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크를 타기 전까지, 나는 모터스포츠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시끄럽게 굉음을 내며 같은 곳을 뱅글뱅글 돌기만 하는 경기에 아무런 관심을 가질 수가 없었다. 지금은 모터스포츠에 꽤 관심이 있는 편이다. 꼬박꼬박 경기를 모두 챙겨보지는 않지만, 우연히라도 경기를 보게 되면 꽤 즐겁게 시청하고, 좋아하는 선수들도 몇몇 있다.
모토GP와 SBK는 모두 월드와이드 바이크 레이스다. 모토GP는 오로지 이 레이스만을 위해 만들어진 프로토 타입의 바이크로 이뤄지는 레이스이고, SBK는 시중에 판매되는 바이크를 레이스에 맞게 개조하여 펼쳐지는 레이스다.
참 이상하게도, 자동차를 타기 시작한다고 F1에 관심을 갖는 사람들은 그리 많지 않은데, 바이크를 타기 시작하면서 모토GP에 관심을 갖게 되는 사람들은 꽤 많다. 확신할 수는 없지만, 어쩌면 바이크의 모습은 극단의 스피드를 위해 개조되더라도 결국 현실 속에서 움직이는 바이크와 모습이 크게 달라지지 않기 때문일까?
자동차는 아무리 비싸고 빠른 스포츠카를 탄다고 해도 F1의 머신들과 닮는 것조차 힘들다. 하지만, 바이크라면 시중에 나온 바이크로도 충분히 모토GP의 머신과 흡사한 외양으로 꾸밀수 있다. 심지어 레이스의 선수들과 비슷한 모습으로 스스로를 단장하고 타더라도 외려 더욱 안전해질 뿐이다. 그래서 라이더들에게 모토GP의 선수들은 닮을 수 있을 것 같은 영웅들이다. 이런 현실감 덕분에 많은 라이더들이 모토GP와 그 선수들을 사랑한다.
국내에서도 바이크 레이스가 열린다. 누구나 알고는 있지만, 아무도 선뜻 발길이 닿지 않는 경기들이다. 그곳에는 아무나 접근할 수 없을 것 같은 아우라가 있었다. 그 아우라는 인프라가 충분히 갖춰져있지 않아서 만들어진 것으로, 실황 중계 따위 없는 경기장에 업계 관계자들, 선수의 친구, 가족들이 삼삼오오 모여서 도무지 누가 누군지 구별할 수 없는 선수들을 응원하고 있다.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이 막연히 가서 구경하다 보면 누구를 응원해야할지 결정하기도 전에 그냥 집에나 가고 싶어지는 것이다.
모터스포츠는 돈이 많이 들기 때문에, 대규모의 후원사가 없으면 애초에 존재부터 불가능하다. 그렇지만, 우리나라의 경우에는 정말 바이크 애호가들의 애정을 기반으로 생겨난 경기들이 많았다. 내가 경험해 본 경기도 그 중 하나다.
스프린트 레이스,
엔듀런스 레이스
본격적인 이야기로 들어가기 전에, 모터스포츠는 크게 스프린트 레이스(sprint race)와 엔듀런스 레이스(endurance race), 두 종류로 구분할 수 있다는 것부터 말해둬야 겠다.
‘스프린트 레이스’는 말 그대로 짧은 거리를 최대한 빨리 달려 속도를 겨루는 경기다. 가장 메이저한 경기라고 할 수 있는데, F1과 모토GP 등 유명한 경기들이 대부분 이 쪽에 속한다.
‘엔듀런스 레이스’는 내구성을 가리는 경기다. 여기서 ‘내구성’은 머신의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레이서의 내구성이기도 하다. 일정한 시간을 지정하여 누가 더 많은 거리를, 혹은 더 많은 트랙을 달렸는지를 가리는 경기라고 할 수 있다.
이 두 경기는 경기 시간은 물론이고 성격도 꽤 다르다. 스프린트 레이스에서는 레이서의 기량과 머신의 성능이 매우 중요하다. 이 두 가지를 최상으로 갖추지 못한다면 상위권은 노려볼 수조차 없다. 하지만 엔듀런스 레이스라면 그렇지 않다. 엔듀런스 레이스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는 말 그대로 내구성이다. 머신의 내구성은 물론이요, 레이서의 내구성도 중요하다. 레이스가 매우 오랫동안 진행되는 만큼 우연한 요소가 작용할 기회가 더 많고, 그렇기에 그 누구도 우승이 확실한 팀이 될 수 없다. 꼴찌가 상위권에 진입하는 것도 가능한 경기가 바로 엔듀런스 레이스다.
그래서 엔듀런스 레이스는 이벤트적 요소가 강하고, 참가 바이크의 제한이 헐렁한 편이다. 물론 국제급 규모의 경기가 되면 엔듀런스 레이스 역시 프로페셔널하지만, 그런 경기조차도 ‘우연’이 강하게 개입해서 결과를 예측할 수 없게 만든다. 바로 그 점이 관전자들로 하여금 5시간, 8시간, 혹은 24시간 동안 계속되는 레이스를 끝까지 볼 수 있게 하는 매력 포인트다.
처음 만나는
서킷의 세계
나는 우연히 엔듀런스 레이스에 참가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카트 서킷으로 사용하는 아주 작은 트랙에서 열리는 아주 작은 경기였지만, 어쨌든 레이스를 경험할 수 있었다. 운이 좋았다. 심지어 내가 준비해야 할 것은 훈련에 참가하여 레이스에 필요한 기술을 만드는 것과, 내가 입을 레이싱 수트를 준비하는 것 뿐이었다. 레이싱을 위한 바이크나, 레이스를 위한 개조나, 이를 관리해줄 메카닉이나, 참가 비용 등과 같은 부가적인 일에 신경쓸 필요가 없었다. 마치 프로레이서처럼 달리는 일에만 집중하면 되는, 어마어마한 조건이었다.
이렇게 최적의 조건이 가능했던 이유는 내가 들어있는 팀에 스폰서가 붙었기 때문이고, 팀에 스폰서가 붙었던 이유는 내 팀이 ‘여성들로만 이루어진 레이싱 팀’을 표방했기 때문이다. 바이크 업계는 항상 ‘여성 라이더’에 목말라 있기 때문에, 좋은 프레젠테이션만 있다면 다양한 업체에서 ‘여성 라이더’에게 후원하고 ‘여성 라이더’를 통해 홍보를 하길 원한다. 당시 내가 있던 팀 역시 이 부분은 잘 파고들었다(이야기가 나온 김에 말하자면, ‘여성’ 라이더라는 단어에 나는 항상 불만을 갖고 있었다. 처음에는 쏟아지는 관심들에 마냥 신났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뭔가 쎄한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메갈리아가 탄생하기까지는 아직도 몇 년 전의 이야기다).
어쨌든 이 순간 나는 ‘여성’ 레이싱 팀이라는 아이덴티티를 전력으로 이용하기로 했다. 어차피 그 때까지 바이크를 탄 모든 기간 동안 나는 ‘라이더’가 아닌 ‘여성 라이더’ 취급을 받았는데, 이번 한 번쯤 ‘여성’임을 이용하는 것이 뭐가 나쁘냐는 생각이었다.
그렇게 ‘여성 라이더 레이싱 팀’이 발촉했다. 나는 그 팀의 첫번째 경기에 참여하는 세 명의 레이서 중 한명이 되었다. 엔듀런스 레이스는 항상 두 명 이상의 레이서를 필요로 한다. 말하자면 계주 달리기와 같다. 매우 둔한 나조차도 많은 남성 라이더들의 부러움과 시기를 조금은 느낄 수 있었다.
엔듀런스 레이스는 으레 한여름에 개최된다. 극한의 상황에서 내구력을 테스트하기 위해서다. 가을과 겨울로 넘어가던 즈음 꾸려진 팀은 봄부터 본격적인 레이스 준비에 들어갔다.
이 때까지는 마냥 재미있었다. 레이스를 위한 테크닉은 그대로 바이크를 더 잘 타기 위한 기술이다. 바이크를 잘 타기 위한 테크닉을 공짜로, 그것도 전문가에게 배울 수 있었다. 우리는 대형 주차장을 빌려 한가운데를 동그라미를 그리며 뱅글뱅글 돌고, 주황색 조그만 라바콘 사이를 S자로 그리며 달렸다. 달리다 넘어지고 몸에서 땀이 쏟아져도 마냥 재밌기만 했다.
시간은 흘러 여름으로 접어들었다. 8월 말에 예정되어있던 대회가 성큼 다가왔다. 여름 내내 경기를 위해 시간을 쏟았다. 마치 일본 만화 속 운동 동아리에 소속된 고등학생 주인공 같다는 생각을 했다.
경기날 아침. 새벽녘부터 그 작은 경기장에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나는 수능 때도 먹어본 적이 없었던 우황청심환을 한 알 먹어야만 했다. 심장이 쿵쾅거리는 소리가 내 귀에까지 들릴 정도였다. 손과 발이 핸드폰 진동벨처럼 떨려댔다. 이윽고 경기를 시작했다.
나는 세컨드 레이서였다. 퍼스트 레이서가 그 몫의 주행을 마치고 피트 인* 1했다. 드디어 나의 차례였다. 시트에 앉아 핸들을 쥐고, 수십 명의 바이크들이 엉켜 달리고 있는 트랙으로 들어갔다.
이전까지 나는 모터스포츠를 왜 모터’스포츠’라고 하는지 이해 할 수 없었다. 모터스포츠의 선수들은 가만히 자동차의 콕핏*2이나 바이크의 시트 위에 앉아서 조작만 하면 되는데 그걸 스포츠라고 해도 되는 건가? 하는 생각이었다. 모름지기 스포츠라면 직접 육체를 쓰고 땀을 흘리며 하는 것들이라고 생각하는 편협한 생각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뭐, 게임도 이제는 e-스포츠라고 부르니까 그런 느낌의 멘탈 스포츠라는 거겠지, 하고 생각했다.
하지만 트랙으로 들어간지 몇 분도 채 되지 않고서, 그 생각을 철회해야만 했다. 서킷 위의 주행은 공공도로 위 주행과는 천지차이다. 트랙은 가감속을 반복하도록 구불구불하게 설계되어 있고, 제대로 코스를 공략하기 위해서는 찰나에 기어를 몇 단이나 내리고 올리며 속도를 바꿔야 한다. 코너를 돌아나갈 때마다 직선으로 달리고 있는 바이크를 선회하기 위해 말 그대로 바이크를 잡아채서 몸으로 눌러야 한다. 몸을 완전히 바이크 바깥으로 빼고 당기듯 움직여 높은 속도에서도 매끄럽게 바이크를 돌린다. 그러면 바이크는 땅과 예각을 이루고 서 있게 된다. 각이 예리해질수록 더 빠르게 돌 수 있다. 하지만 너무 예리해진다면 그대로 슬립하게 된다. 그래서 무릎을 빼서 아스팔트 위를 지긋이 스치게 만든다. 이보다 더 ‘눕게*3’ 된다면 슬립할 확률이 높다.
이렇게 바이크를 이리저리 움직이면서, 한 편으로는 함께 달리는 레이서들을 방어하고 추월하다 보면 평소에는 쓰지도 않던 근육들을 사용하게 된다. 반복적으로, 매우 강하게. 이렇게 한 바퀴만 돌아도 헬멧 안은 이미 땀으로 젖고, 다리는 후들후들 떨리기 시작한다. 숨이 가빠지면서 달리기 하는 것 마냥 호흡이 거칠어진다. 그 동안 바이크를 타고 전국을 쏘다니며 하루에 백여 km를 달리면서도 한 번도 이런 적은 없었다. 하등 쓸데없어 보이던 레이서들의 체력 단련 훈련이 눈 앞을 스쳐갔다. 모터스포츠는 정말로 스포츠다. 멘탈 스포츠 따위가 아니라, 말 그대로 몸을 써야하는 스포츠인 것이다.
나의 순서가 끝나고 다시 피트 인해서 다음 주자에게 바이크를 넘기자마자, 걸을 기력도 없이 준비된 간이 수영장으로 쓰러졌다. 염분 보충을 위해 미네랄 캔디를 먹고, 한 번 더 남은 다음 주행을 기다리며 나의 이전 주행을 복기했다. 다시 퍼스트 레이서가 다시 트랙으로 나가고, 세컨드 레이서인 내가 한 바퀴를 또 돌고, 서드 레이서까지 모두 자기 몫의 주행을 마치자 경기는 끝났다. 온 몸의 진이 다 빠진지 오래였다.
나의 팀은 그 다음 해에도 레이스를 나갔고, 나는 서포터로 참가했다. 이후에는 흐지부지 사라졌지만 이 경험은 나의 바이크 라이프의 전환점이 되었다. 이후 나는 바이크를 꽤 탄다고 스스로 자부할 수 있게 되었고, 실제로도 그랬다.
몇 년 뒤, 메갈리아가 탄생했고, 일상 속의 성차별에 대해 깊이 고민해 보게 됐다. 나는 간혹 이 때의 경험이 떠오를 때면, 남성지배적인 레이스 환경은 내버려둔 채 ‘여성팀’이라는 제한된 조건을 만들어 놓고, 마치 특별한 기회를 주는 양, 나의 ‘라이더’로서 실력이 아니라 ‘여성’이라는 성별에만 주목했던 그 이벤트는 여성을 타자화하는 여성혐오의 대표적인 케이스였다고 생각하곤 한다. 그런 상황을 이용했던 나를 약간 경멸하다가도, 이내 그 경험을 후회하지 않기로 마음을 고쳐먹는다. 어쨌든 그 해 여름은 뜨거웠고, 타는 듯한 아스팔트 위에서 나는 정말 멋졌고, ‘레이서였던 나’는 나에게 자부심이 되어 주고 있기 때문이다.
*1 피트 인: 레이스 도중 머신을 정비하기 위해 피트로 돌아가는 것. 피트는 본래 구덩이 혹은 탄광이란 뜻을 가지고 있지만 모터스포츠에서는 경기 전 머신이 대기하고 경기 중에는 타이어를 교체하고 주유를 하는 곳을 말한다.
*2 콕핏: 일반적으로는 항공기나 우주선, 기관차 등의 조종석을 뜻한다. 모터스포츠에서는 F1 머신과 같은 고성능 자동차의 운전석을 말한다. 수많은 버튼과 스위치가 있고, 운전자가 앉아서 이 모든 것을 컨트롤 해야 하는 종류의 운전석을 보통 콕핏이라 한다.
*3 눕다: 바이크를 땅과 예각으로 만들어 코너를 돌아나가는 것을 두고, ‘바이크를 눕혀서’ 같은 식으로 표현하곤 한다. 본문에 썼던 것처럼, 너무 눕히면 정말로 땅 위에 눕는 수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