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FE

‘생물학적 여성’이라는 제한

일러스트레이션: 솜솜

2018년 5월부터 네 차례에 걸쳐 ‘불법촬영 편파수사 규탄시위’가 열렸다. 이제까지 불법촬영의 피해를 입은 ‘여성’이 경찰에 고소를 하면 피해자가 경찰의 비난을 듣거나 가해자를 잡을 수 없다는 말만 반복해서 들었다. 그런데 ‘남성’이 피해자가 되고 ‘여성’이 가해자로 지목되자 경찰은 매우 신속하게 가해자를 체포했고, 규탄시위는 바로 이런 행태를 문제 삼았다. 지금까지 불법촬영 사건을 제대로 수사하지 않은 경찰과 검찰, 재판부 등을 규탄하며 제대로 된 절차와 처벌을 요구했다.

그런데 이 시위는 시위가 의도하는 목적과 다른 측면에서 논란이 발생했다. 이 시위 참가자의 자격을 “본 시위는 생물학적 여성만 시위참여 가능합니다”라는 문구 때문이다. 이 문구는 트랜스젠더퀴어를 명백하게 배제한다는 점에서 트랜스 정치학을 지지하는 이들에게 많은 비판의 대상이 되었지만, 시위 주최측은 참가자의 안전과 ‘남성에 의한 불법촬영 사전 근절’을 이유로 이 문구를 고수하고 있다.

"생물학적 여성만 시위참여 가능합니다"

나는 이 문구와 관련한 논란을 접하며 복잡한 기분이 들었다.

나는 불법촬영 편파수사 규탄시위를 지지한다. 디지털성범죄와 같은 불법촬영물을 둘러싼 사건이 발생할 때 피해자의 주변 사람 및 경찰(나아가 전체 사회)은 기존의 규범을 반복하는 것이 아니라 기존의 규범을 문제 삼는 방식으로 대응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즉 피해자를 비난하고 범죄를 음란물로 여기는 것이 아니라 가해자와 영상을 공유한 이들, 그리고 이러한 행태를 그럴 수도 있다고 여기는 사회 전반의 규범적 분위기를 문제 삼는 태도, 즉 제대로 된 수사 절차를 진행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다.

경찰의 제대로 된 수사 절차 요구가 매우 중요한 이유는 이것이 단순히 ‘남성’과 ‘여성’의 문제가 아니라 성소수자와도 긴밀하게 얽혀 있기 때문이다. 만약 불법촬영물의 피해자가 퀴어일 때 그는 경찰에 신고할 수 있을까?

반퀴어 집단에 의하면 퀴어는 음란하고 문란해서 아동에게 매우 위험하고 한국 사회를 위협하는 존재다. 퀴어를 문란한 존재라고 비난하는 태도는 한국 사회 전반의 분위기에 기반한다. 한국은 성폭력, 데이트폭력, 가정폭력 등이 일상에 만연하지만 언제나 그것을 사적인 문제로 취급하고 공공이 개입할 의제가 아니라고 판단한다. (아내폭력을 신고하면 경찰은 ‘부부 사이에서 잘 해결하세요’라고 대응하는 식이다).

게다가 퀴어의 성적 실천은 더욱 금기시된다. 이성애 성관계는 누가 가르치지 않아도 당연히 알 수 있는 본능적 실천으로 여기지만 퀴어 성관계(모든 퀴어가 성적 실천에 끌리지는 않는다)는 그 자체로 문란하고 소름끼치는 사건으로 인식되기 때문이다.

이런 분위기에서 성소수자가 불법촬영의 피해자일 때 신고할 수 있을까? 성소수자가 자신의 피해사실을 경찰에게 신고하려면 자신의 피해를 설명해야 하는 동시에 자신이 퀴어라는 사실도 함께 말해야 한다. 이럴 때 경찰은 피해에 집중할까, 신고자가 퀴어라는 사실에 집중할까? 10년 전 한 트랜스젠더가 경찰서에 갈 일이 있었다. 그러자 그 건물에 있는 모든 경찰이 트랜스젠더를 구경하러 왔었다고 한다. 제대로 된 수사 절차는 ‘여성’만이 아니라 퀴어 등 매우 많은 사람에게 필요한 일이다.

익숙한 질문으로 변주해보자. 여성이라고 해서 모두 같은 상황에 처할까? 여성은 개개인의 경험/역사에 따라 경찰서나 다른 많은 상황에서 훨씬 복잡한 편견을 야기한다. 레즈비언이거나 바이섹슈얼 혹은 판섹슈얼 여성일 때, 성판매 경험이 있거나 현재 성판매/성노동을 하고 있을 때, 이주여성일 때, 장애여성일 때 이들 여성은 복잡하고 때로는 매우 다른 사회적 환경에 직면한다. 여성의 경험은 동일하지 않고, 동일할 수 없는데도 여성의 경험을 동일하고 단일한 것으로 만드는 것이 바로 가부장제가 여성을 통제하는 방식이다.

동일하지 않은 것을 동일하게 만들기

나는 ‘불법촬영 편파수사 규탄시위'의 기본 목적에 동의하고, 그 목적이 다른 많은 사람에게 이로울 수 있기에 참가자를 ‘생물학적 여성’으로 제한한 일이 더욱 아쉬웠다. 불법촬영만이 아니라 편파수사는 다양한 사건에서 만연하기에 이를 문제 삼고, 규범적 실천(관행)을 바꾸는 작업은 많은 사람에게 중요하다.

‘생물학적 여성’은 여성 범주를 단일한 것으로 만드는 방식임에도, 시위 주최측은 생물학적 여성이라는 참가 자격이 참가자의 안전을 위한 것이라고 말했다. 동시에 규탄시위의 지지자 일부는 이 시위에 다양한 범주의 여성이 참가했고 “생물학적 여성인 트랜스남성이나 레즈비언도 참가”했기에 성소수자를 배제하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시위 참가자의 안전을 보장하고, 조금이라도 편안하게 행사에 참가할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드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다. 하지만 이 안전을 어떤 식으로 상상하고 만들 것인가는 또 다른 문제다. 

일러스트레이션 솜솜

시위에 실제 참가했으며 불법촬영과 편파수사의 실질적 피해자가 될 수 있고, 사람(의 젠더)은 생물학적으로 태어난다/결정된다는 ‘생물학적 여성’이라는 상상력에 따르면 ‘여성’으로 분류될 트랜스남성이 후기를 남긴 일이 있었다.이에 많은 사람이 트랜스가 이 시위에 참가했다는 사실 자체를 불쾌하게 여기며 트랜스 혐오 발화를 쏟아냈다. 생물학적 여성이라는 언설은 실제 어떻게 쓰이는가? 균질한 집단은 안전을 보장하는가? 생물학적 여성이라는 상상력은 여성의 안전을 보장할까? 또한, 안전이라는 감각은 어떻게 구성되는가? 안전과 혐오는 서로 어떤 방식으로 연결되는가? 안전을 위해 사용한 문구 ‘생물학적 여성’은 여러 복잡한 고민과 질문을 던진다.

나의 고민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시위 참가 조건인 ‘생물학적 여성’은 정확하게 무슨 의미일까? 어떤 조건을 갖추면 생물학적 여성일까? 일전에 페미니스트 예술활동을 하겠다는 팀이 새로운 구성원을 모집하는 광고를 낸 적이 있다. 광고에는 자격조건으로 ‘염색체 XX’가 적혀 있었다. 이른바 성염색체라고 가정하는 XX가 생물학적 여성의 조건일까? 그렇다면 간단하지만 중요한 질문. 이 글을 읽는 사람 중 자신의 염색체를 정확하게 알고 있는 사람은 몇 명이나 될까? 어떤 질병이나 다른 어떤 이유로 염색체 검사를 따로 받지 않은 이상, 대부분의 사람은 자신의 염색체를 모른다. 혹여 자신의 염색체는 알아도 내 친구나 이웃의 염색체는 모른다. 그럼 자신이 ‘생물학적 여성’이라는 점을 어떻게 확신할까? 내 옆에 있는 여성이 ‘생물학적 여성’이라는 점은 어떻게 확신할까? 물학적 여성이라는 환상은, 사람들이 자신의 염색체를 모르고 있으며 알 필요도 없다고 느끼는 그 지점에서 ‘사실’이 된다. 확인하고 탐문하고 의심해야 할 사항을 자연스럽고 당연한 것으로 인식하는 태도가 생물학적 본질주의를 자연질서로 만든다.

불법촬영 편파수사 규탄시위는 다양한 논란을 일으켰고 그 중 어떤 것은 불법촬영을 정당화하려는 의도에서 비롯됐다. 하지만 생물학적 여성이라는 참여 자격을 둘러싼 논쟁은 단순히 누군가를 배제하려 해서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다. 누군가를 배제하는 정책은 확장성이 높고 중요한 의제를 ‘생물학적 여성’이라는 허구적 범주로 제한하기에 문제가 된다. 이런 측면에서 의제의 확장성을 이해하고 이를 통해 연대를 만들고, 연대를 통해 페미니즘을 확장시키는 작업이 페미니즘의 역사이자 현재라는 점을 인식하는 것은 중요하다.

2018.09.06 15:28 발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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