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포에서 온 편지 2. 텅 빈 자유

생각하다독립주거

목포에서 온 편지 2. 텅 빈 자유

황달수

일러스트레이션 : 이민

잘 지냈지? 날씨가 꽤 춥다. 추우니까 목포에 처음 온 초여름 날 이야기를 해줄께.

2017년 5월 13일은 드디어 혈연도 지연도 없는 목포로 내려온 날이야. 어떤 나라든 독립기념일을 크게 기뻐하고 매년 기념하듯 나에게도 큰 의미가 있는 기념일이라 내 생일을 빼고 유일하게 - 미안, 사실 네 생일도 카카오톡이나 페이스북이 알려주지 않으면 기억을 못하는 나를 용서해 - 내가 기억하고 기념하는 날이지.

목포로 오는 게 물 흐르듯 순탄하진 않았어. 난 아르바이트나 인턴으로 번 돈을 정신과 상담이나 내 ‘기분'을 채우는 경험과 물건들 혹은 ‘시발비용'으로 소비했기 때문에 모아둔 돈이 거의 없었어. 특히 난 먹을 것에 돈 쓰는데 환장했잖아. 무슨 먹방 찍는 것 마냥. 우리 약속 잡을 때 훠궈데이 엽떡데이도 맨날 있었고, 자취하는 친구 집 가서 성인돼지파티도 하면서 웃기도 많이 웃었는데. 그립다 그 시절. 이제는 위랑 장 다 망가져서 옛날처럼 못먹는거 알지? 슬프다 이 나이. 그리고 기독교 85% 유교 15% 탈무드 5% 도합 105%로 구성 된 우리 엄마아빤 내가 겪고 있는 우울증에 대해서 이해하지 못했지. 의식주 다 부족하지 않게 채워주는데 얘는 왜 이러나. 더 힘들게 사는 사람들도 있는데 너는 왜 이렇게 노력과 의지가 없니! 라며 잔소리를 늘어놓았으니까.

정말 살러 간다고

고작 여행만 두 번 다녀온 목포로 살러 간다는 내 결정에 처음엔 농담인 줄 알고 ‘그래 가서 살아봐~ 독립이 쉬운줄 알아 참!’ 하던 부모님은 내가 진심인 걸 알게 된 후엔 꽤 오래 이 결정을 반대하다가 ‘그래 너 하고 싶은 대로 다 해봐!’ 라며 8개월만에 목포행을 허락했어. 마지막까지 엄마는 엄마 고향인 강릉엔 내가 좋아하는 바다도 있고 서울과도 가까우니 거기서 살라고 설득 하시다가 ‘강릉엔 이모들이 있지 않느냐! 혈연도 지연도 없어서 목포에 간다!’는 내 말에 결국은 포기하셨지 뭐. 대신 [모든 것은 내가 알아서 하고 모든 책임도 내가 질 것]이라는 옵션이 붙었지만 말이야. 사실 가족들은 내가 서울에 곧 도로 올라올 거라고 생각했을 거야. ‘아무도 모르는 곳에서 혼자 사는 게 너무 춥고 힘들어요, 엄마아빠랑 살면서 정신차리고 취직도 하고 결혼도 할게요!’하고 항복할 줄 알았으니까 허락했을거야. 심지어 10년 동안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내 용돈 내가 벌어 썼으니 나도 좀 용돈 받아보자는 말도 안되는 주장까지 받아들여졌기에 목포에서 일을 구하기 전 까지 생활비 명목으로 엄마아빠에게 용돈으로 한 달에 25만원을 받기로 했어. 일주일에 25만원을 쓴 적은 있어도 한 달에 25만원이란 액수는 너무 짜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별 수 있나.

목포에서 살 집을 구하는 건 사실 생각보다 어렵지 않았어. 처음 목포 부동산 앱이니 네이버 부동산이니 보는데 진짜 하나도 모르겠는 거야. 어디에 뭐가 있고, 어떤 동네가 안전한지, 아니면 조용한지 전혀 감이 안 잡히더라고. 유일하게 있는 목포 친구인 A가 알려줘도 더 알쏭달쏭한거야. 심지어 부동산 앱에는 매물도 없었어. 다 내 예산보다 더 비싸고.. 집을 구하려고 하니까 상상의 동물 같던 독립이 현실이 되자마자 서서히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내는 것 같더라고. 과연 내가 혼자 살 수 있을까? 서울 집에서 마음은 불편해도 몸이라도 편하게 살까? 지금이라도 그냥 목포 안 간다고 말할까? 같은 수많은 고민을 했어. 그렇지만 여자대장부가 한 번 내 뱉은 말에는 책임을 져야 하지 않겠어? 내가 돈은 없어도 가오가 있지. 일단 목포로 하루 내려가서 발품을 팔기로 했어. A가 목포는 발품을 팔아야 매물을 구할 수 있다는 현지인 팁을 주었으니까.

일러스트 이민


내 집

꽤 쌀쌀한 4월에 기차를 타고 목포에 도착했어. 서울에서 고작 2시간 반 기차를 타고 왔을 뿐인데 서울과 정반대인 도시. 연세대 입구 버스정류장 인파 정도의 사람들을 헤치고 A를 만나 목포역 부근을 부지런히 돌아다녔어. 내 공간을 구한다는 생각을 하니 즐겁더라고. [임대문의] 혹은 [월세] [사글세] 라고 붙어있는 종이에 적힌 전화번호로 전화를 하면서 “여보세요? 안녕하세요, 임대하신다는 벽보 보고 전화드렸는데요.” 라는 내 목소리가 너무 서울사람이라며 대신 전화해주던 A 덕분에 화끈한 가격에 적절한 위치의 집 후보가 두 곳으로 추려졌어. 집 알아볼 때 체크해야 할 리스트와 A의 현지인 팁, 그리고 동네의 분위기를 따져 본 뒤 결정한 곳은 해가 잘 드는 큰 창이 있는 안방과, 하늘이 그림처럼 보이는 작은 창이 있는 작은방, 주방 및 거실, 화장실, 옥상이 있는 18평 남짓 되는 집이었어. 내가 태어나서 처음으로 갖게 된 양지 바르고 넉넉한 크기와 구역이 나뉜 공간. 발품을 딱 하루 팔았는데, 찾아냈지.

난 여전히 이 곳에 살고 있어. 수압이 낮아서 온수로 샤워를 하려고 하면 지하 암반수를 누군가가 열심히 펌프질을 해서 그 물을 보글보글 끓인 뒤 그제서야 우리집으로 귀하게 온수가 와주신다고 상상하며 샤워를 하고, 겨울엔 외풍이 심해 미친듯이 추워도 기름보일러라 난방을 할 경제적 여유가 없어 침대에 따수미 텐트를 치고 전기담요 고온에 파쉬 물주머니를 껴안고 살아야 해도 마음이 복잡하고 불편한 것 보다는 나아. 다행히 집주인 부부는 인상도 좋고 욕심도 없으셔서 보증금 없이 월세 25만원이라는 말도안되는 가격으로 살게 되었어. 물론 공과금은 별도지만 말야. 집을 구하고 나니 ‘나, 목포에 가서도 잘 살겠는데 정말?’하는 근거 없는 자신감이 붙었어.

풍요롭지 않아도
텅 빈 자유의 맛

짐이 생각보다 많지 않아 아버지 승용차에 자질구레하고 필요한 짐들만 가지고 내려오기로 했어. 모아둔 돈도 없으니 제일 저렴하고 쉽게 이사를 할 수 있는 방법이기도 했고. 해도 안 뜬 새벽에 바지런히 서울에서 목포로 달려가는 차 안은 내 짐들로 가득 차 비좁고 답답했어. 서울의 고민들과 걱정거리를 가지고 가는 기분이었지 뭐. 무거운 두 다리로 뒤에서 차가 오지 않나 앞에 사람이랑 부딪히지 말아야지 신경쓰며 걷던 집 앞 골목, 사람들로 가득 차 내리는 문으로 타야 하던 버스로 가던 도로, 좋아하던 길고양이가 있던 언덕, 맛있는 빵을 파는 빵집 등 좋고 싫은 추억이 뒤덮힌 서울을 떠났어. ‘아빠차'에 타면 들어야하는 성가대 찬송가 음악과 목사님의 설교말씀을 귓등으로 들으면서.

햇빛이 화창한 2017년 5월 13일, 드디어 도착한 목포의 내 집 - 내 집이라니 정말 듣기 좋지 않아?- 에 엄마아빠는 오늘 안에 보성 차 밭을 구경하고 가야한다며 짐을 집으로 옮겨주시고, 대형마트에서 간단한 생필품을 사 주신 뒤에 부랴부랴 목포 구경도 안하시고 떠나셨어. 참 우리 엄마아빠답게.

침대도, 식탁도 없는 종이 박스만 가득 한 독립은 드라마나 영화처럼 풍요롭지 않았지만 즐거웠어. 먼지가 내려앉은 창 틀을 닦고, 오랫동안 비워져 있었던 바닥을 쓸고, 종이 박스를 뜯고, ‘혼자살이'를 축하해주러 온 A와 함께 이케아에서 주문 한 것 들을 조립하고, A와 근처 식당에서 밥을 먹고, 헤어진 후 들어온 집은 텅 비어있어서 좋았어.

그저 텅 비어있어서.

나는 이 텅 비어있는 공간이 필요해서 목포에 내려왔을지도 몰라.

마음이든 공간이든 텅 비어있을 땐 좋아하는 음악을 들으면서 좋아하는 술을 마셔줘. 늘 가득 찰 필요는 없잖아. ‘텅 빈 자유'의 맛이 궁금하면 이렇게 해서 먹어봐. 달콤하면서도 쌉싸름한 맛이지.

다음에는 가게를 열게 된 이야기를 해 줄께! 그 때 까지 건강하게 잘 지내. 안녕.

텅 빈 자유의 맛, 베지밀B와 제임슨 위스키

일러스트 이민


재료

베지밀B

제임슨 위스키

 

  1. 여름에는 시원한 냉장고에서 갓 꺼낸 팩에 든 베지밀B를, 겨울에는 따뜻한 온장고에서 갓 꺼낸 유리병에 든 베지밀B를 편의점에서 구입한다. (단 맛을 선호하지 않을 경우엔 매일 두유를 추천합니다.)
  2. 주류 코너에 있는 포켓 사이즈 제임슨 위스키를 편의점이나 마트에서 구입한다.
  3. 텅 빈 공간에서 (텅 빈 공간이 없다면) 텅 빈 마음가짐으로 베지밀을 한 입 마시고 곧바로 제임슨 위스키를 한 입 마신다. 제임슨 위스키를 먼져 마셔도, 둘을 원하는 비율로 섞어 마셔도 좋다. 씹지 않아도 좋은 ‘텅 빈 자유의 맛'!
황달수님의 글은 어땠나요?
1점2점3점4점5점
SERIES

목포에서 온 편지

독립에 관한 다른 콘텐츠

주거에 관한 다른 콘텐츠

콘텐츠 더 보기

더 보기

타래를 시작하세요

여자가 쓴다. 오직 여자만 쓴다. 오직 여성을 위한 글쓰기 플랫폼

타래 시작하기오늘 하루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