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이 버린 왕실의 여인들 3. 혜빈 양씨

알다조선왕조실록조선의 여성들역사

조선이 버린 왕실의 여인들 3. 혜빈 양씨

실소

일러스트레이션: 이민

어린 왕을 지킨 충신
혜빈 양씨

조선의 왕 27명 중에서 가장 사람들의 마음을 울린 왕을 꼽자면 첫 번째가 단종일 거다. 이유는 두 가지다. 하나는 12살의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올라 작은아버지(세조, 세종의 2남)한테 왕위를 빼앗기고 죽임까지 당했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태어난 다음날 엄마를 잃었다는 것이다. 왕실에서 엄마의 부재는 모진 바람 속에 맨 몸으로 서 있는 것처럼 위태로운 상황임에 틀림없다. 왕위라는 게 혼자의 힘으로 오르고, 유지되는 게 아니니까. 외가와 처가의 힘은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지원세력이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단종은 시작부터 결핍된 환경이었고 마지막 또한 애달프다. 강원도 영월로 유배 돼 죽임을 당하고, 주검 또한 제대로 수습되지 못했으니*1.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단종은 누구보다 많은 충신을 거느린 왕이기도 하다. 김종서로 대표되는 삼공신, 안평대군과 금성대군*2 등 육종영, 성삼문과 박팽년 등 사육신, 남효온과 김시습 등 생육신, 이들을 포함해 단종을 위해 목숨을 던진 충성스런 신하가 자그마치 268명*3이다.

그리고 여기 또 한 사람, 단종이 태어난 직후부터 굳건히 단종의 곁을 지킨 사람이 있다. 바로 세종의 후궁 혜빈 양씨이다.

단종을 키우다

며느리 복 없기로 소문난 세종은 기다리던 첫 손주를 얻은 다음날 며느리를 잃었고,*4 세자(문종)는 왕실의 대통을 이을 아들을 낳아 준 아내를 황망하게 보내야 했다. 그렇게 세손(단종)은 왕실의 귀한 적장자로 태어났지만 태어난 지 하루 만에 엄마를 잃었다.

하지만 세자빈이 죽었다고 다들 슬퍼만 하고 있을 수는 없었다. 세종과 소헌왕후 심씨는 성심을 다해 핏덩이 세손을 키울 사람을 찾아야 했고, 혜빈 양씨를 선택한다. 양씨는 세종의 후궁이니 단종에게는 할머니가 된다.

후궁 중 최고 자리인 빈에 오른 혜빈 양씨, 하지만 양씨는 이름 있는 집안의 딸도 아니고 간택으로 뽑힌 후궁도 아니다. 세종의 후궁 중 간택으로 뽑힌 사람은 두 명 뿐이다.*5 그렇다면 양씨 또한 세종의 다른 후궁들처럼 내명부*6 소속 궁인으로 궁궐 생활을 시작했고, 어디선가 세종의 눈에 띄었다는 뜻이 된다.

두 사람의 인연과 관련해 떠도는 이야기가 있다. 양씨가 세자(문종)궁의 궁인으로 있을 때, 아픈 세자를 지극정성으로 보살폈고, 그 모습에 감동한 세종이 자신의 후궁으로 삼았다는 얘기다. 안타깝게도 이 이야기는 실록에 전해지지 않는다. 그리고 이 이야기의 사실 여부는 그리 중요한 것도 아니다. 하지만 이 이야기는 양씨의 성품을 짐작할 수 있는 중요한 키워드 하나를 제공한다.

지극정성! 세종과 소헌왕후 그리고 문종이 어미 잃은 세손을 맡길 정도면 양씨의 성품은 온화했을 거고, 매사 일처리를 아주 분명히 하는 성격이었을 거다. 그것도 마음을 다해서! 그렇지 않고서야 12살, 10살, 7살 난 아들 셋을 키우고 있던 혜빈 양씨에게 귀한 세손을 맡길 세종이 아니니까. 혜빈 양씨는 단종의 어머니 자리를 대신해서 갓 태어난 단종의 양육을 책임진다. 이렇게 단종을 갓난아이 때부터 키웠으니 단종에 대한 혜빈 양씨의 애정은 클 수밖에 없었고, 단종 또한 혜빈 양씨를 무척이나 따랐다.

10년 후, 열 살의 어린 단종을 두고 혜빈 양씨는 궁궐을 나가야 했다. 세종이 사망해서다. 당시 왕이 사망하면 후궁들은 궁궐을 나가는 게 관례였다. 궐을 나가며 혜빈 양씨는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떼야만 했다. 하지만 이별이 그리 길지는 않았다. 왕위에 오른 지 2년도 안 돼, 문종이 갑작스럽게 죽었다. 그리고 12살의 어린 단종이 조선의 6대 왕으로 즉위한다. 할아버지도, 할머니도, 아버지도 없는 궁궐, 왕위에 오른 단종은 제일 먼저 혜빈 양씨를 궁궐로 불러들인다. 내명부의 큰 어른으로.

일러스트 이민

맨몸으로 단종 곁에 남다

세종과 문종이라는 조선 최고의 왕들이 잇달아 사망했기에 조정의 혼란을 피할 수 없었다. 하지만 어린 단종은 영민했고, 주위에는 경험 많은 신하들과 똑똑한 작은아버지들이 여럿 있었다. 만일 각자 제 직분을 충실히 수행해 주기만 한다면, 조정은 무리 없이 안정궤도를 찾을 수 있었다. 하지만 세상일이라는 게 어디 사람 뜻대로 되던가.

단종이 즉위한 직후 혜빈 양씨는 왕위가 안정되기만을 바라며 촉각을 곤두세웠다. 권력의 주위에 있는 능력이 출중한 작은아버지들을 그저 믿고 있을 수만은 없어서다. 이런 혜빈 양씨의 걱정을 단순한 기우로 볼 수 없었던 것은 안평대군에게 조정의 주요 인물들이 모여 들었기 때문이다.

또한 수양대군의 야욕도 암암리에 진행되고 있었다. 단종의 팔다리를 하나씩 잘라내듯 수양대군은 단종의 사람들을 하나씩 쳐나갔고, 첫 번 째 타겟이 바로 혜빈 양씨였다. 혜빈 양씨는 내명부를 다스리며 단종의 든든한 보호막이 되어 주었다. 이런 혜빈 양씨를 통해 단종에게 왕실의 지지가 집결되는 것을 막기 위해, 수양대군은 혜빈 양씨를 궁궐 밖으로 내보내 버린다.*7 

그리고 단종 1년 10월 10일, 수양대군은 계유정난*8 을 일으켜 김종서와 안평대군 등 조정의 중요 인물들을 일시에 죽이고 권력을 장악해 버린다. 13살의 어린 단종은 얼마나 두려웠을까! 바로 곁을 지키던 사람들이 줄줄이 죽어나가는 걸 봐야 했으니. 무력을 앞세운 수양대군은 나라의 중요한 일을 자신에게 맡긴다는 단종의 위임장을 받아내고, 나머지 정적들을 제거해 나간다.

그런데 계유정난과 관련해 흥미로운 기사*9 하나가 있다.

"안평대군과 맹약을 맺은 대신들이 비밀리에 안평대군을 따르고 있고, 혜빈 또한 마음을 같이 하고 있습니다. 우리들도 뜻을 함께 하기로 했으니, 이제 와서 마음을 바꿀 수 없습니다."

이 얘기는 김종서 라인으로 죽임을 당한 조극관, 조수량 형제가 나눈 대화의 일부다. 실록에 계유정난 당일의 기사는 총 6개로 모두 정난의 명분을 내세우기 위한 것들로 이루어져 있다. 물론 이 기사도 그럴 목적으로 써 넣은 거다. 하지만 이 기사에서 눈에 띄는 대목은 역모를 계획한 안평대군과 혜빈 양씨가 뜻을 같이했다는 대목이다. 이 사실을 몰랐을 수양대군이 아니다.

하지만 혜빈 양씨는 계유정난 시 역모와 관련 해 전혀 거론되지 않는다. 오히려 당시 역모죄로 죽은 사람들한테 몰수한 집, 토지, 노비를 하사 받았고, 그 양이 엄청나다. 노비 100명, 집 5채, 토지 150결. 왕실 여인 중 가장 많은 양의 하사품을 받았다. 물론 형식상으로는 임금인 단종의 명이었지만 당시 실질적인 권력은 수양대군에게 있었다. 그러니 이는 수양대군이 혜빈에게 준 것으로 봐야 한다.

그런데 안평대군과 뜻을 함께 한 혜빈 양씨에게 수양대군은 왜 이렇게까지 물량공세를 퍼부은 것일까? 뭐 깊이 생각하지 않아도 이유는 뻔하다. 혜빈 양씨는 단종의 할머니이자 어머니 역할까지 한 내명부의 어른이다. 단종이 왕좌에 있는 상황에서 정난에 대한 혜빈 양씨의 인정과 지지가 갖는 상징성은 의미가 클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 혜빈 양씨에게 갖은 회유책을 쓸 수밖에 없었던 거다. 그렇다면 혜빈 양씨의 마음은 어땠을까?

목숨을 버려 의리를 지키다!

판세는 이미 수양대군에게 기울어진 상황이었다. 그리고 그런 수양대군 앞에 대소신료는 물론이요, 왕실 사람들 모두 무릎을 꿇은 상태였다. 목숨을 부지하려면 납작 엎드리는 수밖에 없었고, 다들 그렇게 했다. 양녕대군(세종의 큰 형)과 효령대군(세종의 둘째 형)이 그랬고, 금성대군을 제외한 세조의 나머지 형제들이 그랬다. 혜빈 양씨 또한 자신과 세 아들의 안전을 지키려면 다른 사람들처럼 수양대군에게 굽히면 됐다. 굽히는 게 싫다면 두 눈 질끈 감고 단종한테 관심 갖지 않으면 그만인 상황이었다.

하지만 혜빈 양씨가 봤을 때, 수양대군의 권력은 이미 왕권을 넘어서 있었고, 그런 수양대군을 그냥 두고 볼 수는 없었다. 혜빈 양씨는 금성대군과 뜻을 같이 해 노골적으로 수양대군의 반대편에 선다.*10 방관은커녕 오히려 단종을 보호하기 위해 가장 적극적으로 앞장서서 움직인다. 두 사람은 수양대군을 제거*11할 계획을 세운다. 혜빈 양씨는 자신을 따르던 내명부 궁인들을 모아 마치 조직적인 여성군단처럼 발빠르게 움직였다. 이들을 통해 혜빈 양씨는 종친과 외척들 그리고 궐 안의 궁인들을 모았고, 금성대군은 내관과 무사들을 모았다.

하지만 약 3개월 후인 윤6월 1일, 두 사람을 주시하고 있던 수양대군에게 발각되고 만다. 수양대군은 대소신료를 앞세워 단종에게 상소를 올렸다. 혜빈 양씨와 금성대군 그리고 혜빈 양씨의 두 아들(한남군, 영풍군*12) 등 수십 명이 역모를 꾸몄으니 그 죄를 밝혀달라는 상소였다.

알다시피 역모죄는 곧 죽음을 의미한다. 그러니 이 상소는 단종에게 혜빈 양씨를 비롯한 수많은 사람들을 죽이라는 압력이었다. 단종은 막다른 길에 몰렸다. 지금껏 자신을 보필했고, 자신을 위해 목숨을 내 건 사람들을 제 손으로 죽여야 할 상황에 빠져버린 거다.

외부와 차단 된 채 궁궐에 홀로 남겨진 단종에게, 팔다리가 다 잘려나간 단종에게 선택의 여지는 없었다. 단종은 혜빈 양씨와 금성대군 등 역모죄에 연류 된 사람들을 모두 유배 보내고, 당일 수양대군에게 왕위를 넘긴다.*13 자신의 왕위와 맞바꿔서라도 이들을 살리려고.

하지만 세조가 즉위하자마자 의정부, 6조, 사헌부, 사간원에서 상소가 빗발쳤다. 세조를 죽이려한 혜빈 양씨와 금성대군 등을 빨리 죽여야 한다면서. 이럴 때마다 세조는 고개를 젓는다.

"상왕(단종)께서 이들을 죽이지 말라고 청하시어 내가 이미 약속하였으니 죽일 수는 없다."*14
"상왕에게 이들의 죄를 더 이상 논하지 않을 것을 약속하였으니, 중간에 변경할 수는 없다."*15 
"이미 상왕과 약속한 일이다. 이는 두 군주의 약속이니 이제 와서 바꿀 수는 없다."*16 

이미 기울어진 대세 속, 단종이 왕위를 내주며 했던 마지막 부탁! 그건 자신의 안위가 아니라 이들을 살려 달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 약속은 그리 오래 지켜지지 않는다. 두 군주의 약속을 운운하던 세조는 약 4개월 후 혜빈 양씨 등 18명을 죽이라는 명을 내린다.

혜빈 양씨는 세종의 후궁이니 세조에겐 어머니 자리에 있던 사람이다. 그런 양씨를 죽일 수밖에 없었던 건, 양씨야말로 어떤 상황에서도 절대 자기에게 넘어 올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세조가 알았기 때문이다. 양씨는 선왕의 유업을 이을 왕은 단종뿐이라고 생각했고, 어떤 회유와 협박에도 양씨가 자신의 신념을 꺾지 않을 것을 세조는 알고 있었다. 그러니 죽일 수밖에.

혜빈 양씨는 자신의 목숨뿐만 아니라 친아들들의 목숨까지 걸고 끝까지 단종을 지켰다. 이 마음이 단순히 단종을 키웠다고 해서 가능한 걸까? 아니다. 이건 모성이 아니라 의리를 지켜야 한다는 자기 신념에 확신이 없었다면 절대 불가능한 일이다. 단종이 아무리 귀하다고 해도 내 자식보다 귀할 수는 없으니까. 이렇듯 혜빈 양씨는 권력 싸움에서 끝까지 의리를 지킨 사람이었다.

하지만 우리는 충신이라는 단어에 사육신부터 시작해서 수많은 남성들만을 쉽게 떠올린다. 혜빈 양씨를 기억하는 사람은 없을 거다. 그것은 조선에서 충신이 되는 주체는 주류인 남성뿐이라고 생각하고 이를 전면적으로 부각했고, 여성이 주체가 될 수 있다는 것은 생각조차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자기 신념에 따라 의리를 지킨 혜빈 양씨야 말로 충신 중의 충신이었고, 누구보다 용맹한 여성이었다!

양씨는 역모죄로 죽었기에 주검조차 제대로 수습할 수 없었다. 344년 후, 정조 23년의 기록에 의하면, 교형 당해 버려진 양씨의 시신을 집안사람 중 한 명이 몰래 집 근처 골짜기에 표 안 나게 묻었다.*17 조선 최고의 충신 혜빈 양씨는 묘조차 찾을 수 없다. 

*1 세조실록 9권, 세조 3년 10월 21일 기사에는 노산군이 스스로 목을 매어 죽었고 예로써 장사지냈다는 아주 짧은 한 줄이 있다. 하지만 중종실록 27권, 중종 11년 12월 10일 기사에 의하면 마을 호장 엄흥도가 아무도 거두지 않은 단종의 시신을 장사지냈다는 기사가 있다.
*2 안평대군은 세종의 3남, 금성대군은 세종의 6남으로 훗날 세조가 된 수양대군의 친동생들이다.
*3 정조실록 32권, 정조 15년 2월 21일
*4 세종실록 93권, 세종 23년 7월 24일
*5 세종실록 26권, 세종 6년 10월 26일: 귀인 박씨와 귀인 최씨로 혜빈 양씨보다 품계가 낮다.
*6 내명부: 궁중에는 왕비 외에 여성들이 많다. 정1품 빈에서 종4품 숙원까지 첩지를 받은 후궁들이 있고, 정5품 상궁부터 종9품까지 궁인들이 있다. 이를 총괄해서 내명부(內命婦)라 한다. 궁인들은 품계에 명시된 직분에 따라 왕비와 후궁들의 손발이 돼 왕실의 실질적인 일을 처리한다.
*7 단종실록 2권, 단종 즉위년 7월 9일/단종실록 2권, 단종 즉위년 8월 7일
*8 단종실록 8권, 단종 1년 10월 10일: 실록은 세조가 일으킨 정난에 정당성을 부여하기 위해 안평대군과 김종서 등이 반역을 도모했다고 한다.
*9 단종실록 8권, 단종 1년 10월 10일
*10 단종실록 13권, 단종 3년(1455) 3월 21일
*11 세조실록 2권, 세조 1년 9월 3일
*12 혜빈 양씨에게는 세 아들이 있었으나 둘째 아들이 병사한 후였다.
*13 세조실록 1권, 세조 1년(1455) 윤6월 11일
*14 세조실록 1권, 세조 1년(1455) 윤6월 11일
*15 세조실록 2권, 세조 1년 8월 26일
*16 세조실록 2권, 세조 1년 9월 2일
*17 일성록 정조 23년(1799년) 8월 22일

 

필자 김석연

글향, 그 알싸한 꼬드김에 빠지다

 

실소님의 글은 어땠나요?
1점2점3점4점5점
SERIES

조선이 버린 왕실의 여인들

이 크리에이터의 콘텐츠

조선왕조실록에 관한 다른 콘텐츠

콘텐츠 더 보기

더 보기

타래를 시작하세요

여자가 쓴다. 오직 여자만 쓴다. 오직 여성을 위한 글쓰기 플랫폼

타래 시작하기오늘 하루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