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가 처음이라서

핀치 타래퀴어여성서사엄마

엄마가 처음이라서

내 딸의 비밀

이운

엄마가 처음이라서 얼마 전 남동생이 내 딸이 SNS하는 거 아냐며 링크를 보내주었다. 딸의 뒤를 파헤치는 것 같은 죄책감을 뒤로 하고 클릭한 SNS에는 딸이 읽은 책에 대한 소감, 친구들과 떠난 여행 사진, 그 외에도 내가 알지 못하던 이야기로 가득했다. 말 그대로 온 몸이 서늘해지는 것 같았다. 상상해본 적도 없는 딸의 모습을 보니 낯설기도 하고, 내가 이렇게나 딸을 몰랐던가, 우리는 나름 대화가 많은 모녀지간 아니었나 하는 생각에. 일종의 배신감 같은 거였을지도 모르겠다. 왜 나한테 숨겼을까.  


딸은 나에게 사소하고도 당연한 질문들을 많이 했다. 그래서인지 여전히 애기 같고, 사회에서 적응은 잘 할 수 있을까, 강가에 어린아이를 내놓은 마냥 불안할 때가 많았다. 그럴수록 나는 딸의 모든 것을 꿰뚫고 있음에 틀림없다고 자부했고, 내 딸이 그 비난 대상이 될 리는 없다고 당연하게 여겼다. 하지만 아무 생각 없이 혐오하고 비하를 하며 날린 화살들은 딸에게 향해 있었다. 내가 그동안 당연하다고 여겼던 것들, 절대 틀릴 수 없는 생각이라고, 내가 잘못되었다고 고민해본 적도 없는 생각들이 머릿속을 스쳐가며, 필터 없이 내뱉은 말들에 딸은 어떻게 반응 했던가 되짚어보았다. 딸은 별 말을 하지 않았던 것 같다. 사실은 생생하게 그 상황들이 떠오르지 않는다. 나는 그만큼 확신에 찬 목소리로, 어쩌면 그들에겐 이기적으로, 내가 틀리다는 것들을 혐오하고 비난해왔던 것이다. 그러니 그 애가 아무런 반응도 할 수 없었던 거겠지.


딸이 어느 순간 내 키를 따라잡은 만큼, 생각도, 행동도, 모든 게 나보다 앞서가 있었던 것 같다. 가끔은 딸이 성장하는 속도가 빨라서 그 속도를 따라가기가 너무 벅차다고 느낄 때가 있다. 그러니까 바로 오늘 같은 날에 말이다. 아니 내 멋대로 한계선을 짓고, 색안경을 껴서 딸을 바라보고 있었던 건가.  

아, 나는 딸이 기대기엔 부실한 엄마일지도.  

딸에게 언제부터 이런 일을 하게 된 거냐 그 애의 이야기를 들어봐야 할지, 아무것도 보지 못한 척, 모른 척 넘어가야 할지, 그렇구나 너도 엄마에게만큼은 숨기고 싶은 이야기들이 있겠다 이해한다고 해줘야 할지 마음을 잡을 수가 없다. 다른 엄마들은 이런 걱정 안 하나, 내가 훌륭한 엄마였다면 이런 일은 없었을까, 이럴 땐 대체 어떻게 행동하는 것이 엄마로서 잘한 일인지 알려주는 사람이라도 있음 좋겠다. 딸에게만큼은 완벽한 어른이고 싶고, 딸도 나를 그렇게 생각해 주기를 바라왔는데, 흠 하나 없는 엄마가 되기에는 아직도 부족하다. 나도 이제 어느 정도 엄마로서 역할은 다 했다고, 남들에게 그 나이 때 애들은 다 그렇다고 걱정 말라며 여유를 부렸는데도, 여전히 나는 모르는 게 많다. 여전히 나는 처음인 일이 너무나도 많다.

이운의 최신 글

더 많은 타래 만나기

말하지도 적지도 못한 순간들 -12

환자가 떠난 후 남은 딸이 할 일

beforeLafter

#죽음 #장례
끝났다. 사흘 간의 지옥같고 전쟁같고 실눈조차 뜰 수 없는 컴컴한 폭풍우 속에서 혼자 소리를 지르는 것 같았던 시간이 끝났다. 끝났다는 것이 식이 끝난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이 더 절망스럽다. 불과 사흘 전만 해도 물리적으로 사회적으로 엄연히 존재했던, 60여년을 살았던 한 '사람'을 인생을 제대로 정리할 시간조차 갖지 못한 채 후루룩 종이 한 장으로 사망을 확인받고, 고인이 된 고인을 만 이틀만에 정리해 사람..

[제목없음] 일곱 번째

누군가를 만난다는건.

제목없음

#여성서사
누군가를 만난다는건 참으로 어렵다. 나같은 경우에는 끊임없이 되물어봤다. 그리고 의심했다. '저 사람은 만나도 괜찮은걸까?' '내가 착각하고 있는건 아닐까?' 처음에는 설레기도 하고 잘 맞는 사람이라고 생각이 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안한 마음은 사라지지 않는다. 과연 내가 누군가를 만나도 괜찮은걸까? 순간의 감정으로 선택한 것은 아닐까? 꼬리에 꼬리를 물다가 결국에는 좋으니까로 결론이 난다. 좋은걸 어떡하나? 만나야..

어머니는 나를 엄마,라고 불렀다

'딸'이 되고싶은 딸의 이야기

설화

#여성서사
"엄마~" 어렸을 때부터 생각했다. 내가 엄마같다고. 하지만 이렇게 엄마의 입에서 직접적으로 불려지니 더욱 비참하고 씁쓸했다. 딸로서 행동할 수 있는 자그마한 가능성마저 먼지가 되어서 저 한마디에 그러모아놓은 것들이 모두 사라졌다. 이제껏 자라오면서 의지한 적이 없었다. 중학교 1학년 때였나. 학교에서 중국으로 일주일 정도 여행 겸 학교체험을 가는데, 배를 타기 전 엄마와의 전화통화에서 "가스불 잘 잠그고 문 단속 잘하..

4. Mit Partnerin

여성 파트너와 함께

맥주-

#여성서사 #퀴어
여성 파트너와 함께 이성애 규범과 그 역할에 익숙해진 내가, 동성애를 하기 위한 일련의 역할들과 그 수행에 익숙해지기까지는 조금 시간이 걸렸다. 대부분의 시간에 나는 실용적- 불필요한 장식이 없고 기능에 충실한-인 옷을 입고 있기 때문에, 여가로 쓸 수 있는 시간에는 사회에서 ‘여성적’ 이라고 해석하는 복장을 하고 있기를 좋아한다. 하늘하늘하고, 레이스나 프릴이 달려 있고, 패턴이 화려한 옷들. 재미있는 것은 패턴..

주접

플레잉 카드

헤테트

#플레잉카드 #트럼프카드
버드 트럼프Bird Trump 원고를 하고 있는데 택배가 왔다. 까마득한 언젠가 텀블벅에서 후원한 플레잉 카드 (=트럼프 카드) ! 원래 쟉고 소듕한 조류를 별로 안 좋아하는데 (맹금류를 제외한 새를 무서워하는 편) 이건 보자마자 이성을 잃고 냅다 후원해버렸다. 그 뒤로 잊고 살았는데 오늘 도착. 실물로 보니 과거의 나를 매우 칭찬해주고 싶다. 아름답지 않은 구석이 없어, 세상에. 하다못해 쓸데없이 많이 들어있는 조..

말하지도 적지도 못한 순간들 -13

환자가 떠난 후 남은 딸이 할 일

beforeLafter

#죽음 #상속
장례도 끝났고 삼오제(삼우제)도 끝났다. 49재의 첫 칠일 오전, 나는 일하던 도중 이제 식을 시작한다는 가족의 연락을 받고 창가로 나와 하늘을 보며 기도했다. 부디 엄마의 영혼이 존재해서 젊고 건강할 때의 편안함을 만끽하며 여기저기 가고 싶은 곳을 실컷 다니고 있거나, 혹은 그 생명의 끝을 끝으로 영원히 안식에 들어가 모든 것을 잊었기를. 삼오제까지 끝나면 문상 와 준 분들께 문자나 전화로 감사 인사를 해도 좋..
더 보기

타래를 시작하세요

여자가 쓴다. 오직 여자만 쓴다. 오직 여성을 위한 글쓰기 플랫폼

타래 시작하기오늘 하루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