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avourites 3. 앤 여왕

핀치 타래여성서사연극리뷰

Favourites 3. 앤 여왕

절대적으로 외로운 절대권력

타래 에디터

오, 가끔은 여왕인 것도 재밌어  

영화 <더 페이버릿(2019)> 앤 여왕  

절대권력이란 어떤 걸까. 들뢰즈와 가타리는 흰 벽과 검은 구멍으로 이루어진 ‘얼굴’의 기호학적 작용이라는 철학적 개념에 이를 비유한 바 있다. 예를 들어 유일신의 얼굴은 일방적이고 절대적인 기호체계다. 유일신의 눈, 입, 표정만이 유일한 의미를 가진다. 그 외 얼굴이 없는 존재들은 오직 유일신의 얼굴을 바라보고 뜯어보며 그 의미를 해석하고 받아들이는 것 외에 할 수 있는 일이 없다. 이런 기호체계는 소통하지 않고 군림한다.  

앤 여왕은 자신의 생각이나 감정을 감출 필요가 없다. 배경처럼 서 있던 시종에게 “지금 날 봤지? 날 봤지? 날 봐!”하고 명령했다가, 정작 조심스럽게 쳐다보자 “감히 어딜 봐!”하고 화를 내는 장면은 군림하는 기호체계 그 자체다. 애비게일이 언제나 ‘사회생활용’ 웃는 얼굴을 장착하고 자신의 진짜 생각이나 진짜 감정은 오직 독방에서만 쏟아내는 것과 대조적이다.  

군림하는 얼굴은 예민하고, 변화무쌍하다. 여왕의 표정은 ‘풍부하다’는 형용사에 다 담을 수 없다. 아이처럼 신이 났다가도 금방 울적해지고, 비명을 지르며 울부짖다가도 장난스럽게 싱긋 웃는다. 파티에서 춤을 추는 신하들을 보다가도, 궁정 뜰 안의 평화로운 연주회를 듣다가도, 여왕은 갑자기 표정이 굳기 시작하고, 발작처럼 그만두라고 소리치기 시작한다. 절대권력의 고약한 변덕일까?  

유일한 친구이자 연인이던 사라 처칠의 대사는 다른 가능성에 대한 힌트를 준다. “불행이 폐하를 따라다녔지(Tragedy had stalked her).” 사람은 감상에 빠지는 순간이면 과거의 기억들을 떠올리게 마련이다. 앤 여왕의 경우에는, 그 기억들이 견딜 수 없을 정도로 끔찍했던 건 아닐까. 기억들은 아무리 절대권력이 명령을 해도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달라지지도 않을 것이다. 그 기억과 혼자 남는 순간, 절대권력은 의미를 잃는다. 주변 모든 사람을, 영국 전체를 자기 마음대로 휘두른대도, 여왕은 절대적으로 외롭다. 그래서 사랑스럽다.

SERIES

Favourites

타래 에디터의 최신 글

더 많은 타래 만나기

말 하지도 적지도 못한 순간들 -14

환자가 떠난 후 남은 딸이 할 일

beforeLafter

#죽음 #장례
상속인 조회 서비스 조회 완료 후 한 달 정도는 은행과 보험 정리에만 매달렸다. 사실 지점이 많이 없는 곳은 5개월 여 뒤에 정리하기도 했다. 그 사이에는 자동차 등을 정리했고 건강보험공단, 연금공단, 주민센터 등을 방문했다. 상속인 조회 서비스에 나온 내역들을 한꺼번에 출력해 철 해 두고 정리될 때마다 표시해두고 어떻게 처리했는지(현금수령인지 계좌이체인지 등)를 간략하게 메모해두면 나중에 정리하기 편하다. 주민..

13. 대화하는 검도..?

상대의 반응을 보며 움직이라는 말

이소리소

#검도 #운동
스스로를 돌이켜보기에, 다수의 취향을 좋아하는 데 소질이 없다. 사람들이 아이돌이나 예능 얘기를 꺼내기 시작하면 체온이 2~3도는 뚝뚝 떨어지는 것 같다. 대화에 섞일 적당한 말이 뭐 있지? 가만히 있어도 괜찮을까? 뭐라도 이야깃거리를 던져보지만 진심이 없어서인지 어정쩡한 말만 튀어나온다. 결국 혼자 속으로 “난 만화가 더 좋아.."라며 돌아서는 식이다. 맛집에도 크게 관심이 없고, 어째 운동 취향도 마이너한 듯하고.....

말하지도 적지도 못한 순간들 -13

환자가 떠난 후 남은 딸이 할 일

beforeLafter

#죽음 #상속
장례도 끝났고 삼오제(삼우제)도 끝났다. 49재의 첫 칠일 오전, 나는 일하던 도중 이제 식을 시작한다는 가족의 연락을 받고 창가로 나와 하늘을 보며 기도했다. 부디 엄마의 영혼이 존재해서 젊고 건강할 때의 편안함을 만끽하며 여기저기 가고 싶은 곳을 실컷 다니고 있거나, 혹은 그 생명의 끝을 끝으로 영원히 안식에 들어가 모든 것을 잊었기를. 삼오제까지 끝나면 문상 와 준 분들께 문자나 전화로 감사 인사를 해도 좋..

세 사람

세 사람

이운

#치매 #여성서사
1 요즘 들어 건망증이 심해졌습니다. 안경을 쓰고서 안경을 찾고 지갑은 어느 가방에 둔 건지 매번 모든 가방을 뒤져봐야 합니다. 친구들은 우리 나이 대라면 보통 일어나는 일이라며 걱정 말라하지만 언젠가 나에게 소중한 사람들이 생겼을 때 그들까지도 잊게 되면 어떡하지 라는 생각이 들곤 합니다. 하루는 수영을 다녀오는데 그날따라 비도 오고 몸도 따라주질 않아서 바지가 젖을 것은 생각도 안하고 무작정 길가에 털썩 주저앉..

4. Mit Partnerin

여성 파트너와 함께

맥주-

#여성서사 #퀴어
여성 파트너와 함께 이성애 규범과 그 역할에 익숙해진 내가, 동성애를 하기 위한 일련의 역할들과 그 수행에 익숙해지기까지는 조금 시간이 걸렸다. 대부분의 시간에 나는 실용적- 불필요한 장식이 없고 기능에 충실한-인 옷을 입고 있기 때문에, 여가로 쓸 수 있는 시간에는 사회에서 ‘여성적’ 이라고 해석하는 복장을 하고 있기를 좋아한다. 하늘하늘하고, 레이스나 프릴이 달려 있고, 패턴이 화려한 옷들. 재미있는 것은 패턴..

비건 페미 K-장녀 #1 가족의 생일

가족들과 외식은 다이나믹해지곤 한다

깨비짱나

#페미니즘 #비건
다음주 호적메이트의 생일이라고 이번주 일요일(오늘) 가족 외식을 하자는 말을 듣자마자, 다양한 스트레스의 요인들이 물밀듯이 내 머리속을 장악했지만 너무 상냥하고 부드럽고 조심스럽게 나에게 일요일에 시간이 되겠냐고 오랜만에 외식 하자고 너도 먹을 거 있는 데로 가자고 묻는 말에 못이겨 흔쾌히 알겠다고 해버린 지난주의 나를 불러다가 파이트 떠서 흠씬 패버리고 싶은 주말이다. 이 시국에 외식하러 가자는 모부도 이해 안가지..
더 보기

타래를 시작하세요

여자가 쓴다. 오직 여자만 쓴다. 오직 여성을 위한 글쓰기 플랫폼

타래 시작하기오늘 하루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