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avourites 1. 사라 처칠, 레이디 말버러

핀치 타래여성서사영화리뷰

Favourites 1. 사라 처칠, 레이디 말버러

냉철한 정치가이자 속절없는 사랑꾼

타래 에디터

거짓말 하지 않을 거에요, 그게 사랑이니까!  

<더 페이버릿(2019)> 사라 처칠, 레이디 말버러  

오랫동안 로맨스 영화가 싫었다. 여자들은 이렇잖아, 남자들은 그렇잖아, 도대체 성별 고정관념 없이는 사랑에 대해 아무 얘기도 못하는 무능력한 영화들이 무슨 권리로 로맨스를 규정해 온 것일까?  

<더 페이버릿>은 스릴러를 기대하고 극장을 찾은 내게 로맨스의 참맛을 알려줬다. 사라 처칠, 레이디 말버러는 어릴 적 친구이자 주군인 앤 여왕을 진심으로 사랑한다. 물론 앤의 후광을 이용해 정치적인 신념을 관철하고 나라를 쥐락펴락 하기도 하지만, 그건 사랑의 부수적인 결과물일 뿐이다.  

혹자는 사라와 앤의 관계가 사랑이 아니라 서로 주도권을 잡기 위한 정치싸움일 뿐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한편 생각해보면, 모든 사랑은 정치가 아닌가? 더 좋아하는 사람이 권력을 잃는 특유의 파워 게임이 조금도 존재하지 않는 로맨스도 있나? 말해두지만 사라 처칠의 로맨스는 ‘밀당’ 같은 치졸하고 작위적인 파워 게임과는 스케일이 다르다. 사랑하기 때문에 신뢰하고, 사랑하기 때문에 불신하고, 사랑하기 때문에 진실을 말하고, 사랑하기 때문에 거짓을 말하고, 사랑하기 때문에 미워하고, 사랑하기 때문에 협박하지만, 사랑하기 때문에 절대 곤히 잠든 사랑스러운 오소리에게 해를 끼치진 못하는, 사랑밖에 모르는 그 사람, 사라 처칠.  

“우린 완전히 다른 게임을 하고 있는 거야.” 사라 처칠이 정적이자 연적인 애비게일 마샴에게 던진 한 마디가 그의 처지를 잘 알려준다. 사라 처칠은 홀로 부상을 입은 채 창녀촌에 떨어져도 아무 타격 없이 걸어 나올 수 있는 배짱과 재력, 그리고 지력을 갖춘 게임의 지배자다. 하지만 모든 스탯을 갖춘 먼치킨도 조용히 상대의 손에 결과를 맡길 수밖에 없는 게임, 그것이 사랑이다. 더 좋아하는 사람이 지는 거니까. 사라 처칠은 패배를 두려워하지 않고 사랑했다. 오직 자신만이 줄 수 있는 사랑을.

SERIES

Favourites

타래 에디터의 최신 글

더 많은 타래 만나기

말하지도 적지도 못한 순간들 -12

환자가 떠난 후 남은 딸이 할 일

beforeLafter

#죽음 #장례
끝났다. 사흘 간의 지옥같고 전쟁같고 실눈조차 뜰 수 없는 컴컴한 폭풍우 속에서 혼자 소리를 지르는 것 같았던 시간이 끝났다. 끝났다는 것이 식이 끝난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이 더 절망스럽다. 불과 사흘 전만 해도 물리적으로 사회적으로 엄연히 존재했던, 60여년을 살았던 한 '사람'을 인생을 제대로 정리할 시간조차 갖지 못한 채 후루룩 종이 한 장으로 사망을 확인받고, 고인이 된 고인을 만 이틀만에 정리해 사람..

말하지도 적지도 못한 순간들 -13

환자가 떠난 후 남은 딸이 할 일

beforeLafter

#죽음 #상속
장례도 끝났고 삼오제(삼우제)도 끝났다. 49재의 첫 칠일 오전, 나는 일하던 도중 이제 식을 시작한다는 가족의 연락을 받고 창가로 나와 하늘을 보며 기도했다. 부디 엄마의 영혼이 존재해서 젊고 건강할 때의 편안함을 만끽하며 여기저기 가고 싶은 곳을 실컷 다니고 있거나, 혹은 그 생명의 끝을 끝으로 영원히 안식에 들어가 모든 것을 잊었기를. 삼오제까지 끝나면 문상 와 준 분들께 문자나 전화로 감사 인사를 해도 좋..

[제목없음] 일곱 번째

누군가를 만난다는건.

제목없음

#여성서사
누군가를 만난다는건 참으로 어렵다. 나같은 경우에는 끊임없이 되물어봤다. 그리고 의심했다. '저 사람은 만나도 괜찮은걸까?' '내가 착각하고 있는건 아닐까?' 처음에는 설레기도 하고 잘 맞는 사람이라고 생각이 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안한 마음은 사라지지 않는다. 과연 내가 누군가를 만나도 괜찮은걸까? 순간의 감정으로 선택한 것은 아닐까? 꼬리에 꼬리를 물다가 결국에는 좋으니까로 결론이 난다. 좋은걸 어떡하나? 만나야..

비건 페미 K-장녀 #1 가족의 생일

가족들과 외식은 다이나믹해지곤 한다

깨비짱나

#페미니즘 #비건
다음주 호적메이트의 생일이라고 이번주 일요일(오늘) 가족 외식을 하자는 말을 듣자마자, 다양한 스트레스의 요인들이 물밀듯이 내 머리속을 장악했지만 너무 상냥하고 부드럽고 조심스럽게 나에게 일요일에 시간이 되겠냐고 오랜만에 외식 하자고 너도 먹을 거 있는 데로 가자고 묻는 말에 못이겨 흔쾌히 알겠다고 해버린 지난주의 나를 불러다가 파이트 떠서 흠씬 패버리고 싶은 주말이다. 이 시국에 외식하러 가자는 모부도 이해 안가지..

13. 대화하는 검도..?

상대의 반응을 보며 움직이라는 말

이소리소

#검도 #운동
스스로를 돌이켜보기에, 다수의 취향을 좋아하는 데 소질이 없다. 사람들이 아이돌이나 예능 얘기를 꺼내기 시작하면 체온이 2~3도는 뚝뚝 떨어지는 것 같다. 대화에 섞일 적당한 말이 뭐 있지? 가만히 있어도 괜찮을까? 뭐라도 이야깃거리를 던져보지만 진심이 없어서인지 어정쩡한 말만 튀어나온다. 결국 혼자 속으로 “난 만화가 더 좋아.."라며 돌아서는 식이다. 맛집에도 크게 관심이 없고, 어째 운동 취향도 마이너한 듯하고.....

주접

플레잉 카드

헤테트

#플레잉카드 #트럼프카드
버드 트럼프Bird Trump 원고를 하고 있는데 택배가 왔다. 까마득한 언젠가 텀블벅에서 후원한 플레잉 카드 (=트럼프 카드) ! 원래 쟉고 소듕한 조류를 별로 안 좋아하는데 (맹금류를 제외한 새를 무서워하는 편) 이건 보자마자 이성을 잃고 냅다 후원해버렸다. 그 뒤로 잊고 살았는데 오늘 도착. 실물로 보니 과거의 나를 매우 칭찬해주고 싶다. 아름답지 않은 구석이 없어, 세상에. 하다못해 쓸데없이 많이 들어있는 조..
더 보기

타래를 시작하세요

여자가 쓴다. 오직 여자만 쓴다. 오직 여성을 위한 글쓰기 플랫폼

타래 시작하기오늘 하루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