둘째 날은 장례식장이 가장 바쁜 날이다.
부고를 받은 손님들이 마지막으로 고인에게 인사를 할 수 있도록 일정을 최대한 조율하여 방문하는 날이 대개 장례의 둘째 날이다. 그렇기에 가장 늦게까지 빈소가 열려있기도 하다.
우리 빈소도 거의 자정에 다다른 시간까지도 먼 길을 달려 온 손님들이 들러주었다.
잠도 자는 둥 마는 둥 하다가 울리는 머리를 부여잡고 꺠면 빈소의 식사 도우미 분들이 미리 식사를 챙겨, '드시고 얼른 또 하루 시작하셔야 한다' 며 상을 봐 주신다.
이 때도 현실감은 없다. 영안실로 달려가 문을 열어젖히고 엄마를 흔들어 깨워보고 싶었다.
앞으로 내 생애 엄마가 없는 세상의 첫 하루가 밝았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나는 엄마 없으면 바보같은 앤데 들르는 모든 어른들이 내게 '이제 네가 가장이다' 라며 어깨를 두드리는 상황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어떤 상황에서도 엄마가 마지막에 숨을 넘겼던 그 지옥같은 장면이 머릿속에서 반복되었다. 끊임없이 끊임없이.
책에서나 보았던 '단말마' 라는 단어의 소리.
'악 - ' 하는 그 짧은 소리가 계속 머릿속에서 울렸다. 풀려서 감기지 않던 눈동자가 계속 생각났다. 아프다며 어떡하냐며 악악악악 하던 그 순간 엄마가 겪었을 고통과 숨이 끊어지던 순간 떠올랐을 수많은 생각들을 자꾸 상상하게 되었다. 엄마가 얼마나 당황했을까 얼마나 발을 동동구르고 있을까 하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울면서 밥을 먹고 빈소에 가서 머리를 뜯어가며 울고 손님이 오면 또 반짝 웃고 또 우는 오전이 다시 시작된다.
생각보다 이른시간부터 손님들이 몰려온다. 먼 곳에서 오는 친척들이며 하루 연월차를 내고 달려 온 친구들이 다들 신발을 벗기도 전부터 유족의 이름을 부르며 울면서 들어온다.
사무실에서 일을 보고 왔는데 엄마의 전 직장 동료분들이 와 계셨다.
돌아가시기 꼭 한 달여 전에 엄마와 나를 만나, 통이 터질듯이 가득 김치와 - 나중에 집에 와 보니 진짜로 김치통이 터져 있었다!! ㅋㅋㅋ - 무말랭이를 잔뜩 주셨던 고마운 간호사께서 나를 보더니 '아이고 무슨 일이야 무슨일이야' 를 외치시며 달려와 안아주셨다. 곧 같이 일 할 날만을 손 꼽으며 조만간 자주 가던 삼계탕 집에 가서 밥을 먹자던 약속을 했던 엄마가 이렇게 떠나버렸다. 고마운 분 품에 안겨 실컷 또 울었다.
아빠의 상태를 아는 친구들이 아빠까지 챙겨 안부를 물어주고 도울 일이 있으면 무엇이든 말하라며 든든하게 등을 두들겨 주었다.
일하는 직장에서도 전 동료와 당시 같이 일했던 동료들이 같이 와 주었다. 친구들이 앞서 들어오는 바람에 입구에 그 분들을 세워두고 울었던 게 송구했다.
멀리서 달려 온 친구는 오후 늦게까지 있어주며 우리 할머니와 함께 병원 산책을 해 주기도 했다. 할머니는 걸으면서 엄마가 얼마나 튼튼하고 건강한 아기였는지, 얼마나 착한 딸이었는지를 계속 얘기했다. '효도할테니 오래오래 사세요' 라며 울더니 이렇게 상상도 못하게 가버릴 줄 몰랐다며 한숨을 계속 쉬신다.
할머니에게 엄마가 죽었다는 걸 숨기고 전화했을 때 '죽을 쑤어 지금 식히느라 안 자고 있었다.' 는 말이 자꾸 생각났다. 나중에 엄마가 자리를 털고 일어나면 주려고 소분해 냉동실에 차곡차곡 넣어 두었을 죽 봉지들이 눈 앞에 어른거리는 듯해 가슴이 아렸다.
'단지 씻고 독 씻고 달랑 딸 하나' 를 살리기 위해 할머니가 했던 모든 것들.
기도, 음식, 민간요법, 비방, 약.
신장이 나빠졌다는 소리에 대번에 '내 것 띠 주모 안대나' 라는 말을 했던 엄마의 엄마.
영수증에 쉼없이 사인을 하고, 울다 웃고 집에 들렀다가도 손님 왔다는 소리에 다시 부리나케 악셀을 밟다 보니 밤이 되었다.
친구들은 돌아간 뒤에도 메신저로 위로와 무엇이든 도움을 주겠다는 따뜻한 말을 전해 주었다.
빈소에 앉은 할머니를 보며, 고령이라 돌아가신 분들도 많고 여러 사정으로 올 만한 사정이 되지 못하는 친척이나 친구들에게 연락도 하지 못해 나처럼 또래에게 아픔을 나누는 위로를 받지 못하는 고독하고 사무치는 할머니만의 슬픔을 생각했다. 자식 잃은 슬픔인데 위로해 줄 주변인이 별로 없다. 오래 할머니를 돌봐주신 요양보호사님이 소식을 듣고 같이 울어주셨다. 부디 누구라도 비슷한 연배의 어른이 할머니의 슬픔을 나눠주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밤의 빈소는 조용해졌다.
임신중인 부인이 있는데도 밤늦게 달려 온 친구를 마지막으로 전송하고 내일 일들을 생각하며 부의금을 정산했다.
이튿날은 사실상 손님을 맞는 마지막 날이기에 이 때의 부의금이 최종 금액이 된다. 금고에 잘 넣어놓고 봉투들도 절대 버리지 말고 방명록과 잘 비교하며 정리하도록 하자.
우리는 빈소에서 자기로 했다. 누워서 다같이 모여 셀카를 찍어 엄마의 메신저로 보냈다.
엄마, 지상에서의 마지막 밤이에요. 잘 자요. 내일도 잘 해봐요. 좋은 곳으로 잘 가실 수 있게 끝까지 잘 해 볼게요.
엄마가 숨이 넘어가던 시간이 되면 가장 괴로웠다.
억지로 눈을 감았다.
무리를 했는지 질염이 심해졌고 몸이 좋지 않았다.
누워서 엄마가 진료를 받고 입원을 했던, 10년 넘게 통원했던 이 병원에 앞으로는 올 일이 없겠구나 하는 생각에 묘한 감정이 들었다.
입원했을 때 우리끼리 챙겼던 작은 즐거움, 자주 들렀던 매점, "선배님이시구나!" 하고 밝게 웃었던 입원 병동의 간호사, 채혈실의 친절한 임상병리사, 휠체어로 밤에 중앙 로비로, 1층 갤러리 앞 푹신한 소파로 산책을 다녔던 일들, 응급실에서 컨디션이 나아지면 수액 다 들어갈 때까지 도란도란 얘길 나눴던 새벽들.
문득, 엄마의 마지막이 키웠던 강아지의 마지막과 똑 닮았다는 생각이 들면서 둘이 지금쯤 만났을까 하는 궁금함이 생겼다.
주차장에 장애인 표지를 달고 덩그러니 주차되어 있을 우리 차를 떠올리니 왠지 마음이 아팠다.
집의 고양이들은 지금쯤 잘 있을까. 놀라지 않았을까.
이런저런 오만 생각이 파도를 치는 가운데 한 사람 60여년 인생 마무리를 짓는 마지막 밤이 지난다.
이 날도 엄마 꿈을 꾸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