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년도 더 전의 일이다. 친구 A와 영화 <킹콩>을 봤다. 영화관을 나왔는데 A는 울음이 터지기 일보 직전이었다. 물론 나도 킹콩이 떨어질 때 슬프기는 했다. 그래도 뭐 그 정도로 슬픈 건 아니었다. 난 그가 뭔가 우울한 일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최대한 다정한 목소리를 내며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A는 예상 외의 답변을 했다.
“나는 저런 영화가 너무 싫어. 그럼 킹콩한테 밟혀 죽은 사람들은? 주인공 하나 살면 그만이야?”
그때는 뭐 이렇게나 감성적인 애가 다 있나 싶었다. 실제 상황도 아니고 영화 속에 나오는 여자 1, 남자 1 같은 사람들의 삶까지 생각하다니. 근데 A의 말을 듣고 난 뒤로는 사람이 떼로 죽는 영화를 볼 때마다 신경이 쓰였다. 생각해 보면 영화 <괴물>에서도 그랬다. 한강에 놀러 갔던 그 많은 커플과 가족이 한 순간에 목숨을 잃지 않았나. <부산행>에서는 단지 KTX에 탔다는 이유만으로 또 얼마나 많은 이가 죽었던가. 주인공 몇 명만 좀비가 되지 않은 것이 과연 해피엔딩인가.
나이가 들며 조연의 삶이 신경 쓰이기 시작한 건 나는 주인공이 아니기 때문이다.
누가 내 삶을 조명해 영화나 드라마로 만들어 줄 리도 없거니와, 대대손손 이름을 남기는 건 고사하고 후손들에게 과오나 안 남기면 다행인 삶이다. 대다수의 사람은 저기 어디 귀퉁이에서 어쩌다 태어나 어찌 저찌 살다가 나이가 들면 죽을 뿐이다. 한국 소설의 전형적 인물처럼 대단한 이상을 꿈꾸지도 않는다. 예를 들자면, 나는 대단한 이상을 가진 주인공 옆을 스쳐 지나간 보행자 1 에 불과하다.
정세랑은 <피프티 피플>에서 주인공이 아니었던 사람을 주인공으로 만든다. 작가는 보행자 1에게 이름을 붙여 그들의 삶을 보여준다. 초등학교 아이들, 외국인, 노인 등 남녀노소, 국적, 성 정체성을 불문하고 나오는 인물은 모두 이름을 가진 채 각자의 챕터에서 서사를 이끌어 간다. 행복하기만 한 사람도 있고, 자꾸만 눈물이 나게 하는 사람도 있다. 건강한 사람도 있지만 아픈 사람도 있고, 살 날이 창창한 이들도 있지만 죽은 사람도 있다.
승희와 윤나와 환익의 이야기
의사 “이기윤”이 있는 응급의학과에 “270도로 목이 잘린 여자”가 실려온다. 이기윤에게는 “끔찍한 사건”의 환자 1에 불과하지만, 그의 이름은 “승희”였다. 승희는 베이글 가게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던 열여덟 살 여고생이었다. 엄마의 이름은 “조양선”이고, 집에는 빚이 많았으며 엄마와 아빠는 이혼을 했다. 승희는 “아빠를, 엄마를, 그 아빠 엄마에게서 난 자신을, 이사할 때마다 좁아지고 더러워지는 집을, 멀어지는 학교를, 줄어드는 용돈을” 지긋지긋해했다.
어느 날, 승희 집에 “어떤 남자”가 들어왔다. 남자는 “승희에게 고함을 질러댔”다. 남자는 “이혼하고 올 테니 제발 헤어지지 말아달라고 매달리듯 윽박질렀다”. 승희는 “제법 단호하게 거절하는 말들을 했”고, 남자는 전에 살던 사람이 두고 갔던 칼을 집어 들었다. 양선이 버리지 않고 그냥 그대로 둔 “쇠로 된 빵 칼”로 “승희의 목을 그었”다. 승희의 사건은 끔찍하지만 기사화될 만큼은 아니었다. 승희의 죽음은 “누락되고 얼버무려지고 생략”되었다.
시를 쓰고 강의도 하는 “배윤나”는 승희가 일하던 베이글 가게에 가는 걸 좋아했다. 윤나는 승희 몰래 승희를 귀여워했다. 윤나는 어쩌다 “씽크홀”에 빠져 입원했고 한동안 베이글 가게에 가지 못 했다. 퇴원하고 난 뒤에 갔을 때는 승희가 없었다. 뒤늦게 승희가 “살해”당했다는 소문을 들었다. 윤나는 승희의 이름을 몰랐지만, “세상에서 제일 우울해 보이는 토끼”가 그려진 맨투맨을 입고 있던 그 열여덟살짜리를 누가 죽였다는 사실에 “또 공황 발작”이 왔다.
윤나가 입원한 사이 윤나에게 강의 자리를 주었던 “찬주 선배”에게 우편물이 와 있었다. 윤나는 “찬주 선배”와 만나게 되었고, 학과 통폐합 얘기를 듣게 된다. “문예창작과뿐 아니라 예술대와 인문대의 십수개 학과가 통폐합되었”고, 학교 애들은 농성을 하고 있었다. 학교는 “정수기를 다 떼가고”, 저녁이 되면 전기도 끊어버렸다. 찬주 선배와 함께 농성 천막에 간 윤나는 한 남학생 곁에 앉게 된다.
우린 이미 졌어요.
윤나는 그런 말을 들었다. 윤나는 그를 알고 있었다. 그의 이름은 “한규익”이었고, “좋은 시를, 좋지만 꽤나 괴로운 이미지들이 담긴 시를 쓰는 학생”이었다. 남학생은 “노끈 뭉치를 뒤져”, “커터 칼”을 가져갔다. 규익은 그 커터 칼로 자신의 손목을 깊게 그었다. “벽돌 위로 피가 뿌려졌”고, 윤나는 울고 있었지만 다시 발작하지 않기 위해 애를 썼다. 윤나는 “막 구급차에 실리는 규익에게 다가가 말”한다.
너는 달라, 너는 필요해.
작가 자신의 말처럼 <피프티 피플>은 “주인공이 없”거나 “모두가 주인공”인 소설이다. “맨날 똑같은 옷 입는 애”라고 놀림 받는 초등학생 “정다운”도 나오고, “너 게이냐?”라는 질문을 받는 “박이삭”도 나온다. “정리를 좋아”해서 청결하게 집을 유지하지만 남편한테 “맨날 집구석에나 박혀 있”다고 구박을 받는 “공운영”도 있고, 일자리를 잃을까 쉬는 날도 없이 일하는 66세의 시체 이송 기사 “하계범”도 있다.
이름 붙이기
이런 말을 들은 적이 있다. 혹 길에서 나쁜 일을 당해 도움을 요청하고자 할 때, “도와주세요!”가 아니라 “땡땡 세탁소 사장님, 땡땡 카페 사장님 도와주세요!”라고 도움을 요청해야 한다고 말이다. 내가 다녔던 교회는 예배 시간이 끝날 때 헌금 낸 사람의 이름을 불렀다. 대체 왜 이름을 말하나 싶었다. 몇 주 있다 그 이름 읊는 시간이 없어졌는데 얼마 안 가 다시 이름을 부르기 시작했다. 이름을 부르지 않으니 헌금이 걷히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름을 붙이고, 부르는 행위는 중요하다. ‘야’, ‘거기’, ‘저기’ 같은 호칭이 아니라 이름을 부여해 호명하는 건 한 사람으로 인정한다는 의미가 되기도 한다. 일본의 카프카로도 불리는 아베 고보의 <S.카르마씨의 범죄>라는 이야기에는 이름을 잃어버린 남자가 나온다. 주인공 S. 카르마는 어디에서나 ‘이름이 뭐냐’는 질문을 받지만, 이름을 몰라 답하지 못 하고 사회에서 배제된다. 아무 여자나 ‘미스리’로 부르는 게 가능했던 건 여자를 사람 취급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명명되지 않고 호명되지 않는다는 건 많은 경우 소외와 외면을 의미한다.
전 세계인들이 파도에 밀려온 시리아 난민 아이의 주검에 격분했던 건 이름이 알려졌기 때문이기도 하다. ‘난민 1’, ‘아이 1’로는 느껴지지 않았던 난민 문제의 심각성은 ‘에이란 쿠르디’라는 이름과 그의 삶이 알려지면서 비로소 주목 받았다. 주체를 타자로 만드는 건 사람이지만, 타자인 ‘그’를 주체로 만드는 것 또한 사람의 몫이다. 타자의 이름을 부르고, 그들의 서사에 귀 기울일 때 우리는 모두 주인공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