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선덕여왕>(MBC, 2009) 미실
모든 장르에는 찰나일지라도 황금기라는 게 있다. 나는 한국 사극이라는 장르의 황금기는 2000년대라고 생각한다. 그 때 그 시절, 모두를 TV 앞에 앉아 이미 아는 결말로 치닫는 인물들을 어찌나 그렇게 몰두해서 봤던지. 지나간 시절의 드라마지만 요즘은 다시 볼 수 있는 방법이 많다.
최근 <선덕여왕>을 다시 봤다. 62부작이나 되는 길이로 요즘 드라마에서는 정말 흔치 않은 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보면 좀 눈물 나는 CG를 참고 꾸역꾸역 몇 화를 보기 시작하자 나는 10년 전의 드라마에 매료되어 버리고 말았다. 바로 시간이 지나도 빛이 바래지 않는 연기를 보여준 고현정의 미실 덕분이다.
걸출한 영웅
새삼 그런 생각을 한다. 이 드라마가 2019년에 제작되어 방영되었다면, ‘일부' 시청자들은 드라마 제작진이 ‘메갈'이고 ‘꼴페미'라며 길길이 날뛰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 그만큼 <선덕여왕>을 이끄는 두 메인 캐릭터인 미실과 덕만은 한국 드라마를 통들어봐도 매우 훌륭한 여성 영웅 캐릭터다. 드라마가 이 캐릭터를 소비하는 방식 역시 품격이 높다. 품격이 높다는 말은, 두 여성 캐릭터가 단지 여성이기 때문에 무조건 예쁘게 나온다거나, 성적대상화를 당하거나 불필요한 사랑을 연기하는 장면이 없다는 뜻이다. 대신 두 여자는 나라를 지배하고 사람을 다루며 공포와 신뢰를 이용하는 법을 논한다.
드라마의 서사상 주인공은 선덕여왕이 되는 덕만이지만, 덕만보다 미실에 눈이 쏠리는 이유는 몇 가지가 있다. 첫째, 미실은 그 어떠한 상황에 몰려도 사익보다 국익을 중시한다. 권력을 추구하지만 그 과정에서 누구보다도 신라를 위한다. 이게 미실이 악역이 아닌 이유다. 둘째. 미실은 스스로의 가치와 품격을 해치지 않는다. 스스로 세운 원칙을 망가뜨리지 않고 자신을 위한다는 명분으로 멍청한 짓을 하려는 수하들을 냉정히 단속한다. 셋째. 미실은 덕만을 성장시킨다. 사실상의 스승이다. 미실은 명석하며 진정으로 지혜를 추구하는 덕만의 성장이 장기적으로는 자신에게 위협이 된다고 해도 덕만을 가르치기를 멈추지 않는다. 그 배경에는 덕만이 성장해도 자신이 이길 수 있으리라는 자신감과 동시에 상대를 존중하고 이끌려는 이른바 ‘정치선배'로서의 지도력이 있다.
솔직한 감상은, 미실 같은 여성 상사가 있다면 발닦개가 되어서라도 따르고 싶다는 것이었다. 그만큼 미실은 영민하고, 카리스마있으며, 강인하고, 사람을 제대로 다룰 줄 아는 리더다. <선덕여왕>(MBC, 2009), 왓챠플레이에서 정주행 가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