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 29년 8월 2일, 조정에 상소 하나가 올라온다. 조유례에게 내려진 벼슬을 철회하라는 대사헌의 상소인데, 그 이유를 옮기자면 이렇다.
지금 조유례의 할머니 김씨의 행실이 음란하고 더러운 것은 분명합니다. 말하기조차 추한 일을 어찌 다시 입에 올리겠습니까? 김씨는 자녀안(姿女案) 첫머리에 실려 있어 온 나라 사람들이 모두 추하게 여기고 있습니다. 그녀의 내외 자손들이 뻔뻔한 얼굴로 염치없이 벼슬하는 것은 불가합니다. *1
여기서 자녀안(恣女案)이란, 음란하고 방종한 여자의 이름과 행적을 기록한 문서다. 그러니까 이 상소는 조유례의 할머니 김씨가 조선의 공식적인 음란한 여자 1호이고, 그녀의 후손은 결코 관직에 나갈 수 없다는 내용이다. 실제로 김씨의 자식, 사위, 손주들은 그녀가 자녀안에 등록됐다는 이유로 벼슬살이 내내 곤욕을 치렀다. 자신의 성적 욕망 때문에 자식들의 앞길을 막은 나쁜 엄마, 그것이 조선이 그녀를 기억하는 방식이자 그녀를 내친 명분이었다.
은밀한 사생활?
노골적 성생활!
실록에 주로 ‘조화의 처’로 호명되는 김씨, 그녀는 조선 최고 명문가 출신이었다. 아버지는 개국공신 김주요, 남편은 당대 최고의 권력자인 조준의 조카였다. 실록은 그녀가 문벌출신으로 사치스럽고 화려*2했으며, ‘아름답고 음란’했다고 전한다*3. 가문 좋고, 인물 좋고, 패션 센스까지 남달랐던 그녀는 늘 이슈를 몰고 다녔다. 친구들과 어울려 다니며 남자를 만나기도 하고*4, 노비와의 과도한 성생활로 병이 나서 굿판을 벌이기도 했다*5.
무엇보다 큰 문제는 자신의 성적 욕망을 드러내는 데 거리낌이 없었다는 점이다. 실록을 보면 당시에도 ‘자유부인’들은 꽤 있었다. 그럼에도 김씨가 자녀안에 등록된 첫 번째 여인이 된 것은 그녀의 행적보다 태도 때문이었다.
자신의 간통 현장을 남편에게 딱 걸렸을 때만 해도 그랬다. 하루는 조화가 첩을 데리고 외박을 했는데, 이때를 틈타 김씨도 허해라는 남자를 불러들였다. 뜨거운 밤을 보내고 허해가 돌아갔는데, 그만 조화의 옷을 바꿔 입고 가버렸다. 이를 알아챈 조화가 아내를 추궁하니, 그녀의 대답이 걸작이었다.
간밤에 허해가 자고 가면서 옷을 잘못입고 갔나보오. 당신이나 나나 하는 짓이 똑같은데 어찌 그리 야단이시오?*6
남편이 성생활을 즐기듯 자신 또한 즐겼을 뿐이라는 저 당당한 애티튜드. 남성의 성욕과 여성의 성욕을 동일선상에 놓고 따지는 그녀의 뻔뻔함(?)에 조선의 남성들은 몹시 당황했다. 당시 사대부 남성들은 여성들이 욕망의 주체가 아닌 욕망의 대상으로만 존재하길 바랐다. 그런데 조금도 기죽지 않고 너도 엔조이, 나도 엔조이를 외치는 여인이라니! 조선의 남성들의 입장에서야 ‘음란한 여자’라는 딱지로도 부족했을지 모른다.
혼인하는 엄마,
말리는 아들
그녀가 주류 남성들에게 찍힌 이유는 또 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조선 여성은 젊어서는 남편에게 늙어서는 아들에게 순종하는 존재다. ‘천박한 욕망’을 넘어 ‘고귀한 모성’을 따라야 한다는 논리다. 그런데 김씨는 그 ‘고귀한 모성’ 대신 ‘천박한 욕망’의 길을 택한다. 아들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재혼을 감행한 것이다. 그것도 매우 전투적 방식으로.
그녀가 태조의 사촌동생인 이지와 재혼을 한 것은 태종 15년의 일이었다. 남편 조화가 죽고 홀로 지내던 그녀는 오랜 싱글생활을 정리하고 재혼을 결심했다. 그런데 당시 김씨와 함께 살고 있던 아들 조명초는 어머니의 재혼을 원하지 않았던 모양이다. 그도 그럴 것이, 당시 조선에서는 여성들의 재혼이나 삼혼을 부정적인 것으로 규정하고, 조금씩 규제를 확대하는 중이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김씨는 조금도 물러서지 않았다. 그녀는 혹시라도 자식들이 방해할까봐 혼례 당일까지 자신의 재혼 사실을 비밀에 부쳤다. 덕분에 아들 조명초가 어머니의 재혼 결정을 알게 된 것은 혼례 당일, 이지가 장가들기 위해 찾아왔을 때였다. 화들짝 놀란 조명초는 이지의 목덜미를 잡고 땅바닥에 나뒹굴었다. 그렇게 통곡하며 어머니를 말렸지만 소용없었다. 김씨는 아랑곳하지 않고 그 집에서 첫날밤을 치렀고, 이튿날에는 자신의 화끈한 밤을 자랑하기까지 했다. 그때 그녀의 나이가 57세였다.
현대에도 57세, 완경기가 지난 기혼 여성은 그저 어머니요, 할머니일 뿐이다. 사회적 역할로만 여성들을 규정할 뿐, 욕망을 지닌 주체로 인정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거기에 ‘모성’의 신화까지 더해지면 얘기는 더 복잡해진다. ‘희생’과 ‘헌신’의 상징이 된 어머니들은 감히 자신의 욕망을 드러내서는 안 된다는 압력을 받는다. 일단 한번 어머니로 규정되면 자식을 위해 목숨 정도는 가볍게 내 놓을 수 있어야 한다.
그런데 김씨는 무려 600년 전에 이러한 사회적 기대를 보기 좋게 걷어차 버렸다. 헌신과 희생이라는 틀에 어머니를 묶어두고 거룩하다 눈물 짓는 조선의 아들들, 그들의 뒤통수를 보기 좋게 후려친 것이다.
자식을 볼모로 잡다
이처럼 김씨는 젊어서부터 늙을 때까지 쭉 꾸준하게 음란했다. 아니, 실록에 따르면 그녀의 음란함은 ‘늙을수록 더욱 심하였’*7 다. 추정해보면 그녀는 적어도 69세까지 바람을 피웠고, 최소 70세까지 잘 살았다.
그럼에도 당시 그녀의 음란함에 대한 처벌은 의외로 가벼웠다. 이유는 간단하다. 태종대, 아니 세종 전반기까지만 해도 김씨와 같은 여인이 적지 않았던 것이다. 물론 당시에도 혼인과 이혼에 대한 주도권은 주로 남성들이 행사했다. 그러나 여성 또한 자신의 의지에 따라 재혼도 하고 삼혼도 할 수 있었다. 심지어 왕실의 여인인 태종의 사촌 누이들조차 4명 중 3명이 재혼*8 을 했을 정도니, 민간에서야 말할 것도 없었다. 한 여인의 성(姓)이 평생 한 남자에게만 종속되어야 한다는 가부장적 윤리는 적어도 조선 초기 여인들에게는 통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데 조선 사대부들에게 이 자유분방한 여인들은 영 마땅치가 않았다. 성리학적 질서를 확립하려면 가부장제의 정착이 필수적인데, 조선 초기 여인들이 좀체 고분고분해지지 않았던 것이다. 하여 주류 남성들이 떠올린 꼼수가 ‘자녀안’이었다.
정작 고려시대에는 실효성이 없었던 자녀안을 부활시킨 이유는 하나였다. 법률로는 어쩔 수 없는 자유부인들을 자녀를 볼모로 길들이겠다! 그리고 김씨는 그 첫 번째 타겟이었다. 이후 대신들은 자녀안을 빌미로 김씨의 자손들을 두고두고 괴롭혔다. 그들의 입장에서는 김씨를 버리는 가장 확실한 방법을 택한 것이다.
그러나 정작 조선 주류 남성들은 김씨의 존재를 무시하지도, 지우지도 못했다. 사관들은 실록 곳곳에 김씨의 흔적을 남겼고, 당시 여인들의 욕망을 생생하게 증명했다. 뿐인가? 그녀에 대한 강도 높은 비난 속에는 남성들의 불안감이 잠재돼 있었다. 이대로 뒀다가는 자신들의 가부장제, 남성중심의 질서가 무너질지 모른다는 불안감 말이다.
그런 측면에서 그녀의 마지막 스캔들은 의미심장하다. 재혼한 남편 이지와 한 사찰에 머물던 69세의 김씨는 역시나 거기서도 스님과 간통했다. 현장을 목격한 이지는 김씨를 마구 구타했고, 둘 사이에는 격렬한 몸싸움이 벌어졌다. 그리고 이 사건으로 남편 이지는 죽음을 맞이한다. 어떻게? 김씨가 그의 불알을 잡아당겨서!*9
이 사건이 사실인지 아닌지는 확인할 수 없다. 김씨는 이 일로 조사를 받지도, 처벌을 받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사관들은 이 확인되지 않은 풍문을 기록으로 남겼다. 왜? 불안하니까! 여성들의 살아있는 욕망이 언젠가 자신들의 남성성을 끌어당겨 죽음에 이르게 할 지 모른다는 공포, 이것이 조선이 그녀를 버리려한 진짜 이유일지 모른다.
*2 세종 18년 윤6월 15일
*3 태종15년 11월 1일 2번째
*4 정종1년 6월 15일
*5 세종 9년 8월 8일
*6 세종9년 8월 8일
*7 태종15년 11월 1일 2번째
*8 태종 12년 10월 26일
*9 세종 9년 1월 3일
필자 정기재
오래된 건 다 좋아하는 옛이야기 덕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