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avourites 5. 그레이스 마크스

핀치 타래리뷰여성서사

Favourites 5. 그레이스 마크스

서사가 진실을 지배한다

타래 에디터

다른 선택지가 없다면, 살인하는 남자보단 살인하는 여자가 되고 싶어요.  

드라마 <그레이스>(넷플릭스, 2017) 그레이스 마크스  

배우를 여배우라 부르고, 경찰을 여경이라 부르고, 교사를 여교사로 부르는 것은 많은 경우 성차별의 맥락을 벗어나지 못한다. 명사의 여성화는 대부분 원래 호칭이 가진 전문성과 받아 마땅한 존중을 격하하는 불순한 의도로 쓰인다. 넷플릭스 오리지널 드라마 <그레이스>의 그레이스는 이 지점에서 기묘한 전복을 시도한다. ‘살인마’의 여성형, 살인하는 여자(murderess).  

그레이스는 호칭이라기보다 낙인에 가까운 정체성에 ‘여성’을 붙여 이것을 한층 각별하게 받아들인다("I’d rather be a murderess than a murderer if those are the only choices."). 인간 사회에서 최악의 존재로 여겨지는 살인마. 더 격하될 것도 없는 존재. 여기에 불순한 의도가 한 겹 더 씌워진들, 그것은 오히려 악한 존재로서 한 발짝 탁월해진다는 의미는 아닐까?  

유명한 ‘살인녀’로 언론과 사교계의 관심과 의심의 한가운데에 놓여있는 ‘스타 살인마’ 그레이스. 그는 자신의 위치를 아주 잘 알고 있다. 여자 살인마가 맞닥뜨린 대중의 질문은 주관식이 아니라 객관식 문제다. 다음 중 그레이스의 정체를 고르시오. 1번, 순수하고 결백하고 항상 당하기만 했던 가련한 피해자. 2번, 모든 것을 조종하는 흑막으로 똑똑하고 잔인하고 악랄한 가해자. 그 중간 어딘가는 존재하지 않는다. 대중은 답을 원한다. 그녀를 응원하고 도와줘야 하는가? 그녀를 처벌하고 가두고 고통을 줘야 하는가?  

그레이스는 이야기의 유일한 화자로서 가장 큰 권력을 쥐고 있다. 우리는 그레이스를 둘러싼 사람들처럼, 오직 그레이스가 털어 놓는 대로만 그의 과거를 듣는다. 한 편 그레이스는 정신과 의사 사이먼 조단의 ‘내담자’로서 탐구 당하고 파헤쳐지고 이성에 의해 정복당해 파악될 운명이다. 그는 철저한 ‘대상’이다. 실험 당할 동물, 탐험 되어질 오지, 관찰 당할 미지의 존재.  

그레이스는 서술자이자 연구대상으로서 자신이 가진 권력을 아주 잘 알고 있다. 또한 대중이, 남성 정신과 의사가 여자 살인마에게 갖는 욕망이 어떤 것인지 잘 알고 있다.  

그레이스는 이 두 가지를 자유자재로 활용해 자신의 존엄을 잃지 않으면서도 최선의 결과를 향해 전략적으로 나아간다. 그 과정에서 그레이스는 여성에 대한 사회의 차별과 편견에 맞서 싸우거나 이를 수정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을 충실히 극대화해 철저히 사적으로 이용한다. 그런 점에서 그레이스는 이 드라마의 영어 제목 그대로 ‘가명’(alias)의 존재로 남는다. 위대한 가짜, 그레이스.

SERIES

Favourites

타래 에디터의 최신 글

더 많은 타래 만나기

보장 중에 보장, 내 자리 보장!

이운

#방송 #여성
나는 땡땡이다. 아마 팟캐스트 ‘송은이 김숙의 비밀보장’을 듣는 사람들이라면 내가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바로 알아챌 수 있을 것이다. 이 팟캐스트는 쓰잘데기 없는 고민에 시간을 올인하고 있는 5천만 결정장애 국민들을 위한 해결 상담소로, 철저하게 비밀을 보장하여 해결해 준다는 취지하에 만들어진 방송이다. 그리고 ‘땡땡이’는 이 취지에 맞게, 사연자의 익명을 보장하기 위해 사용하다 만들어진 애칭이다. 비밀보장 73회에서..

4. Mit Partnerin

여성 파트너와 함께

맥주-

#여성서사 #퀴어
여성 파트너와 함께 이성애 규범과 그 역할에 익숙해진 내가, 동성애를 하기 위한 일련의 역할들과 그 수행에 익숙해지기까지는 조금 시간이 걸렸다. 대부분의 시간에 나는 실용적- 불필요한 장식이 없고 기능에 충실한-인 옷을 입고 있기 때문에, 여가로 쓸 수 있는 시간에는 사회에서 ‘여성적’ 이라고 해석하는 복장을 하고 있기를 좋아한다. 하늘하늘하고, 레이스나 프릴이 달려 있고, 패턴이 화려한 옷들. 재미있는 것은 패턴..

병원이 다녀왔다

..

낙타

정신병원과 한의원에 다녀왔다 이번엔 둘다 끝까지 치료하고 싶다.....

오늘도 결국 살아냈다 1

매일매일 사라지고 싶은 사람의 기록

차오름

#심리 #우울
하필 이 시기에 고3으로 태어난 나는 , 우울증과 공황발작으로 많이 불안해진 나는, 대견하게도 오늘 하루도 잘 버텨냈다. 우울증과 공황발작이 시작된 건 중3. 하지만 부모는 어떤 말을 해도 정신과는 데려가주지 않는다. 이것이 내가 20살이 되고 알바를 하면 첫 번째로 갈 장소를 정신과로 정한 이유이다. 부디 그때가 되면 우울증이 사라지지 않을까라는 말도 안 되는 기대를 가지면서. 부모는 우울증은 내가 의지를 가지고 긍정적으로..

[제목없음] 일곱 번째

누군가를 만난다는건.

제목없음

#여성서사
누군가를 만난다는건 참으로 어렵다. 나같은 경우에는 끊임없이 되물어봤다. 그리고 의심했다. '저 사람은 만나도 괜찮은걸까?' '내가 착각하고 있는건 아닐까?' 처음에는 설레기도 하고 잘 맞는 사람이라고 생각이 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안한 마음은 사라지지 않는다. 과연 내가 누군가를 만나도 괜찮은걸까? 순간의 감정으로 선택한 것은 아닐까? 꼬리에 꼬리를 물다가 결국에는 좋으니까로 결론이 난다. 좋은걸 어떡하나? 만나야..

말 하지도 적지도 못한 순간들 -14

환자가 떠난 후 남은 딸이 할 일

beforeLafter

#죽음 #장례
상속인 조회 서비스 조회 완료 후 한 달 정도는 은행과 보험 정리에만 매달렸다. 사실 지점이 많이 없는 곳은 5개월 여 뒤에 정리하기도 했다. 그 사이에는 자동차 등을 정리했고 건강보험공단, 연금공단, 주민센터 등을 방문했다. 상속인 조회 서비스에 나온 내역들을 한꺼번에 출력해 철 해 두고 정리될 때마다 표시해두고 어떻게 처리했는지(현금수령인지 계좌이체인지 등)를 간략하게 메모해두면 나중에 정리하기 편하다. 주민..
더 보기

타래를 시작하세요

여자가 쓴다. 오직 여자만 쓴다. 오직 여성을 위한 글쓰기 플랫폼

타래 시작하기오늘 하루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