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이 버린 왕실의 여인들 1. 세자빈 봉씨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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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이 버린 왕실의 여인들 1. 세자빈 봉씨 (1)

실소

일러스트레이션: 이민

여성의 삶은
부록이 아니다

조선왕조실록을 읽다보면 온 세상이 남자들에 의해 돌아가는 느낌이다. 실록 자체가 주류 남성들의 시선으로 본 조선이기 때문일 거다. 그래서인지 실록에 남아있는 여인들의 기록은 마치 본편에 딸린 부록 같다. 남자들의 권력싸움이 본편이라면, 여인들의 행적은 번외편처럼 간략하다.

왕실의 여인들도 예외는 아니다. 왕후의 정치활동조차 축소하거나 생략했고, 불가피한 경우에도 최대한 언급을 자제했다. 세조의 왕위찬탈만 해도 그렇다. 사관은 계유정난이라는 남자들의 칼부림은 자세히 기록했지만, 그 과정에서 의리를 지킨 여인들에 대해서는 큰 관심이 없었다. 단종의 후견인 혜빈 양씨나 단종의 아내 정순왕후 송씨에 대한 기록이 별로 남아 있지 않은 이유다.

왕실 여인의 비극을 개인적 일탈로 취급한 경우도 많다. 문종의 세자빈 봉씨는 엽기적인 행실로 궐에서 쫓겨났고, 성종 때 폐비 윤씨는 질투심이 강해 죽었으며, 양녕대군의 딸 이구지는 음란해서 강상죄를 지었다는 식이다.

그러나 왕실 여인들은 조선 정치 한복판에서 숨 쉬며 살아간 존재들이다. 정치와 무관하려야 무관할 수가 없는 위치다. 모든 정치적 사건에는 왕실 여인들이 있었고, 그들의 모든 활동은 정치적이었다. 그저 사건의 변두리, 흔한 가십거리로만 넘길 수 없는 이유다.

‘조선이 버린 왕실의 여인들’은 이처럼 부록으로 취급되는 왕실 여인들의 삶을 복원해 보고자 한다. 그 과정에서 왕실 여인들의 적극적인 정치 행보를 보았고, 그들이 겪어야 했던 숨막히는 제도적 강압도 만났다. 부족한 기록의 틈에서 들려오는 그들의 목소리, 오랫동안 외면했던 그 소리에 귀를 기울여 본다. 

반짝반짝 빛나던
세자빈 봉씨

세종 18년 10월 어느 날, 세종과 소헌왕후는 격앙된 표정으로 앞에 앉은 여인을 노려봤다. 한때 생기 가득했던 젊은 여인의 눈동자는 불안하게 흔들렸다. 그리고 두려움과 흥분이 뒤섞인 목소리는 저절로 높아졌다.

“궁녀 소쌍과 단지는 서로 사랑하고 좋아해 밤에는 같이 자고 낮에도 목을 맞대고 혓바닥을 빨았습니다. 이는 모두 그들의 일이지 저는 소쌍과 잔 일이 없습니다.”
- 세종18년 10월 26일

궐내에 파다한 세자빈 봉씨와 궁녀 소쌍의 해괴한 소문. 그 소문에 대해 봉씨가 내놓은 답변이다. 그러나 세종과 소헌왕후는 그의 말을 믿지 않았다. 소쌍이 이미 “세자빈께서 옷을 다 빼앗고 강제로 들어와 눕게 하여 남자의 교합하는 형상과 같이 서로 희롱”했다고 자백했기 때문이다. 혹 봉씨의 말이 맞다 해도 달라질 건 없었다. 궁녀들이 하는 은밀한 행위를 보았다면 반드시 유혹에 넘어갔을 거라고 세종은 생각했다.

그리고 10월 26일, 세종은 대신들을 불러 세자빈 봉씨의 잘못을 낱낱이 설명하고 그를 폐위시킨다. 봉씨가 궐에 들어 온 지 7년만의 일이었다.

아무도 그의 말을
믿지 않았다

세자빈 봉씨는 조선 역사상 가장 엽기적인 세자빈으로 꼽힌다. 궁녀들과의 연애 사건 외에도 그의 폐위 사유는 차고 넘친다. 가짜 임신에, 궁녀 구타에, 술주정에, 물품 횡령 방조까지........ 아무리 뜯어 봐도 두둔할 여지가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일까? 이후 어느 누구도 세자빈 봉씨가 끝까지 소쌍과의 동침을 부정했다는 사실을 기억하지 않았다. 세종의 말에 더 신뢰가 가는 데다, 처벌을 두려워한 봉씨가 거짓말을 했을 가능성도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실록을 살펴보면 봉씨의 진술에도 꽤 신뢰할 만한 구석이 있다. 우선 증거라고는 소쌍과 궁인들의 증언뿐이요, 구체적인 증거가 없다. 게다가 이 사건으로 처벌 받은 사람은 세자빈 봉씨 한 사람뿐이다. 이상하게도 실록에는 상대였던 궁인 소쌍에 대한 처벌 기록이 없다. 이는 앞서 폐위됐던 세자빈 김씨의 경우와는 대조적이다. 당시 세자빈 김씨에게 주술을 알려줬던 시녀 호초는 곧바로 참형을 당했기 때문이다.

사건 처리 과정에서 감지되는 봉씨의 처지도 어딘가 묘하다. 궐내 누구 하나 봉씨의 말을 믿으려 하지 않았고, 봉씨의 허물을 덮어주려 하지도 않는다. 특히 이상한 건 처음 소문을 들은 문종이 소쌍을 찾아갔을 때다. 아침 일찍 소쌍의 처소로 들이닥친 문종은 거두절미 “네가 정말 세자빈과 자느냐?”고 추궁한다. 그러자 세수를 하던 소쌍은 곧바로 ‘그러하옵니다’라고 죄를 인정한다. 당시 궁인끼리의 동침은 곤장 70에서 100대에 해당했다. 아무리 놀랐다지만 그토록 쉽게 자백하기엔 너무 큰 중죄다.

이후에도 궁인들은 세자빈 봉씨의 일거수일투족을 실시간으로 보고한다. 세자빈이 소쌍과 단지를 질투해 미행을 시켰다, 세자빈의 집착이 무서울 정도다, 둘이 동침한 이후부터는 이불을 손수 개켰다.......

내쫓은 자의 입장에서 보면 이 상황은 분명 음란이요 부도덕이다. 그러나 쫓겨난 자의 입장은 다르다. 사방에서 감시의 눈을 번득이는 궁궐, 그 속에서 비빌 언덕 하나 없는 세자빈. 이래서야 누구 하나 봉씨를 온전히 바라봤을 리 없다. 감시와 고립 속에 변명의 기회조차 없었을지 모른다. 지금까지도 세자빈 봉씨를 이해 못할 별종으로만 기억하는 이유다.

일러스트 이민


시골 소녀
세자빈이 되다

봉씨는 문종의 두 번째 세자빈이었다. 문종의 첫 번째 세자빈이었던 김씨는 봉씨가 입궐하기 직전 폐위됐다. 세자빈 김씨는 문종의 총애를 얻겠다고 궁녀들의 신발을 훔쳐 주술을 행하려다 딱 걸렸고, 곧바로 폐위됐다. 그때 문종의 나이 16살이었다.

그리고 세종은 김씨를 폐위시킨 바로 그 날, 서둘러 전국에 금혼령을 내린다. 그리고 이번만큼은 반드시 반듯한 세자빈을 뽑겠다고 의지를 불태운다. 하여 전국에 관리를 보내 집집마다 처녀를 만나보게 하고, 그 중 선발된 이들을 모아 친형인 효령대군에게 심사하게 했다. 궐에 후보들을 불러 모아 심사하는 ‘간택제’를 처음으로 도입한 것이다. 예법 상 직접 간택에 참여할 수는 없지만 최대한 적극적으로 관여하려는 의지였다.

그렇게 고르고 고른 여인이 세자빈 봉씨다. 봉씨는 정6품 사헌부 감찰을 지낸 봉여의 딸이다. 뼈대는 있으나 특별히 내세울 것 없는 한미한 집안이었다. 게다가 그는 한양이 아닌 시골에서 나고 자랐다. 덕분에 한양의 귀한 아씨들과는 달리 유교적 교양이나 예법과는 다소 거리가 멀었다.

그럼에도 봉씨를 택한 이유는 두 가지로 추측된다. 하나는 아름다운 외모다. 세종은 간택 당시 후보들의 외모를 강조하고 또 강조했다. 신하들의 우려에도 “혹시 인물이 아름답지 않으면 불가하다”*1 고 못을 박았을 정도다. 후사를 낳아야 하는 만큼 건강한 신체는 기본이었다. 그 기준에 맞춰 선발된 이가 봉씨다. 그러니까 봉씨는 간택 당시 건강하고 아름답고 해맑은 10대 소녀였다. 어쩌면 그 반짝반짝 빛나는 생기가 심사위원들을 매료시켰을지도 모른다.

다른 하나는 세종의 자신감이다. 세종은 어리석은 백성도 가르치고 이끌면 누구든지 변화시킬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러니 봉씨도 잘만 가르치면 훌륭한 세자빈이 될 거라 확신했다. 그런 측면에서 봉씨의 가문이 한미하다는 점과 시골에서 자랐다는 사실은 장점이기도 했다. 차고 넘치게 과분한 자리에 있으면 저절로 “공손하고 묵묵하게 자기를 다스릴 거”*2 라 기대한 거다.

사랑 노래를
부르는 세자빈

그런데 세종이 간과한 점이 하나있다. 당시 세종이나 유학자들은 백성들이 모르기 때문에 문란하고, 배우지 못해 어리석다고 생각했다. 유교적 방식으로 살지 않는 백성들을 무지 혹은 백지 상태로 규정한 거다. 이렇게 되면 유교적 가치관으로 살지 않는 백성들은 어둠 속에 사는 불쌍한 존재, 즉 계몽의 대상이 된다.

그러나 백성들의 입장에서는 조금 당황스러운 전제다. 유학을 모른다고, 세상의 변화에 둔감하다고 삶이 어둠인 건 아니다. 당시 백성들은 유학의 기초도 몰랐지만 나름의 방식으로 잘 먹고 잘 살았다. 다만 그들의 삶이 조선이 아니라 고려의 방식에 가까웠을 뿐이다.

봉씨가 나고 자란 시대는 조선이 건국된 지 고작 2~30년이 지났을 무렵이다. 당시 민간에서는 여전히 고려의 풍속이 지배적이었다. 딸들도 친정 부모의 제사를 지냈고, 재산도 공평하게 분배받았다. 자연히 여자라고 주눅 들지 않았고, 당당하게 자신의 권리를 주장했다. 무엇보다 여성의 욕망에 관대했고, 남녀 모두 그 욕망에 솔직했다. 태조, 정종, 태종 같은 왕들도 모두 한 번 결혼했던 여인을 후궁으로 맞았고, 대신들도 심심찮게 돌싱들과 재혼했다.

양반가의 여인들도 그랬다. 70세까지 스캔들을 일으켰던 김씨, 수십 명의 남자와 관계한 유감동, 혼인도 하기 전에 간통부터 한 금음동, 동자까지..... 실록에 기록된 양반가 여인들의 간통 사건만 해도 수두룩하다. 겉으로 드러난 이야기가 이 정도라면, 민간의 남녀상열지사는 어떠했을지 짐작할 만하다.

봉씨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궐에 들어가기 전까지 나름의 방식으로 욕망하고 살아왔다. 자신의 목소리를 내는 데 주저함이 없었고, 성적 욕망을 표현하는 데도 솔직했다. 당시 보통의 여인들처럼 말이다. 하여 봉씨는 남편 문종에게 거침없이 다가선다. 심지어는 노래도 만들었다. 내가 그대를 욕망하고 있다고 말이다.

“세자가 며칠 동안 왕래하다가 그 후에 드물게 찾아갔다. 그러자 봉씨가 노래를 지어 궁궐의 여종들에게 부르게 했는데, 그 내용이 세자를 사랑한다는 것이었다.”
- 세종 18년 11월 7일

요즘으로 치자면 사랑하는 남편을 위해 노래를 작곡해 유튜브에 올렸다고 할까? 뿐만 아니다. 봉씨는 남편의 늙은 종에게 매일 밤 문종을 데려오라고 조르고, 담벼락에 붙어 산책하는 남편을 훔쳐보며 “저분이 어찌 안방으로 들어오지 않을까?”하며 속을 태우기도 한다. 자신의 욕망이 흐르는 대로 직진! 그렇게 살아 온 봉씨였고, 그렇게 살고 싶은 봉씨였다.

그러나 세종과 문종의 생각은 달랐다. 세종은 훗날 폐위를 논의하면서 봉씨의 이런 애정 공세를 비(鄙), 그러니까 더럽고 천박하다고 규정한다.*3 여인이 은밀한 욕망을 대놓고 표현하는 것을 용납할 수 없었던 거다. 욕망에 솔직한 봉씨, 절제와 순종을 기대한 세종과 문종. 공존할 수 없는 이들의 어긋남, 그 잘못된 만남의 시작이었다. 

*1 세종11년 8월 4일

*2 세종18년 11월 7일

*3 세종18년 11월 7일

 

필자 정기재

오래된 건 다 좋아하는 옛이야기 덕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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