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서 바이크 8. 드디어, 박스를 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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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바이크 8. 드디어, 박스를 까다!

이비

일러스트레이션: 이민

반 년 정도가 지나자 무겁고 불안정한 코멧250에도 어느 정도 적응했다. 지난 로드윈보다 적응 기간이 더 짧았다. 250cc처럼 애매한 체급이 원래 그렇다. 애매하게 강한 힘과 애매하게 빠른 속도 때문에 자꾸 더 강한 힘, 더 빠른 속도에 더 욕심이 난다. 사실 아예 높은 배기량을 경험한 뒤에 낮은 배기량으로 내려온 경우에는, 쿼터급이야말로 엔진의 힘을 모두 뽑아내면서 정말 즐겁게 탈 수 있는 체급이다. 

하지만 당시의 나는 이제 막 배기량을 높여가는 때인 만큼 더 빠른 속도와 더 강한 출력에 계속 욕심이 났다. 오버리터*1급까지 무슨 바이크든 탈 수 있는 무제한의 면허도 있겠다, 코멧을 팔고 나면 꽤 넉넉한 돈도 생기겠다, 슬슬 미들급을 노려보고 싶었다.

하지만 냉정하게 생각해보면, 사실 그 때의 나는 아직 여러모로 준비가 부족했다.

미들급 바이크 고르기

일단 미들급을 사기로 결정하자, 선택권이 비할 수 없을 정도로 넓어졌다. 돈이 있어도 살 수 있는 모델이 없어 포기했던 저배기량 시절과는 달리, 드디어 유럽과 일본 브랜드를 살 수 있게 된 것이다. 스포츠 네이키드는 레플리카 모델들에 비해 인기가 없었지만, 수입 브랜드라면 미들급부터는 라인업이 빵빵했다.

고품질에 신뢰도 높은 일본제, 고성능에 스타일리쉬한 유럽제. 무엇을 고르든 만족스러울 게 당연했다. 여행도 출발하기 전이 더 설레는 것처럼, 바이크를 아직 사지도 않았는데 세상 모든 바이크가 내 것 같았다.

하지만 결정적 문제가 있었다. 돈이 아직도 부족했다. 중고차를 고려하더라도 미들급 이상은 6~700만 원 이상의 현찰이 필요하다. 나는 거금 주고 코멧을 신차로 구입한 지 채 반년 밖에 되지 않아 돈을 충분히 모을 시간이 없었다. 번 돈은 족족 새로운 바이크에 어울리는 장비를 사고, 주말 투어의 기름값으로 탕진해왔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새로운 바이크를 사려던 결심이 쉽게 사그러들 리가 만무했다.  

어떡하지? 무언가 방법이 없을까? 발을 동동 구르는데 방법이 떠올랐다. 아니, 생겨났다.

자동차를 구입할 때는 너무 당연한 방법 중 하나지만, 당시만 해도 바이크는 할부 프로그램이 전혀 없었다. 하지만 자동차도 함께 취급하는 BMW 코리아가 자동차의 할부를 진행하는 파이낸셜 프로그램을 바이크에도 적용하기 시작했다! 덕분에 BMW 바이크의 판매량이 폭발적으로 늘어났다. 바이크가 모이는 곳이면 항상 BMW가 몇 대 씩은 있었다. 바이크라면 일제가 주류를 차지하고, 유럽제라면 이탈리아의 두카티가 한 두대 보이던 과거와 비교하면 말 그대로 눈에 띄는 변화였다.

어쨌든 BMW의 할부프로그램을 이용하면 돈이 조금 부족한 상황에서도 충분히 미들급으로 업그레이드를, 그것도 신차로 할 수 있었다. 매달 내야하는 할부금이 부담스러울 수도 있지만, 어차피 사회초년생인 당시의 나는 돈을 모으는 것보다 쓰는 것에 익숙했다. 이대로 손을 놓고 있다간 코멧을 팔고 생긴 돈마저도 눈녹듯 사라질 것 같았다.

생각이 거기까지 닿자, 당장 BMW 모토라드*2 매장으로 달려갔다. 매장을 찾아 이것저것 묻자, 그곳에서는 나에게 엔트리 모델*3인 F 시리즈를 추천했다. 그 중에서 유독 눈에 띈 것은 F800R이라는 이름을 가진 네이키드 모델.

여느 바이크들과 달리 직선 위주의 디자인에, 말끔하게 도색된 탱크*4와 무광으로 담백하게 마감한 플라스틱의 파츠들이 어우러진 모습이 내 마음에 쏙 들었다. 어딘가 텅 비어 보였던 로드윈과 다르게 꽉 찬 엔진룸 디자인이 눈에 띄었다. 깜짝 놀란 복어처럼 과하게 덩치를 키운 코멧과 달리 딱 필요한 만큼 커다란 차체도 완벽했다.

그 날로 바로 견적서를 뽑아왔고, 오래지 않아 계약서 까지 작성했다. 선납금 몇 %에 매달 할부금을 얼만큼 내는 방식이었다. 가장 큰 난관은 할부를 위한 신용도 평가였는데, 스무살 때 부터 꾸준히 돈을 벌면서 사용해 온 신용카드 내역이 나를 도와주었다.

사실 바이크를 할부로 산다는 것은 추천할 만한 일이 아닐지 모르겠다.  자산으로 취급되는 자동차가 아닌 바이크를 할부까지 하면서 산다고 하니 내 주변 사람들도 우려했다. 하지만 나는 불확실한 미래를 위해 현재를 저당 잡히는 것은 조금 슬프지 않나, 하고 생각하는 타입의 사람이라는 점을 유의해 주시길. 당시의 나에게는 이게 최선의 선택이었다고 지금도 생각한다. 그러나 지금의 나는 할부를 하면서까지 바이크를 사지는 않는다. 아니, 못한다고 하는게 더 정확할지도.

일러스트 이민

박스를 까다

아무튼 나는 별 탈 없이 무사히 계약을 하고, 선납금을 넣고, 바이크를 기다렸다. 코멧 역시 신차로 샀지만 그 때는 공장에서 조립이 되기를 기다렸다면, 이번에는 바이크가 선적되어 오기를 기다렸다.

바이크 커뮤니티에서 관용구처럼 쓰는 문장이 하나 있다. ‘박스 깐다’라는 표현이다. 바이크를 신차로 뽑을 때 쓰는 말인데, 특히 수입 바이크를 살 때 이런 표현을 쓴다. 수입 바이크가 배에 선적되어 들어올 때 나무 상자에 포장 되어 오는 걸 두고 만들어졌다. 이 상자에서 꺼내고 나서도 조립을 위해 정비실에 다시 들어가야 하기 때문에, 사실 박스를 까는 것은 바이크가 출고 되기 위한 중간 단계일 뿐이다. 하지만 이 박스를 실제로 눈 앞에 놓고 하나씩 하나씩 뜯어가는 과정이 마치 크리스마스 아침에 받은 선물을 뜯는 것처럼 특별한 기분을 준다. 

'박스까기' 전의 바이크가 들어있는 박스
가조립상태 바이크와 처음 만나는 순간

바이크가 출고되던 날, 다니던 회사에 연차를 내고 매장에 달려가서 직접 박스를 뜯었다. 나무 판자를 하나씩 뜯어내며 나타난 ‘날 것의 바이크’의 모습이 어찌나 새롭던지.


*1 오버리터: 리터급인 1000cc를 넘어가는 배기량의 바이크. 배기량이 높은 만큼 여유로운 출력으로 편안한 주행이 특징으로, 먼 거리를 여유롭게 달리는 투어러(Tourer) 계열 바이크들이 주로 이 배기량에 속해있다.

*2 모토라드: Motorrad. Motorcycle라는 뜻의 독일어.

*3 엔트리 모델: 특히 자동차, 혹은 바이크와 관련하여 쓰이는 단어로, 해당 브랜드 제품군에서 가장 저렴하거나 편리한 사용성 등으로 쉽게 구입하게 되는 모델들을 말한다.

*4 탱크: 연료가 들어가는 부분이 외부로 드러나는 종류의 바이크에 주로 사용하는 단어로, 이런 경우 대체로 탱크는 시트와 핸들 사이에 배치되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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