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이 버린 왕실의 여인들 5. 이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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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이 버린 왕실의 여인들 5. 이구지

실소

일러스트레이션: 이민

노비를 사랑한 양녕대군의 딸,
음란 여성으로 낙인찍히다

내 이름은 이구지. 양녕대군의 딸. 아무도 무시하지 못할 신분이었다. 하지만 나는 음란한 여자로 손가락질당하면서 조선 왕실의 수치가 되었고, 죽임까지 당했다. 왕실 족보에서 이름이 빠지고, 음란하고 방탕한 여자를 기록하는 자녀안(恣女案)에 이름이 올랐다. 

내가 음란한 여자라고? 나는 조선 사회 전체를 떠들썩하게 만든 유감동이나 어을우동처럼 숱한 남자를 만나 관계를 맺은 적이 없다. 남편이 사망한 후 노비를 사랑한 죄밖에 없다. 물론 신분 질서가 엄격했던 조선 사회에서는 받아들여질 수 없는 사랑이었다.

왕의 손녀가
노비와 간통했다고?

자유분방한 행동으로 끊임없이 물의를 일으키다 동생 충녕대군(세종)에게 세자 자리를 내주었던 양녕대군. 그는 정처에게서 3남 4녀, 여러 첩에게서 6남 10녀를 낳았다. 양녕대군의 첩이 낳은 딸인 이구지 역시 아버지 못지않게 거침없는 행동으로 조선왕조실록에 기록을 남겼다. 이구지에 관한 기록은 조선왕조실록 성종 6년(1475년) 12월에 처음 등장한다.

전라도 광주에서 한 사노비가 명문가 여성과 간통한 후 살찐 말을 타고 가벼운 옷을 입고 방자한 행동을 거리낌 없이 한다는 소문이 퍼졌다.
- 성종실록 62권, 성종 6년 12월 22일

사헌부에서 조사하니 그 명문가 여성은 결혼해서 전라도 광주에서 살다가 남편과 사별(死別)한 이구지였고, 사노비는 천례(天禮)라는 이름의 종이었다. 이구지의 여종을 불러 신문하니, 천례의 아내는 아이를 낳은 후 도망갔다고 했다. 

그런데 이구지가 천례와 천례의 아이를 챙기는 게 유별났다. 천례 아이를 여종에게 맡겨 젖을 먹여 기르게 했고, 천례가 먹고 입고 자는 게 다른 종과 달랐다. 여종은 여주인이 외롭게 지내는 천례를 불쌍하게 여겼다고 했지만, 그 아이가 이구지와 천례가 낳은 자식이라는 소문이 파다했다. 천례의 아내였던 여성 역시 천례가 결혼 초부터 자신을 외면해 자식을 낳을 일이 없었다고 털어놓았다.

태종의 손녀가 자신의 종과 정을 통해 자식까지 낳았다는 소문이니 조정이 발칵 뒤집혔다. 신하들은 조선의 신분 질서를 위협하는 일이니, 명명백백하게 밝히자고 주장했다. 하지만 성종은 간통하는 현장에서 잡은 것도 아닌데, 소문만 가지고 잘잘못을 따질 수 없다고 우겼다. 임금이 파견한 경차관이 소문은 사실이 아니라고 보고하자, 성종은 천례도 곧장 풀어주면서 사건을 무마하려고 했다. 

사간원 관리들은 이런 추문을 들은 여주인과 종을 어떻게 계속 한집에 살게 하겠느냐면서 천례를 먼 곳으로 옮겨 서로 오가지 못하게 하자고 제안했다. 하지만 성종은 나라가 개입하면 소문을 인정하는 꼴이라면서 그 제안도 들어주지 않는다.

미안하지만,
죽여야겠다

13년이 흘렀다. 성종 19년(1488년) 10월, 전라도 관찰사로 부임한 김종직이 이렇게 보고했다.

일러스트 이민


“양녕대군의 첩이 낳은 딸 이 씨(이구지)가 권덕영의 아내가 되어 광주에서 살았는데, 권덕영이 죽은 후 천례와 정을 통해 딸 하나를 낳아 이름을 준비(准非)라 하였습니다. 그 딸이 장성해 지난해에 이미 결혼했습니다.”
- 성종실록 221권, 성종 19년 10월 4일

딸을 결혼시키면서 두 사람의 관계를 둘러싼 소문이 다시 여러 사람의 입에 오르내렸던 것 같다. 신랑 집안에 신부가 사실은 양녕대군의 외손녀라는 사실을 넌지시 이야기했을 수도 있다. 김종직은 이 일을 철저히 조사했다. 관련자 40여 명을 옥에 가두었고, 결정적인 증언도 받았다. 이구지가 딸을 낳을 때 해산을 도왔다는 여성이 그때 상황을 자세히 털어놓았다. 하지만 천례는 고문을 받으면서도 끝까지 자백하지 않고 버티다가 사망했다.

몇 개월 뒤인 성종 20년 3월과 4월, 성종은 이구지의 사사(賜死)를 의논하자면서 육조 판서, 한성부 당상관, 대간, 종친 등을 불렀다. 증거가 명백해서 이구지와 천례의 관계는 의심할 수 없는 사실이 되었을 때였다. 천례는 이미 사망했기 때문에 벌을 줄 수 없었고, 이구지에 대한 처벌이 문제였다. 조선 시대 법에서도 사형 판결을 할 때는 신중히 처리하기 위해 세 차례 거듭해서 조사해야 하고, 증거가 명백해도 자백을 받아야 했다. 하지만 이구지는 임금의 친족이어서 관례상 고문으로 자백을 받아내기 어려웠다. 어떻게 처벌할지 의견이 분분했다.

임금의 친족이어서 고문도 못 하는데, 어떻게 사형을 내릴 수 있느냐는 의견도 있었다. 종친 대표로 회의에 참석한 문종의 외손자 정미수는 태종의 손녀인 데다 국가와 관계된 범죄를 저지른 것도 아니니 용서해야 말했다. 하지만 성종은 의금부에 이렇게 명령했다.

“권덕영의 아내 이 씨가 자기 종과 간통해 딸을 낳아 기르기까지 증거가 확실하다. 다만 이 씨가 자백하지 않을 뿐이다. 이 씨는 종친의 딸이어서 고문하기가 미안하지만, 법으로 다스리지 않을 수도 없다. 그러니 사약을 내려 죽이라”
- 성종실록 226권, 성종 20년 3월 7일

 

고문을 할 수는 없지만, 죽일 수는 있다는 논리였다. 성종의 태도는 왜 이렇게 달라졌을까? 이구지에 관한 소문이 처음 불거졌던 성종 6년은 정희왕후가 섭정하고 있을 때였다. 성종은 이구지 문제도 정희왕후에게 물어서 처리했다. 이 문제가 다시 제기되었던 성종 19년은 달랐다. 정희왕후는 사망했고, 성종의 생각과 태도도 달라졌다. 성종 11년에 강상(사람이 지켜야 할 도리)을 범한 죄를 적용해 어을우동을 죽이고, 성종 13년에 “임금과 인수대비, 정희왕후 등 윗사람에게 공손하고 온순하지 않았다” 등의 이유를 들어 폐비 윤 씨에게 사약을 내려 죽인 다음이었다. 성종은 부덕(婦德)이라는 이름으로 조선 여성의 목줄을 죄었고, 거기에서 벗어나면 가차 없이 제거했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랑?

이구지는 결국 성종이 내린 사약을 마시고 생을 마쳤다. 두 달 후에는 자녀안(恣女案)에 이름이 올라가면서 조선의 대표적인 음란 여성으로 낙인찍혔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이구지 자신의 목소리가 한마디도 나오지 않는다. 어떤 항변도 자백도 없다. 그가 어떤 생각을 하면서 어떻게 살았는지, 그와 천례가 실제로 어떤 관계였는지는 그저 추측만 할 수 있을 뿐이다.

일러스트 이민


이구지의 어머니는 양녕대군의 종이었다가 첩이 되었다.
- 성종실록 259권, 성종 22년 11월 4일 참조

태종의 외손녀이자 노비의 딸. 그는 왕족인 아버지의 세계와 노비였던 어머니의 세계에 걸쳐 있는 존재였다. 나이가 차자 권덕영이라는 이름의 남자와 결혼했지만, 남편과 사이가 좋지 않았다. 조선왕조실록은 그 이유로 “권 씨의 아내가 되어서도 부도(婦道, 여성이 지켜야 할 마땅한 도리)를 따르지 않았다. 그래서 권덕영이 함께 살지 않았다”라고 기록한다.*1 

무슨 도리를 지키지 않았는지 자세한 설명은 없다. 집 나간 남편은 잘못이 없고, 무조건 아내 탓이라는 식이다. 이구지는 시댁 식구와 함께 살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양녕대군의 딸로서 어느 정도 재산을 물려받아 따로 살았던 것 같다. 그는 조선 사회가 요구하는 고분고분한 아내가 아니었다. 남편에게 할 말은 했고, 그게 ‘부도를 따르지 않았다’로 해석되었다.

남편이 사망하자 혼자 살림을 꾸려가던 그는 자신을 돕던 종 천례에게 특별한 감정을 느꼈던 것 같다. 두 사람 사이에 정서적 육체적 교감이 생겼고, 아이도 낳았다. 왕의 손녀와 노비의 사랑. 조선 시대에는 허용되지도 않고 상상할 수도 없는 관계였지만, 그는 거침이 없었다. 이구지가 조선 시대 신분제의 틀에 갇히지 않고 노비를 천한 존재로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에 가능했던 관계였다. 그가 천례를 드러나게 특별 대우하는 바람에 여러 사람의 입에 오르내렸다. 노비가 비단옷을 입고 좋은 말을 타고 다니니 곱게 보지 않는 사람이 많았다. 여주인과 종이 그렇고 그런 사이라고 소문이 퍼졌다. 그래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땅을 넘기면서 천례의 아버지까지 챙겼다.

두 사람은 법적인 부부로 살지는 못했지만, 세상의 시선을 두려워하지도 않았다. 성종 6년에 이미 두 사람의 관계가 드러나 죽을 수도 있었지만, 그 후로도 10여 년 동안 변함없이 생활했다. 함께 아이를 키워 결혼까지 시켰다. 이구지가 천례 외에 다른 남자와 관계를 맺었다는 기록은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다. 그런데 이구지를 어떤 잣대로 음란하다고 할 수 있을까? 조선왕조실록은 이구지가 원래 음란했던 여성이라면서 “여러 유생이 모여서 글을 읽는 이웃집에 자주 드나들었다”는 어이없는 이유를 든다. 달리 트집 잡을 게 없었다는 증거다.

지금의 시선으로 보면 남편도 없는 이구지가 남자 종과 정을 통했다는 이유만으로 죽임을 당했다는 게 도저히 이해되지 않는다. 조선시대는 남성과 여성의 욕망에 철저히 이중 잣대를 들이댔다. 남성은 여러 첩을 두고 기생까지 만나 마음껏 성적인 자유를 누렸지만, 여성은 재혼만 해도 부도덕한 여성으로 몰렸다. 남자 주인이 여종과 간통했다면 죄가 되지 않았다. 그 여종을 천첩(賤妾)으로 삼으면 그만이었다. 여주인과 종의 간통만이 강상의 질서를 어긴, 용서 못할 죄였다.

천례는 혹독한 고문을 당하면서도 입을 열지 않다가 죽었다. 자신이 자백하지 않았으니 이구지는 안전할 줄 알았을 것이다. 하지만 얼마 후 이구지도 죽임을 당했다. 두 사람의 관계가 조선 사회의 신분 질서를 위협하기 때문이었다. 왕이 내린 사약을 마시면서 이구지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양녕대군은 남의 첩까지 빼앗으면서 숱한 여성 편력을 벌였다. 이구지가 ‘그 아버지에 그 딸’이라서 조선의 대표적인 음란 여성이 되었다고? 임금의 손녀와 노비라는 신분 차이를 뛰어넘어 지고지순한 사랑을 했다고 보아야 하지 않을까.

*1 성종실록 226권, 성종 20년 3월 7일

 

선리

조선왕조실록이 지닌 날 것 그대로의 맛을 새록새록 느끼고 있다. 소소한 이야기들을 통해 만나는 인물은 훨씬 입체적으로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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