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크를 탄다면
대부분 빠져들
휘황찬란한 색으로 알록달록하게 스폰서 로고가 그려진 화려한 카울, 말 위의 기수처럼 온 몸을 웅크리고 있는 레이서, 모든 구성 요소가 오직 빨리 달리겠다는 목표로 만들어진 것 같은 바이크... 레이싱을 위한 프로토 타입 바이크들이 모여 지구상에서 가장 빠른 바이크와 가장 빠른 라이더를 겨루는 경기가 바로 모토GP다. 정식 명칭은 모토사이클 그랑프리(Grand Prix motorcycle racing)다. 모터사이클 로드레이스로는 가장 최상급 레이스. 레이스만을 위한 프로토 타입 머신이 출전하는 것도 오직 이 경기 뿐이다.
레이스는 날이 따뜻해 지기 시작하는 3월부터 추위가 시작되는 11월까지, 8개월 동안 전세계 곳곳에 있는 서킷에서 펼쳐진다. 국가별로 한 서킷에서만 경기가 치뤄지며, F1보다 돌발사고가 벌어지기 쉽기 때문에 서킷의 규격도 더욱 엄격하게 관리한다.
만약 당신이 스피드에 그닥 관심이 없고 바이크를 단지 멋진 스타일 때문에 탄다고 하더라도, 바이크 타는 것을 사랑하기만 한다면 일단 유투브에 올라와 있는 모토GP 하이라이트 영상을 확인해 보시길. 열에 여덟, 아홉 정도는 이 경기에 빠질 것이라고 장담한다.
시속 60km에 제한을 걸어 놓은 50cc 스쿠터를 타고 여유를 즐기는 사람이라도, 일단 바이크를 타고 있기만 하다면 스로틀을 감았을 때의 그 속도감을, 코너링의 그 짜릿함을 모를 수가 없다. 모토GP는 바로 그 정점에 있다. 바이크를 타는 사람이라면 눈을 떼지 못하고 그대로 빠져버리게 된다.
모토GP와 그 밖의 바이크 레이스의 중계를 티비로 보는 것은 그리 쉽지 않다. 일단 우리나라에서는 모토GP 뿐만이 아니라 바이크 자체가 비주류이기 때문에 이런 세계적인 경기가 일반적인 채널에서는 언급조차 되지 않는다. 실황중계를 보기 위해서는 ‘유로스포츠’ 같은 케이블 채널을 따로 유료 신청해야 한다. 하지만 유로스포츠는 정말 스포츠만 다루는 채널이라 스포츠 전반에 관심이 없다면 구매를 주저할 수 밖에 없다.
하지만 과거와는 달리, 최근에는 유투브 덕분에 최소한 매 경기의 하이라이트 부분은 짧은 클립으로 확인할 수 있게 되었다. 경기 자체를 모두 보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이런 영상들만으로도 레이스의 재미와 스릴을 느끼기에 부족하지 않다. 한 시간 가량 지속되는 경기에서 가장 재밌는 부분만을 볼 수 있으니, 차라리 더 재밌기도 하다.
라이더의 영웅은 레이서
라이더들에게 모토GP의 레이서들이란 영웅과 같다. 그가 타는 바이크, 그가 쓴 헬멧, 그리고 그의 바이크와 헬멧에 붙은 스폰서들의 스티커까지 모든 것을 따라하고 싶어하는 라이더들은 세계적으로 셀 수가 없을 정도다.
그래서 많은 바이크 브랜드들이 모토GP의 레이서를 후원한다. 일단 모토GP의 레이서, 특히 스타 선수에게 후원을 할 수 있게 되면 레이스가 진행되는 동안 계속 전세계의 라이더들에게 홍보를 할 수 있다. 그 어떤 커다란 광고보다도 훨씬 광고 효과가 높다. 특히 헬멧이나 글러브, 부츠 같은 경우는 라이더들이 지금 당장이라도 구입할 수 있는 품목들인 만큼 후원 경쟁이 치열하다.
우리나라 헬멧 브랜드인 HJC(한국인들은 ‘홍진’이라고 부른다) 역시 꾸준히 모토GP의 유망선수들에게 공식 스폰서쉽을 맺으며 협찬을 했다. 그러면서 레이서들에게 피드백을 받아 생산된 하이엔드 헬멧을 출시할 수 있게 되었는데, 덕분에 이전까지 HJC가 가지고 있던 ‘저렴한 가격의 보급형 헬멧’이라는 이미지를 벗어낼 수 있었다.
머신을 출전시키는 컨스트럭터*1 브랜드들은 그대로 전 세계의 라이더들에게 스피드와 기술에 대한 기술력을 인정받는다. 모든 제조사가 이 경기에 자신들의 바이크를 출전시키지는 못한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레이스를 위한 프로토타입 머신을 만드는 것은 기술이 있어도 자금이 없으면, 자금이 있어도 기술이 없으면 불가능하다. 때문에 모토GP에 계속 참전하고 있는 브랜드들은 아주 오랫동안 이 레이스에서 기술을 쌓아왔던 브랜드가 대부분이다. 새롭게 참전하고 싶다면 아무리 이름 있는 메이커라도 한 수 접고 기술을 배워와야 한다.
그래서 컨스트럭터들은 어렵게 개발한 머신에 태울 선수들을 까다롭게 고른다. 로드레이스에서부터 차근차근 기량을 쌓고, 양산차로 이뤄지는 크고 작은 경기들에 참전하거나, 모토GP의 하위 클래스를 달리면서 최대의 기량을 보여주는 선수들만이 수억을 호가하는 프로토 타입 머신 위에 앉을 수 있게 된다.
하지만 모토GP의 무대 위에서 달릴 수 있다고 해도 모두 스포트 라이트를 받을 수는 없다. 개중에도 정말 특출나게 뛰어난 기량과 스타성을 가진 레이서들만이 고유의 컬러를 갖거나 엔트리 넘버에 개성적인 디자인이 추가되면서 자신들의 이름과 얼굴을 알릴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되는 것이다.
가끔은 스타 선수들을 따라하려는 라이더들이 문제를 일으키기도 한다. 선수들이 입을 법한 가죽 라이딩 슈트와 최상급의 장비를 갖춘 라이더들이 레이싱 머신과 흡사하게 만들어진 레이싱 레플리카 모델을 타고 산 깊은 곳의 와인딩 도로*2를 찾아가 바이크를 기울이고 무릎을 내밀며 달리는 것이다.
서킷 위의 선수들이 무릎을 내밀고 가끔을 팔꿈치를 긁으며 바이크를 탈 수 있는 이유는 그만큼 코너가 크기 때문이고 그만큼 속도가 높기 때문이다. 실제로 공공도로에는 그정도로 큰 코너가 없고 그렇게 빨리 코너를 돌아나갈 수도 없다. 하지만 너무 많은 라이더들이 단지 무릎을 긁고 싶어서 욕심을 부린다.
그런 유명한 코너들에서는 으레 라이더들이 삼삼오오 모여서 깔끔하게 코너를 돌아나가는 바이크들을 구경하거나 사진을 찍거나 하는 경우가 많다. 그럼 그 코너를 달리는 라이더들은 호승심이 생겨 더더욱 무리하게 된다. 그렇게 조금 더, 조금 더 무리하다가 무릎에 달린 슬라이더를 멋지게 긁고 끝낸다면 좋은 일이지만, 가끔은 그대로 기울어져 낭떠러지로 바이크를 내던질 때가 있다. 혹은 정 반대로 바이크에게 사람이 내던져질 때도.
아니, 차라리 이렇게 내 바이크만 망가뜨리고 사고를 끝낼 수 있다면 다행이다. 최악의 경우 길 건너편 바이크들이 잔뜩 세워진 곳에 내 바이크가 미끄러져 가서 순식간에 전부를 볼링처럼 쳐버리고 나서야 멈추는 경우도 있다. 최악의 경우에는 마주 오던 자동차나 바이크와 부딪혀 목숨을 잃는 일도 있고. 이런 크고 작은 사고들이야 말로 모토GP의, 나아가서 모터사이클 레이싱의 영향력을 재확인 시켜주는 사례다.
영웅이 있다면
여성 영웅도 있다
얼마나 많은 남성 라이더들이 최정상급 레이서들에게 영향을 받고 실력을 키워 왔는지 말한다면 끝도 없다. 그렇다면 우리들에게 영향을 줄 수 있는 레이서는 없을까?
프로 모터사이클 레이싱 무대 역시 여느곳 처럼 완벽히 남초 환경이지만, 지극히 당연하게도 이곳 역시 여성들이 있다. 레이스가 시작하기 직전 선수들 옆에 서서 양산을 들고 그늘을 만들어주는 역할을 넘어서 직접 바이크 위에 올라 앉은 여성들이다.
너무나 천문학적인 금액이 필요한 스포츠라서 그런건지, 여성들만을 위한 프로 레이스는 없는 것으로 알고 있다. 하지만 그 덕분에 전도유망한 여성 레이서가 남성 레이서와 한 무대에서 동시에 격전을 펼친다. 응원하던 레이서가 남성 레이서들을 제치고 순위를 올리는 모습을 보는 것은 임파워링, 그 이상의 감정을 느끼게도 만든다.
아직까지는 여성 레이서들의 평균적인 실력이 기대에 미치지 못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만약 여성들이 남자들만큼 레이스에 도전한다면 모토GP에서 여성 레이서가 1, 2위를 다투는 모습을 보는 것도 어렵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여자는 그런 거 타는거 아니야'라는 소리를 들어서 바이크 타기를 포기했던 어느 아이에게 모터스포츠의 재능이 있었을테니까.
국내에서 열리는 레이스에서도 역시 여성 레이서들의 모습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이전의 내가 참여했던 형식처럼 이벤트로 참가하는 아마추어 선수들도 있지만, 매년 매 경기에 참전하고 직접 참가비를 마련하고 필요하다면 후원사를 찾으러 발로 뛰는 그런 멋진 사람들이 있다.
나는 이 글을 보는 사람들이, 혹시 아주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다면, 아주 작은 레이스에라도 직접 참가해보는 경험을 할 수 있기를 바란다. 그게 아니라면 레이스 그 자체에라도 아주 약간의 관심을 갖게 된다면 좋겠다. 그렇게 레이스의 경험이 있는 어른이 되어서, 나중에 모터스포츠에, 바이크 레이스에 관심을 갖게 된 어린 여자아이를 만나게 될 때 전폭적으로 지지를 해줄 수 있는 조언자가 되기를 바란다. 그 결과로 언젠가 세계급 레이스에서 태극기를 달고 출전하는 최초의 한국 선수가 여성이 되는 것도 멋질 것이라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