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년 후반 즈음이었을까? 친구들의 싸이월드에 알록달록한 파스텔 톤의 부드러운 곡선의 디자인을 가진 스쿠터*1가 올라오기 시작했다. 그 밑에는 항상 ‘퍼가요~♡’란 댓글이 달리곤 했다. 2007년부터는 본격적으로 도로 위에서도 스쿠터를 정말 쉽게 볼 수 있었다. 이런 스타일의 스쿠터들을 ‘클래식 스쿠터’라고 불렀다. 엄마가 처음 사왔던 바이크도 바로 이런 스쿠터였다.
엄밀히 말하면 이런 디자인의 바이크들은 클래식 스쿠터라기 보다는 패션 스쿠터나, 아니면 그 밖의 다른 이름을 붙여야 한다. 고전이란 뜻을 가진 ‘클래식’이라는 단어는 본래 오래되었거나, 혹은 전통적인 것을 계승하는 것들에 붙여지기 마련이니까. 하지만 클래식 스쿠터라고 구분되는 모델들 중에는 실제로 오래된 것들은 거의 없다. 게다가 아예 오래된 바이크들의 경우, 우리나라에서는 아예 올드, 혹은 빈티지 라는 단어로 불린다. 심지어 구글에 'Classic Scooter'라고 검색해 보면 로마의 휴일에서 나온 오래된 스쿠터만 잔뜩 나온다.
대명사, 베스파
그렇다면 클래식 스쿠터가 도대체 뭘까? 바이크에 관심이 없던 사람들이라면 슬슬 혼란스러울 수 있다.
우리나라에서 말하는 ‘클래식 스쿠터’는 제일 처음 잠깐 설명한 것 처럼, 컬러풀하고 곡선 위주의 디자인을 가진 스쿠터들을 말한다. 나도 정확히는 모르지만, 이 이름의 처음을 찾아가다 보면 아마 ‘베스파’가 나올 것이다.
베스파는 로마의 휴일에서 오드리 햅번이 타고 나오던 바로 그 바이크다. 이탈리아어로 말벌이란 뜻이고, 제 2차 세계대전 직후 이탈리아의 운수 산업, 특히 항공기 산업에 제한이 걸리자 대중 교통 수단이 필요해져 개발하게 되었다. 베스파는 세계적으로 공전의 히트를 치게 되었고, 심지어는 우리나라에서도 기술제휴가 맺어져 직접 생산이 되기도 했다.
이 시기, 일본에서도 마찬가지로 제 2차 세계대전을 이유로 항공기 생산에 제한이 걸렸고, 베스파와 정확히 같은 이유로 작은 바이크를 생산하게 되었다. 이후 시간이 흘러가면서 곡선 위주의 바이크들은 공기역학을 고려한 미래지향적인 디자인으로 점차 변화되어 갔다. 스쿠터 디자인의 주류를 차지하던 이 클래식한 느낌도 점차 스포티하게 바뀌어갔지만, 일본에서는 이 클래식한 디자인에 귀여움 한 스푼 더 첨가해 낮은 배기량의 스쿠터들을 개발하기 시작했다.
메이드 인 차이나
하지만 2000년대 중후반 당시, 클래식 스쿠터의 붐을 이끌어 냈던 것은 원조격인 이탈리안제도, 귀여움으로 승부한 일본제도 아닌 중국제 스쿠터들이었다.
방패같은 앞모습에 동그란 헤드라이트를 달고, 화살촉 같은 꼬리를 가진 낮고 작은 중국산 스쿠터는 혼다에서 만든 100cc 짜리의 ‘조커’가 그 원형이라고 할 수 있다. 어쩐 일인지 중국 시장의 눈에 들어 엄청난 기세로 카피 제품들이 만들어졌고, 이름 그대로 클래식 스쿠터 계의 조커가 되어 버렸다.
국내에 수입된 중국제 스쿠터는 모두 똑같은 디자인을 가졌지만 그 이름도, 생산 회사도 제각기 달랐다. KMTA의 ‘쥬드’, HSRC의 ‘겔랑’, 유니스타의 ‘갤럽’, 그리고 브랜드를 찾기도 힘든 ‘쥬디’, ‘자바라’, ‘투부즈’….
원본을 카피한 모델을 카피한 모델에 그걸 또 카피한 모델까지. 일본제 그대로의 멋진 디자인에 중국제 특유의 어마어마하게 싼 가격까지 갖춘 이 스쿠터가 국내에 ‘클래식 스쿠터’란 이름으로 수입되기 시작한 것이다. 멋있고 싶지만 예산은 겸손한 사람들이 사기 시작했다.
엄마도 그 사람들 중 하나였다. 엄마가 사가지고 온 스쿠터는 겔랑이었고, 바이크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던 시절의 내 눈에도 그 스쿠터는 너무 멋져 보였다. 나는 이 멋진 나의(것은 아니었지만) 스쿠터를 자랑하고 싶어서 사진을 찍어 인터넷 동호회에 올리기도 했었다.
하지만 그 때는 몰랐지. 당시 바이크 동호회들 사이에서 이 중국산 스쿠터들은 바이크 취급도 못받고 있던 걸.
그 즈음, 바이크 동호회들 사이에서는 이 중국산 스쿠터들의 단점과 문제점들이 널리 퍼지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중국산 바이크를 타고 있는 사람들이 쓴 고장에 관한 글이 인터넷에 하루에도 몇 건이나 올라왔다.
고장의 대부분이 보통의 바이크에선 일어나기도 힘든 정도의 노답 상황이었다. 한동안 인터넷을 달구었던 앞바퀴가 떨어져 꺾인 스쿠터나, 엄청난 소음의 스쿠터, 도로 위에서 갑자기 불이 붙어 전소되었다는 스쿠터가 모두 중국산 클래식 스쿠터들이 만들어낸 전설 같은 현실이었다. 결국 공중파 뉴스까지 보도할 정도로 문제가 불거지자, 오래 지나지 않아 이들은 전설처럼 자취를 감추었다.
메이드 인 재팬
하지만 중국산 스쿠터들만이 클래식 스쿠터는 아니었다. 아까 언급했듯이, 낮은 배기량의 작고 귀여운 일제 스쿠터들도 마찬가지로 클래식 스쿠터라는 이름으로 검색되고 팔리고 있었으니까.
혼다의 ‘줌머’와 ‘쥴리오’, 야마하 ‘비노’.... 바이크에 관심없는 사람들도 어쩌면 한 번 쯤은 그 이름을 들어봤을 수도 있는 50cc 클래식 스쿠터를 대표하던 모델들이다. 특히 ‘줌머’와 ‘비노’의 인기는 정말 대단했다. 싸이월드 속 얼짱들의 사진첩에서 종종 보이던 그 모델들이다.
일제 클래식 스쿠터들은 50cc 작은 것들이 특히 인기였다. 물론 이 배기량의 모델들이 훨씬 더 독특한 디자인을 가지고 있기 때문도 있었지만 그보다는 더 근본적인 이유가 있었다. 당시 50cc 스쿠터들은 자동차와 원동기 장치 자전거(법적으로 125cc 미만의 바이크들은 우리나라에서 ‘원동기 장치 자전거’로 취급된다)들에게 의무적으로 적용되는 ‘등록제’에서 조금 비껴나 있었다.
바이크들은 대체로 50cc, 100cc 혹은 110cc, 그리고 125cc, 그리고 225, 250cc, 300cc 등으로 배기량이 나뉜다. 모든 바이크들은 의무적으로 등록하여 번호판을 달아야 하지만, 50cc만큼은 그런 의무가 전혀 없었다. 등록을 할 수는 있었지만 의무가 아니니, 굳이 내 돈 내면서 등록하려는 사람이 있을 리가 만무했다. 50cc 스쿠터는 자전거 대용으로 쉽게 사서 쉽게 타고 다닐 수 있었다. 일제 50cc 스쿠터는 중국산 스쿠터에 데였거나, 새롭게 스쿠터에 입문하고 싶은 사람들에게 대안으로 여겨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중국산 스쿠터들과 마찬가지로 일제 50cc 스쿠터들 역시 지금은 도로 위에서 찾기 힘들다. 모델들 자체가 일본 현지에서 단종이 되기도 했지만, 2012년부터 50cc 바이크들 역시 의무 등록제가 시행된 탓이 컸다. 가장 큰 메리트가 사라진 것이다. 등록을 안 해도 된다는 장점이 사라지자 50cc 스쿠터는 엄청 느리기만하고 뒤에 사람 한 명 더 태울 수도 없는 조그만한 스쿠터라는 단점만 남게 되었다.
다시, '클래식' 스쿠터
이제 클래식 스쿠터라는 단어의 뜻은 다시 또 바뀌었다. 지금은 오랜 전통을 가진 원래 디자인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하여 생산되고 있는 스쿠터를 부르는 단어가 되었다. 두말하면 입아픈 ‘베스파’를 필두로, 푸조의 ‘장고’라는 스쿠터도 고전적인 디자인과 파스텔톤의 차체로 클래식 스쿠터를 자처한다.
클래식 스쿠터, 혹은 패션 스쿠터들은 어느 시기에나 라이더 양성에 지대한 공헌을 해왔다. 많은 사람들이 ‘쥬드’와 ‘겔랑’으로 입문했고, ‘비노’와 ‘줌머’를 보고 바이크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 것처럼,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베스파’를 통해 바이크에 입문하고 있다.
바이크는 타고 싶지만 아직 부담스럽다면, ‘클래식 스쿠터’로 바이크 라이프를 시작해 보면 어떨까? 독보적인 디자인으로 그 어느 곳을 달려도 풍경과 어우러지고, 안장의 높이가 낮고, 무게 중심도 낮게 잡혀 있어서 다루기도 쉬운 편이다. 대단치 않아 보이는 이 작은 스쿠터들도 바이크의 즐거움을 충분히 알려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