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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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운

1  

요즘 들어 건망증이 심해졌습니다. 안경을 쓰고서 안경을 찾고 지갑은 어느 가방에 둔 건지 매번 모든 가방을 뒤져봐야 합니다. 친구들은 우리 나이 대라면 보통 일어나는 일이라며 걱정 말라하지만 언젠가 나에게 소중한 사람들이 생겼을 때 그들까지도 잊게 되면 어떡하지 라는 생각이 들곤 합니다.  

하루는 수영을 다녀오는데 그날따라 비도 오고 몸도 따라주질 않아서 바지가 젖을 것은 생각도 안하고 무작정 길가에 털썩 주저앉았습니다.  

“괜찮아? 비 오는데 왜 여기에 있어.”  

교복을 입은 한 아이가 우산을 씌어주며 다정스레 다가왔습니다. 다정한 아이를 뒤로 한 채 집에 돌아오자마자 밥을 먹습니다. 의사는 때에 맞춰 밥을 챙겨 먹어야 한다고 신신당부했는데, 요즘 통 입맛도 없고 밥도 잘 넘어가지 않습니다. 조금만 먹어도 금방 배가 부르니까 먹는 것에 관심이 전보다 많이 떨어졌습니다.  

제가 잠깐 잠이 들었나봅니다. 소파에 누워 시간을 보니 아직 7시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창문을 통해 보이는 놀이터는 텅 비어있습니다. 

아이들이 찾아주지 않는 그네와 미끄럼틀이 쓸쓸해 보여 괜시리 눈물이 날 것만 같습니다. 마음 한 구석이 휑한 것이 저들의 모습이 마치 저와 같다고 느껴지나 봅니다.   

저녁을 차리고 어디론가 전화를 해야 할 것만 같은 기분이 들어 전화기를 들어봅니다. 하지만 어디로 전화를 해야 할지 까맣게 잊어버렸습니다. 방금 전 했던 일들을 반복해보면 기억이 날까 부엌에 가보지만 여전히 기억이 나질 않아 답답할 따름입니다. 이러다가 친구들에게 너 치매냐고 놀림 받겠다는 생각에 웃음이 납니다.  

아까 수영을 다녀온 후 잠을 많이 자서 그런지 잠이 오질 않습니다. 잠이 오지 않는 밤을 혼자 견디기란 기억 속에 홀로 서 있는 것보다도 더 외로울 것 같습니다. 아무래도 수면제를 먹어야 할 것 같습니다. 외로움을 견디는 것보단 차라리 깊은 잠에 빠지는 게 좋으니까요. 하지만 수면제 통은 텅 비어있습니다. 어느새 그 많은 수면제를 다 먹은 건지 전혀 기억이 나질 않습니다. 아무래도 내일은 병원에 가봐야 할 것 같습니다.  


2  

외할머니랑은 같은 동네에 살아요. 밥 먹을 때마다 할머니 집에 들어가면 불이 다 꺼져있어요. 한 겨울에 난방도 안 틀어두세요. 그 상태로 소파에 앉아 창밖을 보고 우두커니 앉아계세요. 할머니에게 세상은 4개의 창문으로 보이는 바깥, 그게 다예요. 가끔 저녁을 먹으러 할머니 댁에 가곤 하는데 다들 바쁘다고 잘 안 가긴 해요. 오늘은 가야지 하다가도 귀찮기도 하고 할머니가 전만큼 요리를 안 하셔서 잘 안 가는 것도 있어요. 요즘엔 할머니가 자꾸 깜빡깜빡 하시고 방금 했던 질문을 다시 하시기도 해요. 가족 모두가 부정하고 있었지만, 냉정한 의사 선생님은 정답을 말씀해주셨어요. 그래도 우리는 계속 의사 선생님이 틀렸다고 믿고 싶고, 흐르는 시간마저도 부정하고 싶을 뿐이에요. 할머니의 기억 속에 할머니만 혼자 남아 있는 날이 올까봐 걱정돼요. 

학교를 마치고 집에 돌아오는데 외할머니가 길바닥에 앉아 있었어요. 비가 오는데 우산도 안 쓰고 계셔서 깜짝 놀라 우산을 씌어주며 여기서 뭐하냐고 물어봤는데, “참 다정하시네요. 고마워요.” 라고 하시더니 집으로 들어가시더라고요. 멍하니 길바닥에 서 있다가 할머니 집에 들어가 밥을 달라고 했더니, “진이 왔냐? 얼른 밥 줄게. 할머니는 수영장 사람들이랑 밥 먹고 왔다.” 라고 하시더라고요. 

안도의 한숨을 쉬었어요. 할머니도 밥을 같이 드셨어요.  

“할머니 밥 먹었다며, 일부러 나랑 같이 먹는 거야?”

“내가 언제? 나 밥 안 먹었는데? 근데 요즘 밥이 잘 안 넘어가. 조금만 먹어도 배가 불러.”  

할머니의 기억이 오래 쓴 전구처럼 깜빡 거릴 때마다 저는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제가 할머니를 기억한다고 해서 할머니의 기억 속에 제가 영원히 남아 있는 게 아니잖아요.  


3  

엄마 또 잤어? 자꾸 그렇게 낮잠 많이 자면 밤에 또 못 자고 수면제 먹잖아, 집에만 있지 말고 나가려고 해봐. 해를 좀 봐야 밤에 잠을 잘 잔대. 진이 아까 만났다고 하던데, 그것도 기억 안 나? 진이랑 밥도 같이 먹었다며. 기억을 자꾸 하려고 해봐야지, 무작정 기억이 안 난다고만 하면 어떡해. 엄마가 그러니까 계속 상태가 안 좋아지는 거라고. 약은 먹었어? 약은 또 왜 안 먹었어. 약을 챙겨 먹어야 병원 가서 다시 진찰을 받지. 진짜 왜 그래 엄마? 돈은 어디다 뒀어? 훔쳐가긴 누가 훔쳐가. 가방 잘 찾아봐. 혹시 옷장에 있지 않나 또 찾아보고. 대체 맨날 정신을 어디다 두고 다니는 거야. 엄마,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살아야 돼. 

엄마가 건강해야 여행도 가고 맛있는 것도 먹으러 가지. 엄마보다 시어머니가 더 건강할 때마다 나는 속이 문드러져 가. 그러니까 시간 좀 붙잡고 지금보다 더 아파지지 말자, 엄마.  


- 나 요즘에 엄마 땜에 미쳐버리잖아. 엄마 치매가 와가지고 정신이 이상해졌어. 저번에는 장을 한가득 보고는 집에 못 오니까 나한테 전화를 하는 거야. 내가 회사에서 어떻게 가냐고. 그냥 택시타고 다니라니까 그건 또 싫대. 노인네 고집은 또 세서 나만 골치 아프게 만들어. 저번에는 힘이 없다고 영양제를 맞고 싶다고 하는데, 밥을 먹고 고기를 먹어야지 그런 건 안 먹고 영양제만 맞으면 힘이 나냐고. 돈은 또 맨날 어디다 숨기는 건지, 수영장에서 누가 훔쳐갔다 그래서 내가 수영장까지 가서 오해 풀고 난리도 아니었다니까. 아니 누가 훔칠까봐 자기가 숨겨두고 그걸 기억을 못하니까 애꿎은 남만 의심하는 거지 뭐. 모르겠어, 그런 것도 치매 증상의 일종이라고는 하더라고. 우리 집에서 같이 살면 좋겠는데, 그건 또 싫대. 아니 애들도 할머니 좋아하고 이러는데 왜 그건 또 싫다고 하는지 몰라. 하나밖에 없는 아들 집에서 살고 싶은 건지, 사위 있는 집에서는 못 살겠다는 건지, 요즘 누가 그런 거 가지고 흉을 보냐고. 우리 엄마가 원래 남 시선 의식 많이 하잖아. 그 버릇이 여전히 남아 있는 거지. 저번에는 엄마 집 들어갔더니 그냥 멍청하게 앉아만 있더라니까. 사람이 아무 의욕도 없고, 눈도 퀭하고 이제 살 일이 얼마 안 남았나봐. 시어머니는 전국팔도 돌아다니면서 아주 쌩쌩한데, 우리 엄마만 이러니까 내가 더 억울한 기분이 드는 거야. 어쩌겠어, 뭐라도 해봐야지. 너희 어머니도 저번에 영양제 맞으러 갔다 하지 않았니? 나 거기 전화번호 좀 알려줘. 그래도 예약은 해 보게. 맞아보고 효과 있으면 좋고, 아니면 어쩔 수 없는 거지. 그래, 다음에 또 전화할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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