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윤, 오혜진의 백일몽 5. 혁명이 끝난 자리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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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윤, 오혜진의 백일몽 5. 혁명이 끝난 자리에서

허윤

일러스트레이션: 이민

백일몽 [day-dreaming, 白日夢]

충족되지 못한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하여 비현실적인 세계를 상상하는 것.

 

끝나지 않았던 운동

내가 대학에 입학했을 때 사람들은 ‘운동’은 이미 끝났고, 신자유주의가 대학가를 지배했다며 혀를 찼다. 그 말은 분명 일부 사실이었다. ‘한총련’으로 상징되었던 대규모 학생운동은 이전만큼 동원력을 가질 수 없었고, 매년 4월 30일에서 5월 1일로 이어지는 민중대회에도 대학 단위의 대오는 적었다. 

하지만 나는 아직도 선명히 기억한다. 학교 본관 앞에서 눈물을 흘리며 삭발식을 하던 언니들의 모습을. 갑작스레 인상된 등록금 문제를 중심으로 교육 투쟁이 진행되고 있었고 학생회장단은 한 달간 단식투쟁을 이어갔다. 그리고 그 때 천막을 지키던 많은 사람들은 여전히 더 나은 사회를 만들겠다며 저마다의 현장을 지키고 있다. 하지만 우리는 대학에서의 운동은 끝났다고 말한다.

얼마 전 연대에서 ‘1996년 8월 연대 사태’에 관한 학술대회를 참여했을 때, 그와 비슷한 기분을 느꼈다. 87년이 성공한 혁명의 기억으로 자리잡고 있다면, 96년의 ‘연대 사태’는 대학운동권의 몰락을 상징하는 사건이다. 8월의 항례 행사인 범민족대회와 통일대축전에 참가하기 위해 전국에서 모인 대학생들은 경찰의 강경진압에 일주일간 연대에 갇혀 대치를 계속했다. 

헬기에서 쏟아지는 최루액과 그에 맞선 화염병 등 신촌 일대는 내전을 방불케했다고 한다. 화염병과 쇠파이프를 든 시위대와 진압용 방패를 든 전투경찰의 후경으로, 우리 아이들을 집으로 보내달라며 외치는 어머니들이 배치된다. 생리대가 들어 있는 커다란 박스를 전달하려다 실패하는 광경 등은 ‘연대 사태’를 설명하는 가장 단적인 이미지다. ‘폭력 시위’의 주도자는 남성으로, 경찰 봉쇄로 학교에 갇힌 학생들은 여성으로 재현되는 것이다. 이러한 젠더화는 1996년 연대 주변의 풍경과 겹쳐 볼 때 여러 가지 흥미로운 지점을 노출한다.

일러스트 이민

그 자리의 젠더 권력

언제나 그렇듯 역사화하는 과정에서는 담지 못하는 사건이나 이야기들이 생겨날 수밖에 없다. 예를 들어서 이런 사건이다. ‘연대 사태’와 같은 해인 1996년 5월 29일 고대생 400여 명이 이대 대동제에 집단으로 난입해서 폭력을 행사했다. 기차놀이를 하며 운동장에 진입한 남학생들은 이대생들을 밟고 지나갔고, 폐막제를 위해 준비된 무대를 부쉈다. 

이 사건은 한국의 여성운동사에서는 중요한 지점으로 기록되어 있지만, 대학 내 운동의 역사나 기록에서는 등장하지 않는다. 그러나 쉽게 예상할 수 있듯, 이때의 남학생들은 학내 민주화와 노동해방을 이야기하던 학생 대중에 다름 아니었다. 이대 대동제에서 난동을 부린 그날의 남학생들 중 상당수는 학생회 선배를 따라온 ‘평범한’ 사람들이었고, 이들은 가투(거리투쟁)에서 전경과 싸우는 것처럼 이대를 지배, 정복함으로써 단결력을 높였다. 이 ‘자연스러운’ 광장의 경험은 광장의 성별화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기도 했다. 이대 운동장을 찾아왔던 학생회 학생들과 정치적인 의식을 갖고 있던 ‘마지막’ 대중운동의 세대는 고스란히 겹쳐지는 것이다.

2016~2017년 촛불광장에서 페미니스트들이 지적했던 것처럼 광장에서 우리는 중립적인 존재로 설 수 없다. 연대 사태 직후, 당시 국회의원이던 추미애는 대규모 검거 과정에서 전경이나 경찰에 의한 성추행과 성폭력이 빈번했음을 고발했다. 그러나 그 고발은 “국회에서는 말해선 안 되는 어떤 것”으로 여겨졌다. 당사자들이 나서서 국가에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진행하였지만, 대상 특정이 불가능하고 증거가 불충분하다는 이유로 무혐의 처분을 내렸다. 언제나 특정한 문제들은 보이지 않는 것으로, ‘나중에’ 해결해도 되는 것으로 여겨지는 것이다.

아이러니하게도 민주주의를 외치는 광장에는 언제나 본질적인 것과 부차적인 것, ‘우선’과 ‘나중’이 존재한다. 그리고 자주 그 ‘나중에’는 우리의 성화된(sexed) 존재에서 기인한다. 젠더는 광장에서 우선적이고 시급한, 본질적인 문제가 될 수 있을까. 

끝나지 않은 운동

가능성은 있다. 연대 사태를 기점으로 대학생 중심의 대중운동의 시대는 끝났다고 말하지만, 오히려 운동권 사회에 대한 전면적 비판과 자기 반성, 여성운동의 분기는 활발해졌다. 대학 내 반성폭력 학칙 제정 운동이나 1998년의 호주제 폐지 운동본부의 발족, 2000년의 ‘운동사회 성폭력 뿌리뽑기 100인 위원회’의 고발 등 대규모의 급진적 여성운동이 부상한 것이다. 이는 미국의 흑인민권 운동의 분기점에서 급진적 페미니즘이 나오고, 베트남전쟁 반대 운동에서 일본 제국주의의 문제를 통렬히 비판하는 ‘우먼리브’가 나왔다는 점과도 연결된다.

2019년 9월9일, 대법원은 안희정 전 충남지사의 위력에 의한 성폭력 사건에 대해 징역 3년 6개월의 원심을 확정했다. 조국 법무부장관 임명을 둘러싼 논쟁을 통해 공론장은 촛불혁명은 무엇이었나를 질문하고 있는 와중이었다. 누군가는 혁명이 끝났다고 말하는 자리에서, 혁명은 여전히 계속되고 있는 것이다. 광장을 떠나지 않고 싸우는 사람들 덕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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