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avourites 12. 엘레나

핀치 타래리뷰여성서사

Favourites 12. 엘레나

사랑과 정의의 이름으로 실천하는 밀레니얼 전사

타래 에디터

"널 어떤 대명사로 부르면 좋을까?"  

내가 중학생 때 영어를 가르쳤던 재미교포 출신 선생님이 그랬다. “영어는 멍청한 언어야(English is stupid language).” 규칙이 있다가도 예외가 너무 많은 것을 풍자하는 말이었다. 오히려 나는 대명사에 ‘성별’을 붙이는 부분이 멍청하다고 생각했다. 어떤 사람이 여자인지, 남자인지, 트랜스섹슈얼인지, 팬섹슈얼인지, 논바이너리인지 왜 대명사에 굳이 하나하나 표시를 해야 한단 말인가? 그냥 ‘그는’ 그렇더라는 한 마디면 되는 것을.  

어쨌든 태어날 때부터 영어를 쓰고 살아야 하는 미국인들은 이 문제에 대해 젠더 다양성 만큼이나 ‘대명사 다양성’을 확보하자는 대안을 내놓았다. 시스젠더 여성이나 시스젠더 남성이 아닌 만큼, 자신을 ‘she’나 ‘her’ 대신 ‘they’나 ‘their’, 또는 ‘ze’나 ‘zer’로 불러달라고, 자기소개와 함께 덧붙이는 것이다. 극단적일 만큼 사소한 곳에서부터 젠더 다양성을 가시화하고 지키고자 하는 정체성 정치의 실천이다. 물론 ‘she’와 ‘he’의 나라에서만 살고 싶은 편견 가득한 사람들은 번거롭고 귀찮다며 자신의 ‘무식할 권리’을 훼손당했다고 목놓아 울지도 모르지만. 그렇다. 무지는 그야말로 특권이다.  

<원데이앳어타임>의 엘레나 알바레즈는 자신을 ‘she’나 ‘her’로 불러달라고, 그의 연인 시드는 ‘they’나 ‘their’로 불러달라고 할 만큼 똑똑하고 깨어 있는 밀레니얼 여성이다. 학교 토론팀의 캡틴이며 차별, 불평등, 환경 문제와 같은 사회적인 이슈에 관심이 많다. 레즈비언이기도 하다. 엘레나는 사회 정의에 관한 한 이론가가 아니라 실천가다. 인터넷에서 만난 퀴어 동지들과 함께 시위를 조직하고, 부모님이 멕시코로 추방 당한 친구를 숨겨주고, ‘열정적인 동의’를 서로 표시한 후에야 연인과 스킨십을 시도한다.  

물론 인생은 항상 올바른 실천만 할 수 있을 만큼 단순하지 않다. 엘레나는 잔 다르크 같은 전사지만, 동시에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해서라면 기꺼이 타협할 줄 아는 따스한 사람이기도 하다. 성차별적이고 고루한 전통이라 욕하면서도 엄마를 위해 15세 생일 킨세녜라(quinceniera) 파티를 하는 데 동의하기도 하고, 연인 시드가 청하기에 역시 성차별적이고 유치한 전통인 졸업 축하 파티(prom)에 참석하며, 할머니를 기쁘게 해 주기 위해 성차별적이고 불편한 화장을 해보기도 한다.  

엘레나는 아직 어리다. 그 앞에 펼쳐진 인생이 어찌 흘러갈 지 아무도 알 수 없다. 그러나 한 가지만은 확신할 수 있다. 엘레나는 자기 자신을 위해, 또 자기 자신과 같거나 다른 약자들을 위해 절대 물러서지 않을 것이다. <원데이앳어타임>은 넷플릭스에서 시청가능하다.

SERIES

Favourites

타래 에디터의 최신 글

더 많은 타래 만나기

보장 중에 보장, 내 자리 보장!

이운

#방송 #여성
나는 땡땡이다. 아마 팟캐스트 ‘송은이 김숙의 비밀보장’을 듣는 사람들이라면 내가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바로 알아챌 수 있을 것이다. 이 팟캐스트는 쓰잘데기 없는 고민에 시간을 올인하고 있는 5천만 결정장애 국민들을 위한 해결 상담소로, 철저하게 비밀을 보장하여 해결해 준다는 취지하에 만들어진 방송이다. 그리고 ‘땡땡이’는 이 취지에 맞게, 사연자의 익명을 보장하기 위해 사용하다 만들어진 애칭이다. 비밀보장 73회에서..

주접

플레잉 카드

헤테트

#플레잉카드 #트럼프카드
버드 트럼프Bird Trump 원고를 하고 있는데 택배가 왔다. 까마득한 언젠가 텀블벅에서 후원한 플레잉 카드 (=트럼프 카드) ! 원래 쟉고 소듕한 조류를 별로 안 좋아하는데 (맹금류를 제외한 새를 무서워하는 편) 이건 보자마자 이성을 잃고 냅다 후원해버렸다. 그 뒤로 잊고 살았는데 오늘 도착. 실물로 보니 과거의 나를 매우 칭찬해주고 싶다. 아름답지 않은 구석이 없어, 세상에. 하다못해 쓸데없이 많이 들어있는 조..

말 하지도 적지도 못한 순간들 -14

환자가 떠난 후 남은 딸이 할 일

beforeLafter

#죽음 #장례
상속인 조회 서비스 조회 완료 후 한 달 정도는 은행과 보험 정리에만 매달렸다. 사실 지점이 많이 없는 곳은 5개월 여 뒤에 정리하기도 했다. 그 사이에는 자동차 등을 정리했고 건강보험공단, 연금공단, 주민센터 등을 방문했다. 상속인 조회 서비스에 나온 내역들을 한꺼번에 출력해 철 해 두고 정리될 때마다 표시해두고 어떻게 처리했는지(현금수령인지 계좌이체인지 등)를 간략하게 메모해두면 나중에 정리하기 편하다. 주민..

말하지도 적지도 못한 순간들 -12

환자가 떠난 후 남은 딸이 할 일

beforeLafter

#죽음 #장례
끝났다. 사흘 간의 지옥같고 전쟁같고 실눈조차 뜰 수 없는 컴컴한 폭풍우 속에서 혼자 소리를 지르는 것 같았던 시간이 끝났다. 끝났다는 것이 식이 끝난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이 더 절망스럽다. 불과 사흘 전만 해도 물리적으로 사회적으로 엄연히 존재했던, 60여년을 살았던 한 '사람'을 인생을 제대로 정리할 시간조차 갖지 못한 채 후루룩 종이 한 장으로 사망을 확인받고, 고인이 된 고인을 만 이틀만에 정리해 사람..

말하지도 적지도 못한 순간들 -13

환자가 떠난 후 남은 딸이 할 일

beforeLafter

#죽음 #상속
장례도 끝났고 삼오제(삼우제)도 끝났다. 49재의 첫 칠일 오전, 나는 일하던 도중 이제 식을 시작한다는 가족의 연락을 받고 창가로 나와 하늘을 보며 기도했다. 부디 엄마의 영혼이 존재해서 젊고 건강할 때의 편안함을 만끽하며 여기저기 가고 싶은 곳을 실컷 다니고 있거나, 혹은 그 생명의 끝을 끝으로 영원히 안식에 들어가 모든 것을 잊었기를. 삼오제까지 끝나면 문상 와 준 분들께 문자나 전화로 감사 인사를 해도 좋..

[제목없음] 일곱 번째

누군가를 만난다는건.

제목없음

#여성서사
누군가를 만난다는건 참으로 어렵다. 나같은 경우에는 끊임없이 되물어봤다. 그리고 의심했다. '저 사람은 만나도 괜찮은걸까?' '내가 착각하고 있는건 아닐까?' 처음에는 설레기도 하고 잘 맞는 사람이라고 생각이 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안한 마음은 사라지지 않는다. 과연 내가 누군가를 만나도 괜찮은걸까? 순간의 감정으로 선택한 것은 아닐까? 꼬리에 꼬리를 물다가 결국에는 좋으니까로 결론이 난다. 좋은걸 어떡하나? 만나야..
더 보기

타래를 시작하세요

여자가 쓴다. 오직 여자만 쓴다. 오직 여성을 위한 글쓰기 플랫폼

타래 시작하기오늘 하루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