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한 알만 주면 안 될까?”
할머니가 매일 밤 엄마에게 수면제를 부탁하는 말투는 달라진다.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말할 때도 있고, 도저히 안 되겠다고 애처롭게 말할 때도 있다. 엄마는 한숨을 쉬며 약을 주는데, 가끔 할머니는 그마저도 의심한다.
“네가 나한테 가짜 약을 준 것만 같다. 잠이 안와.”
“엄마가 20시간 이상 잠만 잤는데, 잠이 오는 게 이상한 거지. 잠 안 오면 그냥 밤 새.”
할머니가 처음 우리 집에 왔을 때는 밤마다 거실을 엄청나게 돌아다녔다. 화장실을 가기 위해 종종걸음으로, 때로는 기어서 다니기도 했다. 할머니의 동태 파악을 위해 거실에서 잠을 잔 엄마는 무서울 때도 있고, 놀랄 때도 있었단다. 할머니가 화장실에서 나오다가 힘에 부쳐 어둠 속에서 한참을 서있거나, 어지러움에 화장실 문에 머리를 부딪히며 넘어졌기 때문이다. 덕분에 엄마도, 나도 할머니에게 온 신경을 곤두세우느라 잠을 제대로 자지도 못했다.
이 상황의 모든 원인은 수면제였다.
수면제를 먹고 바로 잠이 들면 문제가 없지만, 그렇지 못한 경우 환각 상태로 돌아다니게 된다고 한다. 그래서 할머니는 물이 마시고 싶다며 화장실로 간 적도 있었다. 또 그 수면제의 성분은 다음날까지도 사람을 몽롱하게 만들어 할머니가 온종일 정신을 못 차리게 만들었다. 할머니는 하루 내내 잠만 잤고, 결국 밤에 수면제를 찾는 일이 반복되었다. 그리고 우리는 할머니가 약에 의존하지 않게 할 새로운 방법을 찾아내기에 이르렀다.
“엄마, 이제 수면제가 없어. 다 떨어졌어.”
누가 봐도 거짓말 같아 할머니가 믿을까 라는 생각을 했지만, 의외로 효과는 좋았다. 할머니는 궁시렁 대면서도 억지로 잠을 청했고, 나도 괜히 할머니에게 말을 걸지 않고 잠을 자는 척했다. 한 3일 가량 할머니는 새벽에 뒤척였고, 갑자기 욕을 할 때도 있었다.
“미친년.”
침대에서 자던 나는 잠결에 깜짝 놀라다가도, 모른 척하고 잠을 청할 수밖에 없었다. 가끔은 내 침대 밑 서랍을 열어보거나, 갑자기 일어나서 할머니의 가방을 살펴보기도, 옷을 정리하기도 하셨다. 소리에 예민한 나는 그 때마다 잠을 깰 수밖에 없었지만 그렇다고 할머니에게 무슨 일이냐고 물을 수도 없었다. 말을 거는 순간 할머니가 나에게 잠이 안 온다며 약을 달라고 할 게 뻔했기 때문이다. 엄마는 할머니 안에 남아있는 불안감이나 잠이 오지 않는 괴로움 때문에 하는 행동들일 거라면서, 관심을 주지 말라고 했다.
그렇게 2주 정도가 지나자 할머니는 더 이상 약을 달라고 하지 않았다. 하지만 수면제가 아니어도 할머니는 또 다른 약들에 의지하려고 했다.
“나 아퍼. 진통제 좀 줘. 몸이 쏙쏙쏙쏙 쑤셔.”
“집에 신경안정제 없나? 갑자기 막 심장이 뛰어.”
할머니는 틈만 나면 약을 찾았고, 난 그 소리들이 소름끼치기도 했다. 그래서 처음엔 못 들은 척도 해보고, 어떤 약을 줘야 하는지 모른다고도 했는데, 할머니는 할머니의 말을 들어줄 때까지 내 말을 들은 체 하지 않았다. 그야말로 약을 줄 때까지 온 힘을 쥐어짜서 나를 불러댔다. 할머니의 외침에 못 이겨 약을 챙겨 드리면서도, 할머니의 고집스런 행동들이 얄밉게 느껴지기도 했다.
“할머니, 밥을 안 먹고 약만 먹으면 몸이 나아? 약만 먹어도 배가 부르겠어. 하루에 약을 얼마나 먹는 거야.”
집안에서 의사라고 불리는 아빠는 나름의 해결책으로 비타민을 신경안정제라고 거짓말하여 주기도 했다.
“어머니가 좋아하는 약 왔어요. 어머니 약 좋아하시잖아. 이거 드시면 돼.”
하지만 온갖 수단에도 할머니의 꾀병인지, 진짜 고통인지 모를 증세들은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결국 엄마는 할머니가 평소에 먹는 약에서 나타날 수 있는 부작용들을 알아보고, 부작용에 따라 일부 약들은 빼서 주기 시작했다. 일종의 임상실험 같은 거였다. 그래서 나는 엄마가 퇴근하면 할머니가 어떻게 달랐는지 보고했고, 엄마는 그 날의 보고에 따라 또 다른 방법으로 시도하고 또 시도했다.
여러 시험 결과, 할머니는 아프다고 하는 말도, 심장이 뛴다는 말도, 잠이 오지 않아 죽겠다는 말도 하시지 않는다. 덕분에 나는 할머니가 언제쯤, 어떤 것을 필요로 하실지 패턴을 파악하게 되었고, 할머니 앞에 간식거리를 뷔페처럼 챙겨두고 산책을 나가는 여유도 생겼다.
오늘은 점심을 먹고 엄마와 목욕탕을 간다고 나섰다가, 30분도 안되어 집으로 돌아왔다.
“왜 벌써 왔어?”
“할머니가 기운이 없어서 목욕탕에도 못 들어갔어.”
이제는 할머니를 파악할 것 같으면서도, 내가 몰랐던 또 다른 할머니를 만나기도 하고, 생각지도 못했던 난관도 자주 마주친다. 하지만 이 모든 일이 치매환자와 가족들의 하루하루이다.
엄마는 엄마의 엄마를 바라보며, 누구보다 씩씩했던 사람이 한순간에 바보가 되어버린 것 같아 인생이 허무하다고 한다. 나 또한 할머니에게 받은 사랑을 돌려주기 위해 열심히 달려 모든 준비를 마쳤는데, 그를 돌려받아야 할 사람이 준비가 되지 않았다는 사실에, 시간의 흐름이 가혹하게만 다가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