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이 있어야지." ,
"며느리는 암만해도 남이야, 소용없어."
환자 가족이 있는, 간병을 하는 여성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은 듣는 말이리라. 사실 요새는 굳이 간병이 아니어도 미래의 돌봄노동자 및 정서적 만족감을 준다는 이유로 딸이 선호되어, 비교적 이른 나이부터 듣는 시대가 되었지만 말이다.
병원에서 조금 어려 보이고 결혼을 하지 않은 여성이 연장자를 간병하게 되면 주위 환자나 보호자 혹은 단순 주변인들로부터 쉴새없이 이런 말을 듣는다. 단, 재밌게도 혹은 한국에서만큼은 너무나 당연하게도, 며느리만은 사위정도만 해도 절대 좋은 소리를 듣지 못한다. "딸이 있어야 돼. 아유.. 아들은 있어봐야 소용없어." 는 엉뚱하게 며느리 힐난으로 이어진다. "아들 그거 있어봐야 지 마누라밖에 모르고, 왔다가 휭하니 가버려. 며느리는 암만해도 남이야. 딸같다고 해도 절대 딸 아니고 남이야(당연한 말씀을!!). 아까도 봐. 잠깐 있다가 용돈 좀 주고 휭하니 가버리잖아. 우리 아들이 좀 순진한 구석이 있는데 그게 홀랑 홀려갖고 지 남편을 좌지우지해." 부터 시작하여 큰 며느리부터 막내 며느리까지 줄을 세워 하나하나 점수와 등수를 매기기 시작한다. 그러다 '미래 누군가의 며느리가 될지도 모르는' 우리 자매를 의식해 다시 "딸은 최고다" 로 논점은 다급하게 회귀한다. 중장년층이 비혼 간병 여성/혹은 자매를 발견했을 때 시작하는 흔한 레파토리이며, 특히 병원에 갈 때마다 반복된다. 외래를 가건, 입원을 하건... 나를 한 번 보고는 "딸이에요?" 로 시작되는 뻔하고 기분 좋지 않은 대화들.
어릴 때는 꾸밈의 대상으로서, 자라면서 미래 간병인, 돌봄노동자, 가사노동자, 정서적 만족감을 주는 가족구성원, 심지어는 '어떻게든 똑부러지게 돈을 벌어 살림에 보탬이 되어 줄' 자원으로서 선망되는 한국의 딸들.
그러나 기혼자가 되는 순간 배우자의 집안에게서 가차없는 '여우, 이기적인, 서운하게 구는' 어정쩡한 식구 취급을 받는 한국의 딸들.
가족이자 일정 직업 종사자로서 모든 돌봄노동의 구석구석까지 존재하는 수많은 한국의 여성들은 왜 이다지도 복잡하고 힘빠지는 타이틀들이 많은지.
"힘들겠다."
성인이 되고부터는 줄곧 엄마의 건강 스케줄에 많은 것을 맞춰 왔다. 대학교 엠티는 물론 친구들과의 크고 작은 약속이나 심지어는 진로 설정까지 엄마의 건강 상태는 내 인생의 많은 부분을 좌지우지했다. 그 과정에서 '싫은 거 피하려고 거짓말을 한다, 가족 핑계를 댄다' 는 숱한 오해도 받아봤으나, '힘들겠다, 힘내라' 는 격려도 참 많이 받았다. 오해와 비난을 버티게 해 준 건 저런 응원들이었다.
나도 나이가 조금씩 들면서 이제 '네가 힘든 일이 참 많겠다' 라는 말에 많은 대답이 생기기 시작했다. '아니야. 괜찮아.' 라는 말에 더해, '환자 당사자가 더 힘들 것이다.' 라든가, '다른 사람들이 언젠가 겪을지도 모를 일을 조금 빨리 겪을 뿐이다.' 라는 대답들이 덧붙기 시작했다. 실제로 환자 보호자로 오래 있다 보면, 간병 자체도 고될 때가 있으나 통증 조절이 안되고 시도때도없이 닥쳐오는 컨디션 난조와 새로운 질병들을 몸 하나로 감당하는 환자의 모습과 심정을 헤아리다 보니 절로 그런 생각이 들게 되었다. 나는 피곤하거나 지쳐도 정상 수준으로 회복이 되지만 환자는 그렇지 않으니까, 못하니까.
살다 보면 다른 생명을 돌보게 되는 일은 누구에게나 닥칠 것이다.
특히 많은 여성들에게.
더군다나 부모가 병환으로 퇴직을 하고 병상에 눕거나 상시 복용약이 생기고, 젊은 사람의 도움을 필요로 하게 되는 때를 누군가는 언젠가는 맞이한다. 혹은 아픈 자녀를, 형제를, 반려동물을 그렇게 돌보는 때가 모두의 인생에서 다양하게 나타난다. 내겐 그 시기가 어떤 타인의 평균보다 빨리 나타났을 뿐이며, 사실 조기에 발견하여 첨단 의학의 힘을 빌려 관리가능한 질병이라는 점에 살짝 안심할 때도 있다. 그리고 병원을 드나들며, 질병을 다루는 프로그램을 보며 나의 고됨은 아무것도 아님을 반성할 때도 많다.
네가 뭘 알아
한편, 환자를 데리고 병원 말고도 이 곳 저 곳 다니거나, 혹은 나이 먹는만큼 주변 상황이 변함에 따라 노년 건강과 간병 문제에 대해 얘기할 기회가 종종 생기곤 하는데, 참 별 것도 아닌 것에서 상처를 받고는 한다. 어떨 때는 '내가 지금 왜 이런 걸로 상처받고 있지?' 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엄마는 장애인 주차표지가 발급 가능한 대상자라 몇 년 째 장애인 주차표지를 달고 차를 운행하고 있다. 엄마가 직접 운전할 때도 있고, 여의치 않으면 내가 운전할 때도 있는데 한 번은 주차장 장애인 주차구역에 주차를 하고 내리는데 그냥 내리는 내 모습을 보고는 어떤 남성이 "여기에 주차하시면 안돼요. 사진 찍혀요." 라고 대뜸 말을 거는 것이 아닌가. 나는 당황하여 "네?" 라고 반문했고 남자는 "여기 주차하시면 사진..." 하더니 앞유리에 붙은 장애인 주차 표지판을 보더니만 "아, 아닙니다." 라고 사과 한 마디 없이 가버렸다. 그 황당함이란. 인터넷에는 "장애인이 그랜저를 탄다" 며 설전이 오가기도 했고, "멀쩡히 걸어다니는데 주차하길래 사진을 찍어서 올렸다." 라거나, 동승만 하면 주차 가능하다고 반박하면 "가족이 악용하는 걸 수도 있잖느냐." 라며 환자와 장애인을 끝없이 의심한다.
엄마는 오래 걷지 못하고 장애인 주차표지판 발급 대상자이지만 보행으로만 두고 보면 휠체어도 지팡이도 목발도 짚지 않는지라 범인의 편견으로 볼 때는 "어디가 장애인이라는 거지?" 라는 생각이 들 수도 있다. 더군다나 장애인 주차표지판은 휠체어 모양이고, 사람들은 장애인을 보행불가능한 사람으로만 쉽게 생각하니까.
이런 이유로 참 많은 오해와 손가락질을 받았다. 마침 엄마는 또 나이보다 많이 어려 보이는 타입이고, 같은 질환 다른 환자들에 비해 피부 변색도 없는 편이라 마른 체형 말고는 환자라고 인식할만한 외형적 싸인은 적다. 교통보호자석에 앉아도, 교통약자용 엘리베이터를 타도, 장애인 주차구역에 주차를 해도 어찌나 눈총과 지적하는 한 마디들을 참지 못하는지. 더군다나 장애인 차량은 장애인 본인이 운전하지 않더라도 동승만 하면 비장애인이 운전하여 장애인 주차구역에 주차 가능한데. 그래서 언제부턴가는 이런 곳을 이용할 때 복지카드를 손에 꼭 쥐고 비장한 표정으로 임하곤 한다. 누군가 한 마디 하거나 쨰려보면 바로 복지카드를 내민다.
그리고 나는 겉모습으로 다른 이의 상태를 속단하는 속도가 늦어지기 시작했다. '사정이 있겠지.'. '말을 못해서 그렇지 아플 수도 있겠지.', '오늘은 어딘가 불편하거나 컨디션이 나쁜 거겠지.'
혹은 정말 말도 안되는 곳에서 혼자 상처를 받고는 어리둥절함과 상처받은 마음 사이에서 헤맬 때도 있었다. 샤워는 당연하고, 환자의 컨디션이 나빴을 때 기저귀를 갈기도 했고 오염된 옷을 세탁하거나 버려보기도 했는데 어느 날 "난 아기는 모르겠는데 어른 똥기저귀는 진짜 못 할 것 같아." 라는 누군가의 말에 난데없이 상처를 받고 말았다. 지금도 포인트를 알 듯하면서도 잘은 모르겠는데 그 말이 어쩐지 서운하게 다가왔던 기억이 있다. 약자와 동행하다보면 이런 말도 안되는 예민함이 생기는가 하는 약간의 두려움이 들기도 했다.
그 외 핑계 취급하거나 장애인 주차구역에 가구를 잔뜩 버려놔서 주차할 곳을 못 찾아 먼 도로가에 주차하고 터덜터덜 걸어왔던 기억 등 한국에서의 환자와 장애인의 삶 무엇인가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던 나날들. 그나마 보행하는 장애인은 편견에 짜증나더라도 출입에 큰 제약은 없지만 바퀴가 이동수단인 휠체어 이용자들이나 거동이 불편해 외출이 힘들거나 이동에 어려움이 많은 사람들을 생각하니 버스와 울퉁불퉁한 보도, 정류장, 주차장 등 많은 것들이 달리 보이기 시작했다. 세상이 거대한 벽처럼 느껴졌다. 시설도, 사람도.
"내가 혼자 나이가 들어 아프다면
누가 나를 돌봐줄까?"
지금 내 나이보다 조금 더 어렸을 때부터 쉼없이 아팠던 엄마와, 벼락같은 질병에 걸려버린 아빠 그리고 그들을 돌보는 우리 자매들을 보며 나는 자연히 나의 노후를 떠올렸다. 단지 힘이 없고 도움이 필요한 노년이 아니라 혹여 건강을 크게 잃을지도 모르는 상황을 말이다. 더군다나 나는 결혼 생각이 없고 나의 자매들도 마찬가지이며, 주변의 "나중에 나를 건사할 자식은 필요하다" 는 보험으로서의 자녀 존재에 대한 입버릇을 싫어하는지라 많은 옵션을 생각해야 했다. 그럭저럭 벌면서 적당히 먹고 운동하여 체력과 건강을 보전하여 천천히 노쇠해 준비를 모두 마친 후 죽음을 맞이한다는 건 굉장한 행운이다. 재력이 부족하거나 시간이 없거나 정신건강에 문제가 커 스스로를 돌보기 힘들거나 갑작스레 난치성 질환에 걸리기라도 하면 많은 것들이 달라져버린다. 세상에는 운동과 식이, 그리고 사고를 당하지 않는 운만으로는 되지 않는 일들이 너무도 많았다.
내가 혼자 나이가 든다면, 나이가 들어 아프다면, 노쇠하여 죽음을 눈앞에 둔다면 누가 나를 돌봐줄까?
막연히 '사회'라고 생각하게 될 수밖에 없다. 그 사회는 어떠할까?
장애인 주차표지에 대한 상식이 부족하고, 보행기구가 탑승 가능한 저상버스는 장애인들의 접근성이 떨어지며, 복지시설은 열악하고 학대사실이 종종 보도된다. 가난한 독거노인은 폭서와 혹한에 시달리고 키오스크들이 들어서고 지폐와 동전 사용이 줄고 있으며 어플리케이션 사용자를 최우선으로 대우하고 갈 곳 없는 노인들은 공항과 휴대폰 대리점과 은행으로 향한다. 자녀가 없는 가난하고 아프며 혼자인 노인은 지금 어디에 있는가.
'노래궁' 위에 있는 주간보호시설.
'눈이 부시게' 휘황찬란한 건물.
아빠를 낮에 돌봐 줄 주간보호시설을 알아보며 한창 망설이는 요즘이다. 어느 정도 사회생활에 대한 욕구가 남아있고 간단한 대화나 거동, 식사는 가능한 아빠가 주간보호센터에서의 생활을 버틸 수 있을까?
드라마 '눈이 부시게' 를 볼 때마다 효도관 직원들의 너무나 현실적인 모습에 깜짝깜짝 놀라곤 했다. 두 번 이상의 호소나 응석이나 거부에 더 이상 반응하지 않고 곧장 돌아서버리거나 적당히 어르고 달랠 뿐 개인의 취향이나 욕구에 대해서는 관심을 둘 수 없는 돌봄시설의 구조...
물론 그마저도 너무나 감지덕지하기에 나 역시 시설을 알아보고 있지만 눈이 부시게 빛나는 '노래궁' 건물 바로 위층에 위치한 주간돌봄센터 등을 보는 마음이 복잡하지 않을리가 없다.
다음웹툰 '우두커니'(심우도 作)에서 아버지를 시설에 맡긴 후 간호사와의 통화에서 '밤에 여기저기 좀 돌아다니셨다' 라는 말에 '여기가 어딘지 어리둥절해 헤매는 아버지의 모습'을 상상하며 울던 딸의 모습이 종종 생각난다. 단지 '시설에 모셨다고 죄책감을 가질 필요는 없다' 라기에 한국의 시설이 주는 모종의 이미지는 보호자들의 마음을 심란케 한다.
나는 어떤 결정을 내려야 할까? 나는 집에서 무엇을, 어떤 돌봄을 더 제공할 수 있을까? 무엇이 최선일까?
"으쌰! 내가 커다래서 다행이지?"
잠시 돌보는 나의 몸에 대하여 이야기하려 한다. 엄마를 차에 태우거나 게단을 이용하거나, 잠깐 걸어야 할 때 너무 힘이 없으면 종종 내가 안아 들거나 업는 경우가 잦다. 그럴 때마다 나의 커다랗고 강한 몸이 얼마나 고마운지 모른다. 엄마를 업고 힘차게 달리고, 무거운 투약 박스를 수십 번씩 들어올리며 우스개로 말한다. "내가 커다래서 정말정말 다행이지?"
한국에서 큰 키와 커다란 비만의 몸, 강한 힘을 갖고 스스로 그 점을 사랑할 수 있는 경험은 많지 않다. 단지 누군가를 돌보면서 오는 단순한 보람 따위가 아니라 나는 정말 커다랗고 강한 나의 몸과 힘을 사랑한다.(나는 힘이 정말 세다.)
미용과 상관없이 비만인 여성인 내가 나를 사랑할 수 있는 몇 안되는 이 순간들이, 아마도 나만이 가질 수 있는 형태가 없는 보물일 것이다.
-맺음
돌보는 딸들에게
타지에서 혼자 살고 계시는-곧 같이 살 예정이다!-나의 구순 외할머니는 눈이 거의 보이지 않는다. 그럼에도 스스로를 돌보는 것에는 엄청나게 뛰어나셔서 일주일에 두 세번 정도 방문하는 도우미 아주머니가 "할매 집에 오면 내가 할 게 없다!" 라고 매번 놀라워 하신다. 물론 느린 몸과 약한 눈 말고는 건강한 편인 신체 덕이기도 하지만 끊임없이 닦고 쓸고 씻고 놀라운 요리솜씨로 냉장고를 채우고 재봉틀을 돌리고 화분을 돌보는 엄청난 에너지와 움직임이 나의 사랑하는 할머니를 살아가게 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할머니는 잘 안 보이시지만 해외 농구경기나 빙상경기 등을 즐겨 보시고 노래 프로그램을 즐겨 들으시며 잘 모르는 한글이지만 텔레비전에서 하는 색다른 요리를 시도해보곤 하신다.
나의 할머니 역시 다른 노년 여성들처럼 아주 어릴 때부터 남을 돌보는 일을 쉼없이 해 왔다. 박막례 님의 책 앞부분을 읽으며 얼마나 울었는지 모른다. 열 살도 안된 어린 여자아이일 때부터 얼마나 많은 여성들이 동생부터 부모 등의 어른을 돌보는 일에 내던져 졌는지. 결혼 후에는 또 얼마나 호되게 당신 몸 하나 돌보지 못할 정도로 많은 돌봄을 해 오셨는지.
이제 혼자인 할머니는 아직도 우리를 위해 아이스박스 두 개를 각종 반찬과 김치, 속옷이며 수건 등으로 꽉꽉 채워 보내곤 하신다. 그 선물들 사이 촘촘히 끼운 요구르트며 직접 짠 참기름병 등이 그냥 보고만 있어도 콧날이 시큰할 정도로 애틋할 때가 있다.
이런 나의 사랑하는 할머니를 이제는 내가 돌보게 되겠지.
누군가의 옆, 그리고 많은 병자 옆에 선, 그 시작은 아마도 작은 딸이었을 여성들에게 매일 나는 닿지 않는 응원을 보낸다. 보호자로서, 돌봄노동의 종사자로서, 가족으로서 약한 자의 옆에 서서 '생하는 손'으로 직접 돌봄 외에도 많은 것들을 해내야 하는 여성들의 행복을, 그리고 무엇보다도 빛나는 몸과 마음의 건강을 간절히 기원한다.
튼튼한 심신으로 부디 지치지 않게 우리 잘 살아가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