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유 없이 슬픈 날이 있다. 마치 마음에 눈물이 맺혀있는 듯한 날. '울멍한' 기분. 그런 단어가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 단어만 내 마음을 대변할 수 있었다. 그런 날은 힘이 없어 아무리 잠을 자도 눈이 또 감겼다. 꿈속에서는 나를 대신하여 비가 내리고 있었다. 아무 색도 없이 널브러져 있는 우산들 사이에서 유일하게 파란색을 품은 우산 뒤에는 아이가 앉아있었다.
“얘, 여기서 뭐하고 있니?”
“비가 오는 날이 싫었는데, 오늘은 괜찮은 거 같아. 우산 뒤에 숨을 수가 있잖아.”
“그게 무슨 말이야?”
“남들이 하는 대로 했을 뿐인데, 자꾸 이상하게 쳐다보니까 피하고 있는 거라고. 혹시 너도 나와 같은 입장이라면 얼른 우산 안으로 들어와.”
얼떨결에 앉은 우산 속은 한기가 느껴졌다.
“집은 어디야?”
“내 집은 여기에 없어. 여긴 정말 필요한 사람들에게만 열리는 곳이니까.”
“무슨 소리인지 이해가 안 가는데”
“당연하지. 나도 처음에 그랬으니까. 난 일이 바빠서 먼저 가볼게.”
비는 계속 내리고, 이미 사라진 아이의 말은 모두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비는 몰아치듯 쏟아지고 있고, 여기에서는 이 안이 비를 피할 수 있는 최적의 장소인 것 같았다.
한참동안 빗소리를 듣고 있었는데, 그 아이가 다시 찾아왔다.
“뭐야, 아직도 나갈 방법을 못 찾은 거야?”
“나갈 방법이 있었어? 그냥 시간이 지나면 나갈 수 있는 건 줄 알았는데.”
“하.. 이런 멍청이가 또 오다니. 여기 쓰러져 있는 우산들은 여기서 떠나지 못한 사람들의 영혼이야. 비를 피해 여기에 왔다가 평생 비를 맞으면서 살고 있는 영혼들이라고. 너도 저렇게 되고 싶은 거야?”
“비를 피해 왔다고? 난 피곤해서 잠을 자고 싶었던 것뿐이야.”
“답답하긴. 여기에 왜 왔는지부터 시작해봐.”
“근데 너는 왜 다시 온 거야? 아까 나간 거 아니었어?”
“맞아. 하지만 난 여기를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어. 겸사겸사 여기 관리도 하는 거지. 아무튼 난 다른 멍청이나 보러 갈래. 네가 나갈 때가 되면 다시 찾아올게.”
‘멍청이라니, 그런 말은 나만 할 수 있어.’
누가 하던 말이었지? 입버릇처럼 ‘나는 멍청이야,’ 라고 자책할 때마다, 옆에서 위로랍시고 해주던 말 같은데. 꿈속이라 그런지 모든 것이 희미하다. 투둑투둑. 우산 위로 떨어지는 빗소리가 편하다. 오늘만큼 빗소리가 아늑하게 들린 적도 없는 거 같아. 이 곳에서 나갈 즈음이면 그치려나. 하긴 세상에 영원한 건 없으니까 그치기야 하겠지. 내가 사랑하는 모든 것들은 영원히 지속되지 않는다면서 한탄했잖아. 사람들과 행복했던 시간, 좋아하는 음악을 처음 들었을 때의 전율, 내 마음이 문장으로 표현됐을 때의 감동, 모두 다. 그래서 나는 사랑한다는 감정을 부정하고, 사랑하는 마음을 기록하려고 하지 않았고, 결국 그들이 지나간 후 혼자 남아있을 때마다 나를 탓했어. 왜 그렇게 예민하게 굴었어, 원래 나는 모든 것에 금방 질려, 여기까지가 내 한계인 걸. 그래, 이 모든 건 내가 나이기 때문이야. 그 생각을 하는 내내 뇌까지도 긴장을 해서 누군가 자꾸 내 뇌를 조이는 기분이었는데, 그 기분은 썩 좋지 않았어. 모든 일에 내 탓을 하는 건 나의 특기이자 습관이라고 생각했는데, 그리 좋은 능력은 아니었네. 아무리 탓하고 또 해봐도 슬픔이 긴장을 풀지 않아서, 매일을 수심 깊은 물 한 가운데에 잠겨 있는 채로 보냈으니까. 거기에 있으면 눈물을 흘려도 다른 물에 섞일 테니까 내가 있어야 할 곳이라고 착각했어. 어떤 일이 있어도 괜찮다고 말할 수 있었고, 내가 좀 무뎌져야 한다고 생각했어. 어차피 내 잘못이라서. 그런 식으로 꼬리에 꼬리를 물다 보니 여기에 왔나봐.
“자기한탄 좀 그만해.”
“응? 뭐라고?”
“네가 왜 여기까지 왔는지 생각해보라고 한 거지, 또 네 탓을 하고 있으란 건 아니었어. 모든 일에 너의 잘못만 있다고 말하는 네 목소리를 들으니 귀가 아파서 참을 수가 있어야지. 그렇게 행동하고 생각할 만 했다고 너 스스로에게 말해줘도 누가 뭐라 안 그래. 남에게 사랑받지 못할까봐 겁 내지 말고, 너마저도 너를 사랑하지 못할 걸 두려워 해보라고. 그리고 너에게 멍청이라는 말은 어울리지 않아. 그건 나만 쓸 수 있는 말이니까.”
퉁명스러운 말투와 문장들 속엔 따뜻함만이 가득했다. 그리고 그 온기를 느끼자마자 긴장이 풀어져 어깨가 축 늘어졌고, 더 이상 비는 나를 대신해 내려주지 않았다. 진작 이렇게 울었어야 했나보다. 지금까지 나는 울 일이 없어서, 울 때가 아니라서, 혹은 내 마음을 내 자신이 돌보지 못해서, 그래서 울진 못하고 삼켜두기만 했을 지도 모른다.
진정이 될 즈음 그 아이는 주황색으로 변한 우산을 접으며 말을 건넸다.
“기억하지 못하겠지만, 넌 종종 여기에 와서 오늘처럼 펑펑 울다 가곤 했어. 아마 오늘 여길 떠나면 또다시 기억을 못하겠지만, 너를 위해서라면 언제든지 여기로 찾아와도 좋아. 대신 너의 심장을 쥐어짜면서까지 슬픔을 참진 말아줘. 그게 내 마지막 부탁이야.”
“나 마지막으로 질문이 있어. 그럼 내가 이런 상황에 처할 때마다 네가 날 불렀던 거야? 그래서 내가 여기로 도망쳐오게 된 거구. 나만 있을 수 있는 공간으로 말이야.”
“그럴 리가. 아까도 말했지만 여기는 필요한 사람들에게만 열린 공간이라, 내가 부른다 해도 들어올 수 없는 곳이야. 들어오는 방법, 때 같은 건 자기 자신만 알지. 물론 모두가 매일 잊고 살지만. 그러니까 다들 모르면서도 알고 있고 뭐 그런 거지. 이해하기가 어렵지? 한 가지 확실한 건, 넌 도망친 게 아니야. 이 시간이 필요해서 직접 찾아오게 된 거지.”
“다음에 다시 와도 널 만날 수 있을까? 이름이라도 알려줘, 널 잊고 싶지 않아. 아니면 이 우산이라도 갖고 있어줘.”
“고마워, 안녕.”
아이가 우산을 잡는 순간 난 그곳에서 나올 수 있었고, 그 이후엔 다른 꿈을 꾸었던 것 같다.
눈을 떴을 땐 마음이 개운해진 기분이었다. 그 아이가 이름을 말했던 거 같은데, 얼굴은 어떻게 생겼더라, 그 어느 때보다도 생생한 꿈이었는데 그새 기억이 사라졌다. 하지만 우산을 쓸 때마다 그 아이가 떠오른다. 툭툭거리면서도 애정 가득한 말투와 우산 뒤에 숨을 수 있어 비가 좋아졌다는 그 이유도 말이다. 그 덕분에 나도 비 오는 날이 좋아지면서도, 우산을 쓰면 또 어쩔 수 없이 마음이 '울멍울멍'해진다. 그냥 그 단어만이 내 마음을 설명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