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의 페미니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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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의 페미니즘

이운

처음에는 유튜브나 SNS등과 같은 매체로만 페미니즘을 배웠다. 남자 동기에게 너는 여성인권신장에 대해 관심 있어? 그럼 너네는 왜 그런 주장을 하고 다니는 건지 나를 설득 좀 해봐.” 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화가 나는데 할 말이 없었다. 얕은 지식들은 내 생각을 바꾸는 데에만 조금 효과가 있을 뿐, 다른 사람에게 내가 페미니스트가 되려는 이유를 설명하는 데에는 역부족이었다. 그래서 복학을 하자마자 페미니즘 개론을 수강했다. 교수님은 오티 때부터 나의 정곡을 찔렀다. “남자들이랑 싸울 때 반박하고 싶은데, 할 말이 없죠? 알긴 아는데, 이론이 없어서 그래요. 열심히 배워 봐요.” 다른 상황이었다면, 자존심 센 나로서는 자기가 뭘 안다고라며 내 현실을 외면하려고 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번에는 그럴 수 없었다. 정곡을 찔린 대로 부끄러웠고, 부끄러운 만큼 배워서 성장하고 싶었다.

 

하지만 내 스스로 성장하기란 하루아침에 되는 일이 아니었다. 아무 생각 없이 본 광고나 영화가 여성 혐오를 반영하는 내용이었다는 걸 깨달으면, 왜 나는 아직도 이런 걸 못 알아보지? 라며 자책을 했다. 수업을 들을 때 25년을 페미니스트로 싸워 오신 교수님도 놀라게 할 만큼 여성 인권에 깨어있는 학우를 보면 부럽고, 내 자신이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느껴졌다. 또한 코르셋을 조인 여자 연예인들이 여성들을 위해 기부를 했단 소식을 들으면, 그래도 같은 여자를 위해 좋은 일 했으니까 응원해야 할지, 너희가 입은 코르셋이 여성 인권 후퇴시킨다고 분노를 해야 할지 헷갈렸다. 페미니즘을 공부한다고 하면서, 나 또한 여전히 여성을 혐오하는 무리 속에 있는 건 아닐까 나를 돌아보고, 왜 여성들에게만 유독 가혹한 기준을 세우려 할까 반성하고 있었다. 그렇게 혼란의 소용돌이 속에서 내 입장을 찾아가고 있을 즈음, 한 연예인의 사망 소식을 접했다. 교수님은 그 일이 있던 주에 추모의 의미로 검은 옷을 입고 오셨다. 우리에겐 죽지 말지. 죽지 말아요, 여러분. 싸우셔야 해요.” 라고 하셨다. 그 인물을 응원하지도, 좋아하지도 않던 나였는데도, 안타깝고 슬픈 기분이 들었다. 왜 진작 함께하려 하지 않았지 라는 후회와, 페미니즘이 나 혼자만 나아간다고 될 일도 아니고, 나만 잘났다고 될 일도 아니구나, 깨달은 순간이었던 것 같기도 하다.

 

그 이후로 나는 나보다 앞선 사람들이 있다면 따라가고, 나의 뒤에 있는 사람들은 기다리자고 다짐했다. 페미니즘을 모른다고 해서 비난할 것도 아니고, 기다려주고 알려주고 같이 가면 되는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그 여자애 다른 남자 동기랑 붙어 다니더라. 완전 여우같아.”라고 말하는 친구를 보면 나는 과연 언제까지 그들을 기다릴 수 있을까 의문을 갖게 된다. “쟤는 또 성형하고 나왔나봐. 얼굴이 왜 저래. 옷은 또 저게 뭐야.” 라고 여자연예인들의 능력이 아닌 외모만 평가하는 가족들을 보면 내가 서 있는 자리가 위태롭고 불안하게 느껴질 때도 많다. 사람들은 그런 나를 무조건 여자 편만 드는 사람으로 취급하고, 그 속에서 불편함과 답답함을 느끼는 내가 마치 혹 같다는 생각도 든다.

그리고 매주 여성들의 이야기로 포장한 나의 이야기를 쓰려고 노력하지만, 매 순간 쉽지 않다. 나는 이 글에 책임질 수 있을까, 이 문장은 내가 말한 이야기들에 반하는 건 아닐까 조심스러워지기 때문이다. 엄마는 내 글을 보면 우리 집 이야기를 쓴 것 같다며 불만을 토로하시기도 한다. 다른 사람들은 우리 가족을 화목하고, 부부 간에 취미 생활도 같이 즐기는 행복한 집안으로만 생각하는데, 내가 그 평판과 다른 현실을 써서 보여주는 것에 불만족스러운 듯하다. 어쩌면 수험생활 시절 고시원에서 겪었던 재밌는 이야기, 내 주위 친구들과 있었던 웃긴 이야기나 써보기를 원하실 지도 모른다. 무엇보다도 페미니즘 공부와 비혼 다짐은 접어두고, 아빠 정도 되는 남자 만나 행복하게 살기를 바라실 지도 모르겠다.

 

그럼에도 나는 페미니즘을 배우는 것, 내 이야기를 쓰는 것, 소설 속 친구들이 결국에는 편안한 세상에서 행복해지는 것, 그리고 지금 이 곳도 내 바람처럼 되기를 포기할 수가 없다. 나는 여전히 부족하고 흔들릴 때도 많지만, 분명히 나도 나와 같은 경험을 한 사람들을 통해 영향을 받았다는 것을 알고 있다. 누군가가 시작하지 않았다면, 나 스스로도 깨어나지 않았다면 잔잔하게 흘러갔을 인생이다. 하루를 보내는 동안 미묘한 이질감을 깨닫기 시작할 때, 그리고 그 하루들이 쌓여 내 모든 것들이 익숙해지지 않았을 때, 내 인생은 불편함으로 가득 차기 시작했다. 그렇게 페미니즘은 내 인생을 망치러 온 나의 구원자가 되었다. 아마도 난 페미니즘을 만나기 전의 나로 돌아가는 길을 잃어버린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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