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대 때는 지금보다 더 사람의 감정에 관심이 많았다. 추상적이고, 언어화할 수 없는 것을 활자로 표현할 수 있다는 것이 신기했다. 그런 책을 보면 더 열심히 읽었다. 몇 번씩 읽었다. 그 중에서 아직도 기억나는 건 노희경 작가의 <지금 사랑하지 않는 자, 모두 유죄>이다.
내가 좋아하던 부분은 노희경이 첫사랑에게 바치는 20년 후의 편지였다. 제목은 “버려줘서 고맙다”였다.
사랑에 배신은 없다. 사랑이 거래가 아닌 이상, 둘 중 한 사람이 변하면 자연 그 관계는 깨어져야 옳다. 미안해할 일이 아니다. (중략)
마흔에도 힘든 일을 비리디 비린 스무살에, 가당치 않은 일이다. 가당해서도 안 될 일이다. 그대의 잘못이 아니었다. 어쩌면 우린 모두 오십보백보다. 더 사랑했다 한들 한 계절 두 계절이고, 일찍 변했다 한들 평생에 견주면 찰나일 뿐이다. 모두 과정이었다. 그러므로 다 괜찮다.
좋아하던 애와 울고 불며 헤어졌을 때 이 책을 무기 삼아 스스로를 위로했다. 더 좋아했다 한들 한 계절, 두 계절에 불과했을 거라고. 녀석과 함께하고자 했던 시간은 어차피 평생에 견주면 찰나일 뿐이라고. 나는 괜찮을 거라고. 나는 괜찮지 않았다. 몇 년이 지난 지금도 그 녀석과 단 한 계절이라도 더 하지 못 한 것이 슬프다. 내 과오가 더 컸다 하더라도 그 녀석이 나를 배신한 것만 같다. 찰나에 불과한 어떤 사랑은 평생을 좋지 않은 날로 만든다. 모두 과정이든 말든 배신이라 생각한 헤어짐이 죽을 때까지 괜찮지 않은 사랑도 있다.
사랑에 배신은 있다
효주의 엄마는 15년 전에 죽었다. 선생님은 엄마가 자살하던 순간의 목격자이면서 자신의 후견인이었다. 선생님의 가족들은 불편할 정도로 친절했고, 선생님은 “자신에게 쉽게 곁을 주지” 않았다. 15년 간 ‘선생님’이라는 표현을 쓴 이유였다. 어느 날, 효주는 엄마가 죽던 “그날의 일에 대해 들어야겠다는 생각”이 닿았다. “엄마의 마지막 순간”을 듣기 위해 효주는 떨어져 있는 선생님과 편지를 주고 받는다. 선생님은 결혼과 출산을 앞둔 효주에게 그동안 하지 못 한 얘기를 한다.
‘선생님’은 레즈비언이다. 어렸을 때의 그는 “여자이면서 여자를 사랑한다는 사실을 제외하면 정말로 다른 사람들의 사랑과 조금도 다르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는 자신의 사랑이 평범하다 생각했고, “평범하므로 당당해져야 한다”고 믿었다. 그는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도 자신과 같은 선택을 하기를 바랐다. 자신처럼 가족들에게 당당해지라고, 너도 얼른 털어놓으라고 강요했다. 그들의 대화는 “언쟁”과 “일방적인 비난”으로 얼룩졌다.
사실 그도 나중에는 애인을 사랑하지 않았다. 자신과의 “사랑 앞에서 똑바로 고개를 들지 못하는 그의 태도가 곧 나를 향한 것”이라 여겼기 때문이다. 어렸을 때의 선생님은 못난 사람이었다. 자신이 “여자를 사랑하다는 사실을 제외시켜서는 안” 된다는 걸, 애인이 자신의 가족들에게 “그런 시련을 줄 자신이 없”다고 한다는 걸 이해하지 못 했다.
그가 더 화가 난 건 애인이 자신과 “헤어진 후에 남자와 결혼하고 아이까지 낳아 기르고 있다는 걸 알게 되었을 때”였다. 어떻게 나와 함께 여행을 간 곳에서 살 수 있지. “나를 추억하고 살아”간다는 뜻인데, 어떻게 아이까지 낳을 수 있지. 그는 “모욕”을 당한 기분이었다. “많은 걸 이해하게 되었다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그러지 못 했다. 참담했다. 애인을 만나러 간 건 이해가 되면서도 도저히 이해할 수도, 용서할 수도 없는 감정의 불협화음이 견딜 수 없어서였다. 그들의 재회는 녹을 것 같지 않은 언 강 위에서 였다.
헤어진 애인은 “아버지 때문”에 결혼했지만 “남편에게 모든 걸 털어놓고 이혼을 했다”고 말했다. 그가 “틀리지 않았다”고 했다. 그는 애인을 용서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경제적으로 안정적인 집에서 자란 그는 애인에게 도와주겠다고 했다. 원래 있던 자리로 돌아가자고 말했다. “명문대를 다니고 누구보다 세련됐던” 너의 모습으로 돌아가자고 했다. 하지만 애인은 “호의를 받아들일 수 없다”고 답했다. “하나뿐인 혈육이 견뎌야 하는 삶에 대한 확신도 없이 그럴 수는 없다고” 했다.
그는 여전히 애인을 “존중하는 법”을 몰랐다. 분노로 가득 차 가슴을 치며 언 강을 뛰어다녔다. 굴욕감마저 들었다. 그의 아이가 너무 미웠다. 아이만 없었다면 사랑하던 애인을 원래 자리로 돌려놓을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분노 때문에 사고가 일어나고 있다는 걸 몰랐다. “강 가장자리의 얼음이 서서히 녹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면, 재빨리 애인의 손을 붙잡기라도 했다면 그 사고는 일어나지 않았을 거다. 견고해 보이던 강은 애인을 빨아들였다. 그는 “도저히 설명할 수 없는 두려움 때문에” 자신이 사랑했던 애인을 “난생처음 본 사람이라 답”했다. 애인의 딸 ‘효주’의 후견인이 된 건 그래서였다.
다를 것 하나 없는 사랑
문학동네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을 매 년 산다. 새로운 작가를 만나고 싶기도 하고, 좋은 단편을 소장할 수도 있어서다. 올 해가 특히 좋았던 건 수상자 7명 중 대상을 받은 임현 작가를 제외한 6명이 모두 여자였기 때문이다. 그 중 백수린 작가의 <그 여름>과 이 작품이 퀴어 이야기였다. 근친상간을 다룬 최은미 작가의 <눈으로 만든 사람>, 데이트폭력, 성폭행 등을 다룬 강화길 작가의 <호수-다른사람>도 수록돼 있다. 실제로 “절대다수의 작가가 여성이었”고, “레즈비언 서사라고 부를 만한 작품의 경향의 작품이 부쩍 늘어났다”고 한다.
천희란 작가의 작품을 쓴 건 가장 기억에 오래 남아서다. 이런 식의 퀴어 이야기는 처음 읽었다. 금기라고 생각했다. 레즈비언이던 우리 중 하나가 남자를 만나 남은 사람은 절망하는 이야기. 그래서 평생을 원망하는 이야기. 인생의 찰나에 불과하던 시간을 찰나로 끝내지 못 하고 평생을 좋지 않았던 날로 만드는 이야기. 이별의 원인은 보편적이지 않지만 사랑하고 헤어지는 과정은 보편적인 이야기.
효주에게 건네는 마지막 편지에서 선생님은 이런 말을 했다.
너는 한때 나를 원망했던 순간이 있다고 고백했지. 나는 그렇지 않았다. 너를 평생 원망했어. 네가 없었다면 이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서 한순간도 자유로웠던 적이 없다.
나는 한때 네 엄마를 진심으로 사랑했지만, 너를 사랑했던 적은 결코 없다. 네게 해줄 수 있는 것은 모두 해주리라 마음먹었지만, 그것은 네 엄마에 대한 속죄였을 뿐 너를 애틋하게 생각하기 때문은 아니었어.
이 작품을 읽고 무심코 나온 편견을 다시 마주했다. 나는 이런 문장을 쓴 천희란이 ‘대담하다’고(누구 맘대로?), 이 작품이 레즈비언 서사 ‘금기를 깼다’고(내가 뭔데?) 생각했지만 이 또한 내가 레즈비언을 바라보는 왜곡된 시선에 불과했다. 레즈비언 이야기가 아니라면 이런 감상에 앞서 찰나의 시간에 평생을 붙잡혀 자신 조차도 원망하며 산 선생님 캐릭터에 슬퍼했을 게 분명하다. 그러니까 캐릭터의 매력도와 성격에 따라 사랑의 모양이 바뀔 뿐이다. 레즈비언이 사랑하는 법 따위는 없다. 그들의 사랑도 사람에 따라 모양이 달라진다.
문학동네 젊은작가상의 심사위원 중 한 명이던 작가 김연수는 이 작품을 “성소수자 문제가 전면에 부각된 단편”이라고 했다. 이를 소재로 한 작품들이 많이 발표되기 때문에 형식이 중요하고 “이 단편에서 그런 숙고의 과정”이 보였다고 했다. 다만, “그럼에도 의도된, 다시 말해 충분히 예측 가능한 결말로 향한다는 점”에서 다른 단편과 차이점이 없었다고 했다. 독자인 나는 이 작품의 결말이 예측 가능하다고 생각하지도 않았지만, 레즈비언이라는 내용을 담는다고 그릇에 특별히 공을 들일 필요도 없다고 생각한다. 그들의 사랑이 더 특별할 이유가 없어서다. 레즈비언의 사랑과 절망의 서사는 이성애자의 그것과 다르지 않다. 성적 지향이 아닌 사람의 문제일 뿐이다. 이 지겹고 뻔한 말을 언제까지 해야 할 지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