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났다.
사흘 간의 지옥같고 전쟁같고 실눈조차 뜰 수 없는 컴컴한 폭풍우 속에서 혼자 소리를 지르는 것 같았던 시간이 끝났다.
끝났다는 것이 식이 끝난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이 더 절망스럽다.
불과 사흘 전만 해도 물리적으로 사회적으로 엄연히 존재했던, 60여년을 살았던 한 '사람'을 인생을 제대로 정리할 시간조차 갖지 못한 채 후루룩 종이 한 장으로 사망을 확인받고, 고인이 된 고인을 만 이틀만에 정리해 사람들을 부랴부랴 불러모아 인사를 시키고, 어떻게 돌아가셨는지 생전에 어떤 분이셨는지 근황이 어땠는지를 염불하듯 읊다가 마지막 날에는 불에 태워 항아리에 담아 시립관리공단에 두고 오는 모든 과정이 끝났을 뿐이다.
이제 곁을 지켜주던 친구들과 친척들이 돌아가고, 같이 울어주던 그들이 갖고 있던 슬픔의 그늘마저 옅어지면 남은 그리움과 슬픔은 유족들만의 것이 된다는 사실이 너무나 무서웠다.
화창한 가을 오후 한 시 쯤 병원에서 모든 걸 정리한 후 장례식장을 나섰다.
여성 유족들의 머리에는 흰 리본이 매달려 있다.
나는 일 할 때를 제외하고는 석 달 정도 이 머리핀을 하고 다녔다. 차량 대시보드 커버에도 하나 끼워두었다. 안정감이 들었다.
끝까지 마지막을 지켜주었던 사랑하는 친구는 봉안당에서 헤어졌다. 데리고 가 식사를 꼭 대접하고 싶었지만 그에게도 일정이 있었고, 돌이켜보면 친척들 우글대는 곳에서 같이 식사하기 얼마나 불편했을까 싶었다. 마음만 앞섰던 것이 못내 미안했지만 즉각 보답하지 못하는 것도 너무나 미안했다.
다른 집들은 어떻게 하는지 모르지만, 친할머니가 돌아가셨을 때도 납골당에서 모든 일정을 마친 뒤 다같이 식사를 했던 기억이 있어 나도 급하게 장례식장에서 멀지 않은 곳의 식당을 알아보았다. 화장터에서 화장 중 대기실에서는 이런저런 얘기를 하며 한 시간 정도 시간이 나기 때문에 그 곳에서 여기저기 식당을 검색했다.
다들 직장과 가정이 있어 그만큼 빼기가 정말 힘들었을텐데도 사흘이나 시간을 내 끝까지 함께 해 준 사촌들과 고령의 나이에도 첫날부터 먼 곳에서 달려와 사흘이나 엄마 곁을 지켜 준 고모들께 너무나 감사했다.
다행히 장례식장 근처에 좋은 가격에 후기도 좋은 한정식 식당이 있었다.
음식이 무척 맛있어서 면목이 없을 일은 다행히 없었다. 정말 면목이 없었던 것은 이 곳에서의 식대마저도 사촌오빠가 대신 내 주셨다는 것.
나는 할머니 장례식 때 고모들이 마지막 날 정산된 부의금을 쪼개 아빠에게 쥐어주셨던 것을 기억한다. 나는 아무것도 해드리지 못했는데 다정한 친척을 둔 복으로 마지막까지 신세를 진다는 사실이 너무나 부끄러웠다.
환자가 지내다가 119까지 급하게 왔다가 간 집이 깨끗하진 않지만 멀리서 온 친척들께 차라도 대접해야 했기에 집으로 모셨다.
서울에 갈 예정이어서 청소도 제대로 안 되어 있었고 편하게 앉은 자리에서 모든 물건을 집을 수 있게끔 둥지가 만들어진 엄마의 어지러운 자리가 다시 사흘이라는 짧은 시간을 실감케 했다.
안정기 고장과 전기 문제로 어두운 곳곳의 전등들과 여기저기 고장난 집을 보며 친척들이 모두 걱정의 한 마디를 하셨다. 그래도 확장된 베란다가 널찍하고 화분들도 멋있다며 꼭 좋은 말씀을 해 주셔서 민망하지만은 않았다. (이 문제의 전등들은 몇 달 후 교체하였다.)
천천히 정리하고, 이제 네가 가장이 되었으니 새롭게 잘 꾸미고 살으라며 독려해 주셨다. 우리 힘들겠다시며 한 시간도 채 안 앉아계시다 모두 떠나셨다. 나는 그 많은 사람들이 한꺼번에 집에 돌아가던 순간의 무서움이 아직도 문득 떠오르곤 한다.
장례가 끝나면 같이 함께 해 준 친척들과 친구들에게는 마음을 다 해 감사와 성의 표시를 하도록 하자. 그래야 후회가 남지 않는다!
엄마 없는 집에 할머니와 아빠, 그리고 우리 자매들과 영문도 모른 채 놀라 있는 고양이들만이 남았다.
엄마가 누웠던 이부자리에는 어쩐지 곧잘 이불에 똥을 잘 싸곤 하던 고양이조차 사흘동안 아무런 흔적조차 남기지 않았다.
장례식장에서 가지고 온 물품들과 이불들을 정리한 뒤 저녁이 가까운 시간 모두 순식간에 몰려오는 피로를 이기지 못하고 거실에서 다같이 잠이 들었다. 너댓시간을 꼬박 잤다.
온 몸 위로 축축한 어둠이 짓누르는 듯한 무겁고 기분나쁜 피곤이 아직도 생생하다.
눈을 떴을 때는 어두운 저녁이었다.
엄마가 없이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지나고... 그 날짜에 고정된 시간을 기준으로 몇 달을 셌다.
다시 일하러 가기까지는 이틀 남짓이었다.
어떻게 식사를 해결했는지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만지는 모든 물건마다 숨을 불어넣는 할머니는 잘 보이시지도 않는 눈으로 내가 없는 시간마다 여기저기 광을 내고 다니셨다.
할머니는 어릴 때부터도 나의 엄마였지만 엄마가 없어진 지금 유일하게 기댈 수 있는 어른이었다.
할머니는 3주 가량 우리 집에 머무셨다.
내가 거짓말로 말 한 '엄마의 병간호' 가 끝날 때까지를 대략 계산해 챙겨 온 약들이 떨어져 갈 때 즈음 내려가셨다.
3주 동안 엄마의 삼우제(삼오제), 49재 중 첫 칠일 두 번째 칠일재를 같이 지냈고, 뷔페에서 할머니의 늦은 생신상을 함께했다.
삼우제는 고인이 떠난 지 닷새, 발인한 날 이틀 뒤에 간단하게 치러진다.
간단한 과일과 포, 떡, 생전 좋아하던 음식을 갖고 납골당에 가서 가족들끼리 약식으로 제사를 지낸다.
봉안당은 안에 음식물 반입이 일체 금지되는 추세이고 제사를 지낼 수 있는 곳은 밖에 공동으로 따로 마련되어 있다.
밖에서 제를 지내고 봉안당에 들어가 인사를 하고 나오는 방식이다.
삼우제는 보통 이렇게 간단하게 제를 지낸 후 고인의 혼백이라 일컬어지는 삼베와 청홍실로 싸인 지방, 그리고 영정사진의 검은 띠를 같이 태우는 것으로 마무리된다.
납골당에서 삼우제를 지낸 후 엄마가 평소 좋아하던 풍광이 아름다운 절에 들러 한 바퀴 돌았다. 그 절에 있는 소위 '보살님' 은 영정사진을 보고 어떻게 오셨냐며 묻더니 꼬치꼬치 '막칠일(49재)은 해야하지 않냐, 저기 스님에게 상담해 보라' 며 몇 번이나 물었다. 삼우제라고까지 말했는데도 가족 잃은지 닷새밖에 되지 않은 가족에게 49재 영업을 하다니 대단하다는 생각과 함께 다시는 이 곳에 발길하지 않으리라 생각하며 돌아섰다.
혼백과 영정사진 띠는 결국 집 뒤편 주차장 외벽에서 태우게 되었다. 납골터마다 혼백을 태우게 해 주는 곳도 있다고 하니 삼우제를 지낼 가족이라면 꼼꼼히 알아보시는 편이 좋겠다.
경비원께 허락을 받고 태웠는데 바람이 불어서인지 참 잘 탔다.
누가 돌아가셨냐는 물음에 엄마..하고 울음섞인 대답을 하자 아..하시고는 가서 잘 태우라고만 해주신 게 아직도 감사하다.
삼우제를 지내고 나면 49재와 천도재에 대한 고민이 들기 시작한다.
모든 게 다 허례허식이다 하게 되면서도 연로하신 할머니의 마음도 달래야 하고 또 안 하자니 괜히 마음 한 구석이 찜찜한 관혼상제...
참고로 49재와 천도재는 하는 곳마다 다르지만 삼백에서 천 만원까지도 우습게 돈이 드는 큰 행사다. 하루 종일 음식을 차려놓고 염불을 하고 지전(저승길 노잣돈으로 이 지전값이 꽤 든다)을 태우는 등 곳에 따라 사흘에 걸쳐 하기도 한다.
염불값을 따로 받는 곳도 있고 49재에 대해 집요하게 영업했던 곳도 마찬가지지만 거금이 드는 큰 행사인데다 눈에 보이지도 확신할 수도 없는 '저승가는 길'에 대한 유족의 불안감이 볼모로 잡힌 것이나 마찬가지라 49재와 천도재를 하면서 금액으로나 주관하는 곳의 태도 등에 마음이 다치는 유족들도 많다.
여유가 있는 유족은 49재와 천도재를 전부하기도 한다. 이 경우 매 7일마다 절 등에서 알아서 제삿밥을 차리고 기도를 해 준다. 마지막 49재에는 유족도 참여해 크게 행사를 한다.
천도재는 49재보다 훨씬 규모가 크고 지전값이 많이 드는데, 워낙 거금이 들어 생략하는 집도 많다.
삼우제 때까지만 해도 49재 정도는 어디 좋은 절에서 해 줄까 하고 고민하다가 풍광이 예쁜 그 절에서 그런 태도를 보고나니 마음이 팍 식어 그래 49재는 우리끼리 하자! 하게 되었다.
실제로 검색해 보면 형편이 못되어, 절의 태도에 환멸이 나서, 다 쓸데없는 짓이라, 마음이면 충분하니까 등의 이유로 간소하게 49재를 집에서 하는 집들도 꽤 많다.
마음이면 충분하다. 가족끼리 마음을 다해 빌어주면 있을지도 모르는 엄마의 영혼은 좋은 곳에 쉽고 빠르게 갈 것이다.
우린 첫 칠일부터 49재까지 온전히 우리끼리 했다. 그냥 제사 지내듯이 했다. 엄마가 좋아하던 음식들을 차려서.
그리고 매 끼니마다 소반에 엄마 상을 봐서 영정사진 앞에 두었다.
이건 사실 아직까지도 하고 있다. 대충 먹는 날에는 못하더라도 되도록 저녁만큼은 차리려고 하고 있다.
첫 칠일날 새벽
나는 꿈을 꿨다.
내가 아기 때부터 고등학생 때까지 오래 살았던 옛날 집 엄마아빠 방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부엌쪽 작은 방이라 빛이 잘 안드는 곳인데 꿈에서는 창을 향해 환한 햇빛이 들어오고 있었고 엄마는 떠나기 직전의 작고 마른 몸으로 앉아 창으로 들어오는 햇빛을 받으며 아주 편안하고 크게 하품을 하고 있었다.
내가 "엄마, 살아있었네!" 하고 외치며 다가가자 엄마는
"아이구 우리 이쁜 내새끼" 하며 나를 안아주었다.
우리에 대한 애정은 많아서 공주나 이쁜 딸 같은 말은 했어도 생전 내새끼라는 말은 않던 엄마였는데.
나는 엄마랑 끌어안고 좋아하다가 엄마를 안고서 여기저기를 다녔다.
그러다 엄마는 돈까스가 먹고 싶다고 했다.
엄마가 가기 전에 우리 가족이 시켜먹고서 무척 만족해 자주 시켜먹었던 시장의 배달 돈까스집이 있었는데 거길 말하는 거였다.
첫 칠일은 물론 매 칠일은 내가 다시 출근해 일 할 시간이었어서 오전 11시경 가족들끼리 지냈다(칠일재는 오전에 지낸다고 한다.).
그 날 저녁 우린 돈까스를 시켜먹었다.
엄마 몫도 당연히 시켜서.
정말 살아있다면 얼마나 좋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