인에게 조심스러운 태도를 보이는 내 시모라면 더욱 그렇다. 유순하고 배려심 깊은 성향을 가진 시모가 며느리의 특정 영역에 관해서는 별다른 의식 없이 무례하게 되는 기제는 대체 무엇인가?
성인이 된 자식을 심리적으로 분리시키지 못하고, 독립된 인격체로 인정하지 못하는 부모들이 많다. 그리고 높은 확률로 이들은 며느리 또한 자식과 같은 취급을, 아니 더한 취급을 한다. 소유적 부모자식 관계에 더하여 아내는 남편과 시가에 속한다는 가부장적 사고가 결합한 것이다. 며느리는 내 아들의 소유이고, 아들은 나의 소유이니, 결국 며느리도 내 소유가 되는 과정을 거친다. 일부 영역에 있어서는 아들보다 며느리에 대한 권리의식이 더 강한 것처럼 보인다. 나의 신체자유를 구속하는 시모의 발언은 가부장제에서 위임받은 권력에서 나온 것이었다.
며느리 신체에 대해 권리를 행사한다
며느리를 아들에게 종속된, 동시에 한 단계 아래의 존재로 바라보는 시선의 부작용은 여기에서 끝나지 않는다. 시부모는 며느리의 신체 모습 뿐만 아니라, 신체가 있을 곳 혹은 신체에 생기는 일에 관해 결정할 권리를 가진 것처럼 행동한다.
시부모가 우리 집에 오기로 하면, 그분들은 내 스케줄과는 관계없이 내가 조금이라도 일찍 집에 와 있기를 기대한다. 남편에게는 요구되지 않는 사항이다. 남편에겐 공적 업무나 사적 용무를 모두 마치고 오라고 신신당부하지만, 내겐 다른 무엇보다 시부모 방문이 최우선이길 바란다. 내가 몇 시에 퇴근하는지 같은 건 크게 중요하지 않다. 웬만하면 시부모가 아들집을 방문할 때 며느리가 집에서 당신들을 맞아야 한다고 여긴다. 며느리의 도리라는 명분으로 나의 신체자유와 우선순위를 통제하려 드는 것이다.
결혼한 지 한 달도 채 되지 않았을 때였다. 신혼집이 있던 동네에 시부모의 절친한 친구 부부가 살았다. 당시 시부모는 그 친구분들과 일주일이 멀다하고 만날 정도로 교류가 잦은 사이였고, 자연스레 동네에 자주 왔다. 어느 날 시부모는 내가 혼자 모임에 나와 그분들에게 인사를 드리면 좋겠다고 남편을 통해 전해왔다. 남편도 참석해본 적 없는 시부모의 사적인 만남을, 굳이 남편도 없는 낮시간에 혼자, 결혼식 올린 지 얼마 안 되어 시부모와의 관계도 조심스러운 시기에, 시부모 친구라는 어려운 관계의 사람들을 만나라는 적잖이 당황스러운 요구였다. 참석이 편치 않다는 뜻을 간곡하게 돌려서 남편이 전달하였지만, 내가 받은 충격은 쉬이 가시지 않았다.
나는 시부모에게 나오라면 나와야 하는 사람, 언제든지 나오라고 부를 수 있는 사람, 아들과 상관없이 당신들을 대접해야 하는 사람이다. 시부모가 넓은 마음으로 아량을 베풀어야 불참이 용인되는 사람이다. 명백한 권리 의식이다. 며느리를 오라가라 할 수 있는 권리가 있다는 뿌리 깊은 인식. 나의 의사와 무관하게 나에 대해 간섭하고 요구할 수 있는 자격이 있다는 생각.
그렇기에 시부모는 며느리에게 진심으로 묻지 않는다. 며느리에게 선택권이 있다고 여기지 않으니까. 그래서 요구한다. 다가오는 시부 생일에 시부 친구들과 같이 식사를 ‘해야 한다’고 통보받은 날, 어찌저찌 상황은 무마했지만, 내 심정은 딱 이러했다. ‘대체 나한테 당신이 뭔데?!’ 대체 내 인생에서 당신이 어떤 자리를 차지한다고 여기기에 내가 당신 친구들과의 생일파티에 참석하길 바란다는 말을 제안도 요청도 부탁도 아닌 권위적 명령조로 일관하는가. 당신은 왜 당연하다는 듯이 나의 결정권을 침범하는가. 왜 나를 좌지우지할 권리가 당신에게 있다고 여기는가.
내게 뭔가를 맡겨 놓은 것처럼 하지만
시부모는 며느리의 신체에 대한 권리가 없다. 개인의 신체 결정권은 오로지 본인에게 속할 뿐이다. 내가 어디에 가고, 언제 가고, 무엇을 할지 결정하는 건 나 자신이어야 한다. 내 몸이고 나의 의지고 나의 판단이다. 나는 자유로울 권리가 있다. 이건 기본적인 인권의 문제다.
그러나 유부녀가 되었으니 옷차림을 좀더 단정히 하라는 시부모가 있다. 해외출장이 잡힌 며느리에게 결혼한 지 얼마 안 되었으니 출장가지 말고 집에서 아들 밥 챙겨주라는 시부모가 있다. 나이가 많으니 하루라도 빨리 임신하라고 재촉하는 시부모, 임신을 위해 자궁 질병을 당장 치료하거나/치료를 미루라는 시부모가 있다. 그리고 건강상 제왕절개가 필수적인 며느리에게 태아의 지능이 낮아진다는 비인간적인 이유로 자연분만을 고집하는 시부모가 있다.
그저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있고 싶어서 한 결혼인데, 느닷없이 내 신체에 대한 결정권을 빼앗긴다. 내 몸의 역할은 시부모를 맞이하고, 남편을 내조하고, 아이를 낳는 데 한정되며, 타인, 주로 시가를 위해 봉사하는 몸으로만 기능한다. 여성은 하나의 완전한 인간으로 설 수 없고, 남편과 시부모에게 종속된 존재라는 시각은 너무나 뿌리 깊다. 누구나 표면적으로는 부정할 말이지만, 며느리의 삶은 이를 몸소 증명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