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나리 시집 『울프노트』에 실린 <시인의 말>이 인상 깊어요.
정한아 저희 부모님이 만났다 헤어지기를 반복하는 동안 동생이 띠동갑으로 태어났어요. 제게는 굉장히 각별하고 애틋하죠. <시인의 말>에 나오는 이십 년 전은 실질적이거나 물리적인 의미의 위협이 있었다기보다는 심리적으로 곤궁한 시기였어요. 위태위태한 시절에 저는 제가 동생을 돌보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돌보는 일을 통해 제 마음을 돌보기도 했고 동생이 저를 돌보아 주기도 했던 것 같아요.
신나리 <시인의 말>은 ‘내 동생을 괴롭히는 자는 처참한 대가를 치르게 된다/얼굴에서 웃음기가 싹 가신 이들에게 이 시집을 바친다’라는 말로 끝이 납니다.
정한아 실제로 제가 동생을 위해 누군가를 응징하거나 복수하지는 못하겠지요. 그렇지만 저는 말로 뭔가를 표명한다는 것에 각별한 의미가 있다고 생각해요. 지금은 말의 인플레이션 때문에 사람들이 말과 말의 힘을 잘 믿지 않고 있잖아요. 그 결과, 만일 믿었더라면 효력을 발생시켰을 것들의 효력이 굉장히 옅어졌다는 생각이 들어요. 시 자체가 아마 그런 것이겠지만요. 말의 인플레 속에서 살아남으려는 안간힘 같은 것.
신나리 말에 대해 생각하는 과정이 시를 쓰는 과정과 연결되는 것인가요?
정한아 시를 쓰는 건 말로 할 수 없는 것을 말로 해야 하는 작업이니까요. 물론 지금 느끼고 있는 것을 어떤 말로도 담아내지 못할 것이라는 속 깊은 회의는 있어요. 시인이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지 않을까 생각해요.
신나리 깊은 회의에도 불구하고, 느끼는 것을 말로 표현해내려고 애쓰는 과정이 시쓰기겠네요.
정한아 제가 학생들에게도 자주 쓰는 비유인데요, 시는 연애편지 같은 거라고. 내가 어떤 사람을 비밀스럽게 좋아하고 있고 그 사람은 아직 내가 좋아한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는데 그걸 처음 밝히려고 연애편지를 쓰기 시작할 때 느끼게 되는 곤혹스러움 같은 것이 시를 쓸 때도 있는 것 같아요. 아무리 써도, 이런 방식으로 써보고 저런 방식으로 써봐도, 다 보여줘도 ‘아니야, 이게 아닌데, 아직 모자란데, 이걸로는 안 되겠는데.’라는 생각이 들죠. 그래서 늘 안간힘을 쓰게 되는 것이죠. 쓰고 나면 실패한 것 같고, 어떤 의미에서는 실패할 수밖에 없고요. 그렇지만 또 다시 실패하기 위해서, 결과적으로는 실패하게 되겠지만 또 쓰는 과정인 거죠.
신나리 시 쓰기의 과정이란 너무 고통스러운 것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드네요. 특히 시인님의 작품 속에는 어떤 것에 골몰하고 화를 내고 계속 의심하는 사람이 등장하잖아요.
정한아 사서 피곤하게 산다?(웃음) 저는 어떤 것을 너무 믿고 싶어서 그것에 대해 많이 생각하다가 역설적으로 의심을 하게 되는 것 같아요. 만약 어떤 종교를 가진 사람이 있다면, 그는 신이 있다고 믿음으로써 믿음을 획득하게 되는 것이 아니라, 신이 없다면 얼마나 유감스러울까 하는 생각 때문에 신에 대해 계속 의심하다가 어떤 믿음을 획득하게 되는 것이죠. 신이라는 것이 어떤 형상이고 어떤 요소들로 이루어져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뭔가 세계를 좋은 방향으로 끌고 가는 존재가 있을 것이라고 믿고 싶어서 끊임없이 신에 대해 생각하고 의심한다는 생각이 들어요. 제 경우엔 인간에게는 선한 의지가 있다는 생각을 너무 믿고 싶었던 것 같아요. 사람들의 마음속에 양심의 조각이 하나씩 있어서 발아시키기만 하면 잘 되어 나갈 수 있다고 끊임없이 믿으려고 노력했던 거죠. 그래서 힘들었던 것 같기도 해요.
신나리 시집 『울프노트』는 인물 론 울프의 고통스러운 삶의 기록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는 첫 시집의 작품 <론 울프씨의 혹한>에서 처음 등장한 인물인데요. 작품 속의 론울프라는 인물에 대해 이야기해주세요.
정한아 저는 시에 ‘나는’이라고 쓰는 것이 좀 부끄러워요. 그래서 처음에는 ‘나’라고 썼다가 ‘그, 그녀, 너’로 바꾸어 버리는 경우가 많아요. 혹은 실제의 나와 합쳐져서 읽히면 시가 시처럼 안 읽히고 자전적인 무엇인가로 읽힐 수 있을 것 같아서 일부러 약간 가공하기도 하고요. 론 울프씨는... 약간 창피하지만, 부분적으로는 제 얘기였겠죠. 또 론 울프씨는 제가 오랫동안 생각하고 있었던 어떤 사람의 모델이기도 했어요. 머릿속으로 궁굴리고 있었던 어떤 사람을 밖으로 빼내어 몸을 입혔을 때 론 울프같은 사람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죠.
유나바머의 선언문인 『산업사회와 그 미래』를 읽고 자퇴한 친구가 있었어요. 도대체 유나바머라는 인간이 뭐길래, 그 친구를 4학년 2학기에 자퇴하도록 만들었을까 궁금했죠. 그래서 저도 그 책을 두어 번 반복해서 읽었는데, 유나바머의 고독을 이해하지 못할 바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꼭 유나바머라기보다, 론 울프는 엄청나게 고독한 사람을 의미해요. 남들에게 따돌림을 당해서가 아니라 스스로 고독을 자처한 사람이요. 이 세계의 모든 것이 내 몸에 맞지 않는다고 느끼는 사람, 이 세계에 나는 아무래도 속해있는 것 같지 않다고 느끼는 사람이요. 그리고 이러한 생각을 공유할 만한 사람이 없기에 혼자 자기를 유폐시켜버리게 되는 사람이죠.
신나리 유나바머의 이야기가 알레고리로 읽히셨던 건가요.
정한아 유나바머는 기술의 진보가 인간을 망치는 주범이라고 생각하고, 그러한 자기의 생각을 담은 선언문을 실어주지 않으면 폭탄테러를 하겠다고 언론사를 협박했어요. 결국 지속적인 테러 이후에야 선언문이 실리고 유나바머라는 인물과 그의 선언문을 많은 사람들이 알게 되었죠. 그 비극적인 사태가 어떤 알레고리처럼 여겨졌어요. 따로따로 혼자 유폐되어있는 사람들은 그렇기 때문에 위협적이기도 하거든요. 어떤 의미에서는 일베 같은 것도 시작은 그런 사람들의 우연한 모임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해요. 정치적 올바름 여부와 관계없이 그 고독감은 보편적인 현상이 되었다고요. 커뮤니케이션이 계속 발달하면 할수록 진짜 자기와의 대화를 잃어버리는 역설들이 속속 생기는 거죠.
혼자 있는 게
혼자 있는 게 아니게 되어서
신나리 작품 속의 고독은 두 가지로 읽혀요. 인간이라면 자신의 영혼을 응시하는 고독의 시간을 가져야 한다는 이야기와, 어쩔 수 없이 고독하게 되어 유폐되어 버린 사람들의 이야기요.
정한아 앞서 말씀하신 고독은 내가 그 고독과 친밀해져서 나의 깊은 속에서 우러나오는 의지, 희망하는 것들, 증오하는 것들을 숙고해보고 느껴보고 표현해보는 게 가능해지는 고독이죠. 방 안에 혼자 있는 게 혼자 있는 것이 아니게 된 지금의 사회적 상태가 유감스러워요. 예를 들어 페이스북에 ‘나 잘 살고 있다, 행복하다, 맛있는 거 먹었다, 좋은 데 갔다 왔다.’ 라는 걸 끊임없이 표명하면서, 실제로는 결핍에 시달리고 있는 사람들이 많잖아요. 사실은 행복의 내용을 내 식으로 구성하기 전에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세계가 알려준 피상적인 행복의 내용으로 하여금 자신의 삶을 검열하도록 부지불식 간에 허용하게 된 것인데요, 끊임없는 비교의식을 통해 상대적 박탈감이 병처럼 자기를 잠식하기 시작할 때, 반성적인 재구성이 개입하지 않으면 겉잡을 수 없는 이기성 같은 것이 일반화된다는 생각이 들어요.
신나리 작품 속에서도 실제 삶에서 만나는 타인에 대한 관심이 느껴져요. 수찬이와 수찬이의 형 아니면 김태희씨 같은 인물들이요.
정한아 제가 좀 일방적으로 사람들을 좋아하는 것 같아요. 표현을 안 하니 당사자들은 모르지만요. 수찬이나 김태희씨는 동네에 살거나 친구가 사는 동네에 갔다가 우연히 본 사람들이에요. 사람들을 사랑하고 싶은데 제게 너무 가까이 다가와 있는 사람들로부터는 일그러진 형상을 자주 보게 되니까, 실질적으로 관계를 맺고 있지 않은 사람들에 대한 애정을 표현하면서 제 양심을 편안하게 하려는 수작을 부리고 있는지도 모르겠어요. 실제로 저와 거리가 있는 사람들은 부분이 아니라 전체로 그리고 순간적으로 보이기 때문에, 그 사람들과 그 사람들의 좋은 점에 대해서 애정을 가지고 이야기할 수 있는 것 같아요.
신나리 작품 속에는 여동생과의 관계부터 먼 이웃들과의 관계까지 다양한 사람들이 등장해요. 시인님께서 상상하고 계시는 공동체 같은 것이 있나요.
정한아 저는 대학에 들어갈 때, ‘이야! 드디어 나는 빨갱이가 될 수 있어!’ 하고 기뻐했어요. 제가 고등학교 때 읽었던 문학책들이 모두 80년대 시 소설들이어서, 저는 아직도 사람들이 민주화를 위해서 분노하고 투쟁하고 사회의 불합리한 부분에 대해서 열심히 정의감을 불태우고 있는 줄 알았어요. 학교에 들어갔더니 이미 운동권은 지리멸렬해져서 망해가고 있었고, 동기들은 전부 서태지 콘서트에 가거나 미팅을 하러 가더라고요. 마이너가 된 학생회에서 활동하면서, 저는 그래도 나와 결이 맞는 사람들과 같이 있다고 스스로를 위로하고 있었어요. 그때 내가 생각했던 공동체라는 건 정의로운 사람들의 공동체였거든요. 대학 생활을 그런 식으로 하다가 나중에 문득 저 안에서 나에게 나쁜 짓을 했던 사람도 정의로운 공동체를 꿈꾸고 있었다는 걸 깨닫게 됐어요. 학생회 안에서의 성추행이라던가 정치적으로 올바르지 못한 운동권들의 작태들을 보면서 공적인 신념과 개인의 실천을 분리해서 살고 있는 사람들이 저지르는 어떤 것들이 있다고 알게 되었죠. 그 사실에 한동안 굉장히 분노했어요.
깨우쳐야 되는 것,
내버려둬야 되는 것,
때려야 되는 것
신나리 그렇다면 그 시기 이후에 공동체에 대한 생각의 변화가 있었겠네요.
정한아 리처드 로티가 쓴 <우연성 아이러니 연대성>이라는 책을 읽으며 전회를 겪게 됐어요. 전통 철학에서는 공적인 것과 사적인 것이 언제나 통합되어야 한다고 이야기해요. 훌륭한 사람은 공적으로 훌륭하고 사적으로도 훌륭할 것이라는 생각이죠, 그의 취향까지도요. 리처드 로티의 획기적인 주장은 굳이 그것을 통합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었어요. 네가 맑스주의자더라도 나보코프의 롤리타를 읽을 수 있으며, 네가 맛보는 음식의 맛이 너의 신념과 관련되어 있지는 않다는 게 위안이 되었어요. 제가 보고 느꼈던 실망감과 절망감을 약간 상쇄시켜주는 게 있었거든요. ‘내가 아주 경직된 믿음을 가지고 있었구나. 내가 사람들에게 너무나 일관되기를 심리적으로 요구하고 있었구나. 그리고 나도 그 사실 때문에 힘들었구나. 나 자신에게도.’ 그렇게 사람들에게 좀 관대해지고, 사람들의 다양성과 차이에 의미를 두게 되기까지는 정말 오랜 시간이 걸렸어요.
신나리 근래 가장 마음이 가는 공동체의 유형은 어떤 것인가요.
정한아 박사 논문을 쓰면서 크로포트킨이 쓴 책을 읽었어요. 이 사람은 원래 아나키스트였어요. 간략하게 이야기하자면 크로포트킨의 아나키즘적 공동체는 일종의 조합들의 확장이에요. 중세시대 유럽의 소방관 조합은 한 사람이 죽으면 나머지 사람들이 죽은 사람들의 가족들을 책임져줬대요. 저는 그렇게 친밀한 이웃들의 범위가 넓어진 형태를 상상해요. 문제는 그게 순진하지 않냐는 거겠죠. 저 사람도 나와 같은 사람이기에 우리는 서로 잘해줄 수 있다는 믿음이 공유되기 시작하고 그러한 사람들이 실제로 늘어난다면, 제가 상상하는 공동체가 아주 불가능할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우리가 가까운 사람들에 대해 연민을 느끼고 그 연민을 확장해온 것이, 근대와 현대까지의 역사라고 생각해요. 60년 전에는 흑인이 인간이 아니었고 100년 전에는 여성이 인간이 아니었지만 점점 더 확장된 결과, 이제 우리는 동물에게까지 연민을 확장해나가고 있잖아요. 그러한 연대성에 저도 넓게 동의하고 있어요. 하지만 미운 사람들은 항상 밉죠. 또 깨우쳐야 되는 것과 내버려둬야 되는 것과 또 때려야 되는 것이 있죠. (웃음)
이 인터뷰는 <시인 정한아: 미모사에게 보내는 사랑의 말들(하)>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