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날 여기컨에서는 여성 기업 부스전, 커리어 리디자인과 실무 꿀팁 나누기 같은 다양한 워크샵 프로그램 이외에도 여성 기획자들의 강연이 열렸다.그 중 장혜선(브릭투웍스 이사)씨는 사회혁신 기업에서 일해온 기획자로, '기획자는 어떻게 성장할 수 있을까?’를 화두로 10년의 기획자 경력에 걸친 이야기를 공유했다. 인턴으로 시작해 이사까지 성장한 장혜선을 강연이 끝난 후 만났다.
장혜선 이사가 10년이 넘게 일해온 ‘크래비스파트너스'는 사업을 통해 사회에 긍정적인 변화를 일으키고자 한다. 내부에서 공익 목적의 사업을 기획하기도 하고, 소셜 벤쳐(이윤만을 추구하는 것 대신 사회적 문제를 함께 해결하고자 서비스 및 제품을 개발하는 스타트업 등 신생기업)를 육성하거나 투자도 한다.
Q. 지금 회사에서 맡은 일과, 이 회사에서 일을 시작하게 된 계기는?
크래비스파트너스의 ‘브릭투웍스’라는 모금 솔루션 사업에 참여하고 있다. 기부자들이 온라인으로 기부를 편리하게 진행하고, 모금을 받는 기관은 기부금 데이터를 투명하고 효율적으로 관리할 수 있도록 돕는 '도너스(DONUS)'라는 서비스를 제공한다.
크래비스파트너스에는 처음 인턴으로 입사했고 올해로 어느새 11년차다. 학부 및 대학원에서 컴퓨터 교육으로 석사까지 공부를 하다가 박사 과정을 밟을지 말지 고민을 하던 시기가 있었다. 내가 과연 여성으로서 지금 일을 시작하면 얼마나 오래 일을 할 수 있을 것인지 고민이 됐기 때문이다. 만약 일을 하다가 중간에 그만두게 되면 내가 그간 공부한 기간에 비해 일을 할 수 있었던 기간이 턱도 없이 짧기 때문에 매우 큰 손실이지 않나. 고민에 고민을 거듭 하던 중에 크래비스파트너스의 인턴 공고를 보게 되었고 ‘사람들에게 경제적인 자유를 주기 위해 회사를 운영한다’는 경영진의 이야기에 깊이 공감해 인턴십을 해보기로 결심했다.
그때의 나에게
해주고 싶은 이야기
소위 ‘사회생활’을 해본, 그리고 하고 있는 여성들이라면 누구나 다 이제 막 첫 조직에 발을 들인 여성 사회초년생들에게 꼭 해주고 싶은 나름의 조언 같은 것들이 있을 것이다. 몇 년 전 아무 것도 모르던 그 때의 나에게 해주고 싶은 이야기 같은 것들 말이다. 내 경우에는 친한 후배에게 입이 마르고 닳도록 했던 이야기가 이거였다. 일로 만나는 사람, 특히 남성의 경우 필요 이상으로 더 사무적으로 대하고 예의 상으로라도 불필요하게 웃거나 일 이외에 사적인 연락을 받지 말 것. 내 입장에서는 단순한 예의, 친절이었던 것이 상대방에게는 그렇게 받아들여지지 않는 경우가 너무 많고, 때로는 불미스러운 일이 일어났을 때 나의 친절했던 태도가 상대방의 면죄부로 돌변하니까. 이야기를 해주는 사람도 듣는 사람도 울적해지게 하는 이야기지만, 많은 여성 실무자들이 산업, 직군 가리지 않고 격하게 동의하는 부분이기도 하다.
Q. 여성 실무자, 특히 사회초년생들에게 꼭 해주고 싶은 이야기가 있을까?
기업이 제공하는 여러가지 사회적 가치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바로 채용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심지어 여기서까지 성별 차별이 일어나고 있다는 게 참 심각한 일이다.
어찌어찌 이 고비를 넘기고 채용이 되어도 힘든 부분이 많을 것이다. 사소한 것부터 말해보자면, 택시를 타고 늦게 집에 갈 때 항상 불안해서 힘들었다. 반드시 필요한 야근들이 있었고, 야근 후에는 택시를 타게 되는데 밤늦게 택시를 타는 게 참 무섭지 않나. 그렇다고 남직원들은 늦게까지 일하는데 내가 여자라는 이유로 집에 일찍 가기도 싫었다.
고객이 부적절한 반응을 보일 땐, 회사에 대응 매뉴얼이 있었던 게 도움이 됐다. 상사, 정확한 매뉴얼, 그리고 제대로 된 시스템의 역할이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상황은 개인이 홀로 감당하기에는 너무나 가혹하고 버거우며, 대응 방침이 조직 차원에서 공식적으로 있는 것과 없는 것의 차이가 크다.
커리어 측면에선, 첫 사회생활을 시작할 때는 다들 본인의 역량이 어느 정도인지 어떤지를 아예 모르니까 막막하고 답답할 수밖에 없다. 내 경우 해내기에 도무지 힘이 부치는 프로젝트가 있을 때 내가 계속 열심히 노력하고 또 배우면 잘 해낼 수 있는 일인 건지, 아니면 이건 내게 애초에 맞지 않고 노력해보았자 안 되는 일인 건지 판단이 안 될때가 참 힘들었다. 이 때 내 스스로에 대한 수많은 의구심과 의심이 들기 시작하는데, 여성 남성 간 차이가 여기서 나타나기 쉽다.
사회에서 남성의 자신감은 고양시키고, 여성의 자신감은 깎아내리다 보니 아무래도 여성들이 이 단계에서 자기 자신을 평가할 때 소극적인 경향이 있다. 나도 마찬가지였고. 자신의 커리어를 장기적으로 바라보는 시각마저 이렇게 성별에 따라 다르게 재단되고 마는 거다. 이 부분을 정말 잘 극복할 수 있어야 하는 것 같다.
사실 일정 기간이 지나야만 자연스럽게 알고, 배우고, 또 할 수 있게 되는 것들이 있다. 일을 시작한지 얼마 안 된 상태에서 ‘나는 소질이 없는 것 같다'며 바로 판단을 내리는 건 위험할 수 있다. 시도할 수 있는 데까지, 어느 단계까지는 한번 자기 자신을 믿고 가보기를 추천한다. 팀원과 상사에게 조언을 요청하고 이야기를 지속적으로 나눈 것도 큰 도움이 되었다. 피드백은 항상 소중하다.
언제까지 일할 수 있을까
장혜선 이사의 강연 직후 온라인으로 여기컨 참가자들로부터 실시간으로 질문을 받아 Q & A 시간을 가졌는데, 이 때 연이어 등록된 질문들 중 하나가 바로 “어떻게 10년이 넘게, 그것도 한 회사에서 일할 수 있었나” 였다. 다들 특히 ‘여성’으로 과연 언제까지 지금처럼 일을 해나갈 수 있을까 하는 고민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지금도 능력과 경력이 어딜 내놓아도 빠지지 않는, 출중한 여성들이 같은 고민을 하고 있는 걸 매일같이 보고 있다.
이미 자신의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곳에 있는 사람이라면 지금으로부터 당장 몇년 뒤를 고민하고 있을 것이고,다음 행보를 계획하고 있는 사람이라면 나이 앞 자리가 2에서 3으로 바뀌면서 모든 조직의 문 크기가 바늘 구멍이 되어버리는 것을 목격하게 된다. 지금이 이렇다면 다음 십 년, 그 다음 십 년은 과연 얼마나 혹독할 것인지 고민하지 않는 사람이 오히려 보기 드문 것 같다.
Q. 어떻게 그렇게 오랫동안 한 회사에서 일할 수 있는가?
내 경우가 특이한 건 맞다. 10년 내 이직 확률이 90퍼센트를 넘는다는 조사도 있다. 주변을 보면 2, 3년 차에 이직을 가장 많이 고민하고 또 실제로들 많이 하는데, 대부분의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과는 달리 많은 경우가 사실 개인의 의지보다는 주변 상황에 의한 이직이다.
의사나 교사 같은 전문직이 아닌 경우 나이를 먹고 결혼을 하고 아이를 가지면서 야근이 덜하고 업무 강도가 덜한 직군으로 옮기는 경우를 자주 보게 된다. 예를 들어 개발직군이었다면 개발 교육 같은 곳으로 옮기는 식이다. 이 경우 아무래도 커리어 성장 면에서 제한이 생기게 된다. 많은 여성들이 이런 식으로 자의든 타의든 자신의 전체 커리어 설계에서 결혼 또는 아이 계획에 큰 비중을 두게 된다.
커리어를 지키는 법
어쩌다 많은 여성들에게 결혼과 육아가 커리어 계획에 가장 큰 변수이자 때로는 걸림돌이 되어 버리기까지 하는 게 ‘현실'이 된 걸까. 그것도 아주 참 이상하게 한 특정 성별에게만, 단기적인 영향도 아닌 평생 커리어 계획 전반에 걸쳐서 영향을 주고 마는 걸까.
Q. 결혼과 육아 계획이 있는 여성이 자신의 커리어를 바라볼 수 있는 다른 가능성은 없을까?
내가 계속해서 일을 하고 있다 보니, 이런 문제로 사람들이 조언을 구하는 경우가 있다. ‘어떤 새로운 프로젝트나 분야에 도전을 하고 싶은데 언젠가, 아니면 조만간 아이를 낳긴 낳을 거니까 이걸 하면 안 될 것 같다’ 같은 경우 말이다. 함부로 판단하기 어려운 일이지만, 나는 그렇게까지 필요 이상으로 미리 계획을 하고 걱정을 할 필요는 없다고 본다. 미래의 걱정 때문에 현재 자신의 커리어가 원하는 꿈을 지금 포기하지 않아도 된다. 그리고 그 꿈을 포기한다고 해서 미래의 육아 계획이 탄탄해지고 완벽해질 거란 보장 역시 없다.
‘난 내년에 결혼을 해야 하니까 지금부터는 새로운 업무를 맡지 말아야지' 생각하기보다는 개의치 말고 계속 도전을 해나가면 더 좋겠다. 어차피 나이를 먹을 수록 내 의사와는 상관없이 내려야 하는 결정은 점점 더 많아진다. 그러니 미리 타협을 할 것까진 없다. 나이가 더 들어서 원하는 분야에 도전하는 건 지금 하는 것보다 더, 몇 곱절로 더 힘들다. 그러니, 미리 당겨서 포기하지 말자.
강연에서 장혜선 이사는 출산 직후 일과 육아를 병행했던 시기 가장 어려웠던 점으로 늘 부족한 체력과 시간, 순간순간 뒤쳐지는 기분과 불안감, 예측불가능한 사건들, 이 세 가지를 꼽았다. 힘든 시간이었고 지금도 현재 진행형이지만,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그만두지 않고 자신이 잘 하는 분야에서 계속 기획자로, 리더로 성장해 나가는 자신의 모습이 행복하다고 그는 거듭 이야기했다.
Q. 일과 육아 병행을 실제로 해 보니 어땠는지 궁금하다.
결혼과 육아는 사실 계획을 미리 한다고 해도 그대로 되기 참 어려운 것 같다. 아기를 낳은 후 갑자기 몸이 엄청 안 좋아진 사람을 보기도 했다. 출산 후 아이를 돌봐 주기로 했던 사람이 갑자기 사정이 여의치 않아져서 육아 계획을 전면적으로 바꾸는 경우도 있다. 한 가지 확실한 건, 어떤 식으로 하든 육아를 혼자 하게 되면 정말 힘들다는 점이다. 또 육아를 시작하게 되는 순간 전혀 예상치 못한 일들이 계속해서 일어나기 때문에 시간 관리가 관건이 된다. 아이가 갑자기 아파서 병원에 입원하는 등 미리 계획할 수 없고, 내가 컨트롤할 수 없는 범주의 일들이 돌발적으로 일어난다. 물리적인 시간 자체가 확 줄다보니 시간이 주어졌을 때 집중해서 업무에 전념할 수 있어야 한다.
다행인 건, 이 시기에는 끝이 있다는 거다. 아이가 어렸을 때는 일을 그만둔 게 잘한 결정이었다고 말하던 친구가 아이가 유치원을 가고 시간이 지나면서부터 자신의 결정을 후회하는 걸 본 적 있다. 그리고 이 때는 다시 일터로 돌아가기가 많이 어렵다. 일과 육아를 병행하는 여성들 사이에서는 ‘아이를 세살까지만, 세살까지만 키우고나면 내가 하고 싶은 걸 계속해서 해나갈 수 있다'는 소위 희망 같은 것이 있다.
하나 더. 현대 여성 대다수가 일을 하다 보니 마치 과거에 비해 요즘 엄마들은 예전에 비해 자신의 아이에게 그리 많은 시간을 쓰지 못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자기 자신을 죄책감으로 괴롭히는 엄마들도 많다. 그런데 이건 사실이 아니다. 관련 연구들을 보면, 오히려 예전 전업주부 엄마와 일을 하는 요즘의 엄마가 자신의 자녀와 보내는 시간 간에 별 차이가 없다.
예전의 전업주부 엄마라고 하면 자신의 자녀들에게 엄청나게 많은 시간을 썼을 것 같은데, 워낙 집안일이 많고 현대 가전도 없다 보니 집이라는 같은 공간에 있었을지는 몰라도 오히려 자녀에게 사용하고 자녀와 소통하는 시간 자체는 그리 많지 않았다는 거다.
자신이 좋아하는 일이 있는 현대의 여성에게 자신의 커리어 계획 전체를 결혼과 육아를 중심 기반으로 설계하는 건 정신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리스크가 크다고 본다. 인생은 길고, 지금 포기하기에는 이르다. 어렵겠지만 가능한 방법이 있다면 커리어를 이어나갈 수 있게끔 주변의 도움을 구하고, 보조 양육자를 찾는 등 효율적인 방안들을 다같이 찾아나갈 수 있었으면 좋겠다.
리더가 된다는 것
자신을 기획자라고 소개한 장혜선 이사지만, 그에게는 이사라는 직함 역시 달려 있다. 어떤 조직에서든 리더가 되는 순간 권한이 두 배가 되면 책임은 그 열 배가 된다고들 한다. 책임이 막중한 와중에 리더가 여성인 경우 워낙 작디 작은 모수 탓에 원하든 원치 않든 어느 순간 ‘여성’의 대표자 같은 것이 되어버리게 되기도 하고, ‘여성'이라는 타이틀이 어디를 가든 항상 꼬리를 따라 다닌다. 네이버 한성숙 대표이사의 인터뷰 기사 타이틀 상당수에 ‘알파걸', ‘유리천장을 깨뜨린', ‘여성 대표'가 들어가 있는 것만 봐도 그렇다.
입맛이 씁쓸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는 더 많은 그들, 리더들의 이야기가 필요하다.
Q. 조직에서 리더가 된다는 건 어떤 것인가?
회사에서 리더가 되면 가장 크게 책임을 져야 하는 게 매출과 수익, 그리고 인사다. 어느 것 하나 쉬운 게 없다. 책임자가 되기 전에는 어디까지나 내가 맡은 일만 열심히 하면 되고, 그 일만 잘 하면 승진한다. 그런데 이게 참 어려운 게, 팀원이었다가 팀장이 되면 내가 팀원일 때까진 일을 잘 하는 사람이었는데 팀장이 되는 순간 내가 엄청 일을 못하는 팀장이 되어 있다. 처음 해보는 거니까 그렇다.
어제까지는 서비스 설계를 잘 해서 칭찬을 받고 있었는데, 오늘은 팀장으로서 고객관리도 잘 해야 하고 세일즈도 잘 해야 하는 거다. 연습을 미리 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그 자리에 가봐야만 내가 리더로서 무슨 일을 맡고 어떤 책임을 져야 하는지 알게 된다. 이 기간이 힘들다. 때로는 이런 괴리감을 느끼는 시간이 일년, 이년까지도 가는 것 같다. 이 때 ‘아 나는 역시 안 되나 보다' 하고 그만둘 수도 있겠지만, 사실은 바로 그 때 성장할 수 있다.
어렵고 힘든 것 투성이기만 한 건 아니다. 리더가 되었을 때 가장 좋은 건 주변 사람들과 조직에 더 크게 영향을 줄 수가 있다는 점인 것 같다. 팀원들을 더 도와줄 수도 있고, 내 노력 여하에 따라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범위 역시 커지면서 실질적인 변화를 만들어 낼 수가 있는데 그게 참 좋다. 이직을 하거나 일을 그만둘 때 용기가 필요한 것처럼 일을 계속 하는 데에도 용기가 필요한 것 같다. 일을 중간에 그만두고 싶을 때도 있고 많이 힘들 때도 있었는데, 그래도 내가 이렇게 내가 하고 싶은 일을 계속해서 하고 있으면 용기가 필요한 누군가가 혹시라도 나를 보고 일을 계속해 나가진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보기도 한다. 이렇게 서로가 서로에게 힘이 되어줄 수 있도록 계속 앞으로 나아가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