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avourites 2. 애비게일 힐

핀치 타래여성서사영화리뷰

Favourites 2. 애비게일 힐

그 길의 끝에서 애비게일은 행복했을까

타래 에디터

나는 내 편이야, 언제나  

영화 <더 페이버릿(2019)> 애비게일 힐  

다른 누구보다 너 자신을 먼저 사랑해라. 흔해빠진 말이지만, 그만큼 시대와 장소를 가리지 않는 유효한 조언이다. 하지만 사랑이 그렇게 쉽나? 정말 나 자신을 사랑하기 위해 나는 어떤 일까지 할 수 있을까? 그리고 어떤 일까지 해야 할까?  

애비게일 힐은 그 누구도 자기 자신보다 더 사랑하지 않는다. 넌 우리 편인 줄 알았다는 정치인에게 못 박아 말한다. “나는 내 편이야. 언제나.” 그리고 여지를 남기며 덧붙인다. “가끔은 그게 당신 편과 우연히 겹칠지도 모르지(Sometimes it is a happy coincidence for you).”  

영화 곳곳에서 잠깐씩 드러나는 애비게일의 성정은 착하고 순진하다. 사격장에서 사냥감을 동정하고, 독서와 음악 감상을 좋아한다. 그러나 여자를 물건처럼 취급하는 현실 때문에 망나니 아버지의 업보를 온 몸으로 짊어져야 했던 과거가 애비게일을 현실주의자로 만들었다.

애비게일의 유일한 목표는 존엄한 생존이다. 인간답게 살아남기 위해서 애비게일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거짓말도, 자해도, 배신도, 살인도, 거짓 울음도, 심지어 결혼조차도 할 수 있다. 아이러니한 것은 그 과정에서 ‘자신다움’이 조금씩 사라져 간다는 것이다. 자기 자신을 사랑하기 위해 가장 먼저 버려야 하는 것이 자기 자신이라니. 존엄하게 살기 위해 존엄을 버리고 무슨 짓이든 다 해야 한다니. 그야말로 초경쟁자본주의 사회를 살아가는 근대인의 딜레마를 빼닮았다.

애비게일은 명석하고, 과감하고, 빨리 배우고, 가증스러울 만큼 사랑스럽고, 성공적인 도전자다. 그 이면에는 더 이상 잃을 것이 없는 간절함과 언제 다시 시궁창에 떨어질지 모르는 위태로움이 있다. 영원히 승리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패배할 수도 없는 나르시시스트의 짝사랑. 이토록 복잡하고 모순적인 주인공도 흔치 않다.

SERIES

Favourites

타래 에디터의 최신 글

더 많은 타래 만나기

말 하지도 적지도 못한 순간들 -14

환자가 떠난 후 남은 딸이 할 일

beforeLafter

#죽음 #장례
상속인 조회 서비스 조회 완료 후 한 달 정도는 은행과 보험 정리에만 매달렸다. 사실 지점이 많이 없는 곳은 5개월 여 뒤에 정리하기도 했다. 그 사이에는 자동차 등을 정리했고 건강보험공단, 연금공단, 주민센터 등을 방문했다. 상속인 조회 서비스에 나온 내역들을 한꺼번에 출력해 철 해 두고 정리될 때마다 표시해두고 어떻게 처리했는지(현금수령인지 계좌이체인지 등)를 간략하게 메모해두면 나중에 정리하기 편하다. 주민..

[제목없음] 일곱 번째

누군가를 만난다는건.

제목없음

#여성서사
누군가를 만난다는건 참으로 어렵다. 나같은 경우에는 끊임없이 되물어봤다. 그리고 의심했다. '저 사람은 만나도 괜찮은걸까?' '내가 착각하고 있는건 아닐까?' 처음에는 설레기도 하고 잘 맞는 사람이라고 생각이 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안한 마음은 사라지지 않는다. 과연 내가 누군가를 만나도 괜찮은걸까? 순간의 감정으로 선택한 것은 아닐까? 꼬리에 꼬리를 물다가 결국에는 좋으니까로 결론이 난다. 좋은걸 어떡하나? 만나야..

보장 중에 보장, 내 자리 보장!

이운

#방송 #여성
나는 땡땡이다. 아마 팟캐스트 ‘송은이 김숙의 비밀보장’을 듣는 사람들이라면 내가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바로 알아챌 수 있을 것이다. 이 팟캐스트는 쓰잘데기 없는 고민에 시간을 올인하고 있는 5천만 결정장애 국민들을 위한 해결 상담소로, 철저하게 비밀을 보장하여 해결해 준다는 취지하에 만들어진 방송이다. 그리고 ‘땡땡이’는 이 취지에 맞게, 사연자의 익명을 보장하기 위해 사용하다 만들어진 애칭이다. 비밀보장 73회에서..

세 사람

세 사람

이운

#치매 #여성서사
1 요즘 들어 건망증이 심해졌습니다. 안경을 쓰고서 안경을 찾고 지갑은 어느 가방에 둔 건지 매번 모든 가방을 뒤져봐야 합니다. 친구들은 우리 나이 대라면 보통 일어나는 일이라며 걱정 말라하지만 언젠가 나에게 소중한 사람들이 생겼을 때 그들까지도 잊게 되면 어떡하지 라는 생각이 들곤 합니다. 하루는 수영을 다녀오는데 그날따라 비도 오고 몸도 따라주질 않아서 바지가 젖을 것은 생각도 안하고 무작정 길가에 털썩 주저앉..

말하지도 적지도 못한 순간들 -12

환자가 떠난 후 남은 딸이 할 일

beforeLafter

#죽음 #장례
끝났다. 사흘 간의 지옥같고 전쟁같고 실눈조차 뜰 수 없는 컴컴한 폭풍우 속에서 혼자 소리를 지르는 것 같았던 시간이 끝났다. 끝났다는 것이 식이 끝난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이 더 절망스럽다. 불과 사흘 전만 해도 물리적으로 사회적으로 엄연히 존재했던, 60여년을 살았던 한 '사람'을 인생을 제대로 정리할 시간조차 갖지 못한 채 후루룩 종이 한 장으로 사망을 확인받고, 고인이 된 고인을 만 이틀만에 정리해 사람..

4. Mit Partnerin

여성 파트너와 함께

맥주-

#여성서사 #퀴어
여성 파트너와 함께 이성애 규범과 그 역할에 익숙해진 내가, 동성애를 하기 위한 일련의 역할들과 그 수행에 익숙해지기까지는 조금 시간이 걸렸다. 대부분의 시간에 나는 실용적- 불필요한 장식이 없고 기능에 충실한-인 옷을 입고 있기 때문에, 여가로 쓸 수 있는 시간에는 사회에서 ‘여성적’ 이라고 해석하는 복장을 하고 있기를 좋아한다. 하늘하늘하고, 레이스나 프릴이 달려 있고, 패턴이 화려한 옷들. 재미있는 것은 패턴..
더 보기

타래를 시작하세요

여자가 쓴다. 오직 여자만 쓴다. 오직 여성을 위한 글쓰기 플랫폼

타래 시작하기오늘 하루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