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군(聖君)
정희왕후 윤씨
성종 14년 3월 30일, 대왕대비 정희왕후가 승하했다. 멀리 온양에서 날아온 소식이었다. 13살 때 할머니 손에 왕위에 올라 할머니 품에서 왕도를 익힌 성종, 그는 정신이 아득해졌다. 지난 2월 할머니께서 아픈 몸을 이끌고 온천으로 떠나실 때는 쾌유하실 거란 기대도 있었다. 그런데 그때 강변에서 무릎 꿇고 올린 인사가 마지막이 될 줄이야…….
예종이 죽고 혼란한 정국을 재빨리 수습했던 정희왕후, 조선 최초로 임금을 대신해 ‘청정*1’을 하며 국정을 안정되게 이끌었던 대왕대비였다. 성종은 그런 할머니를 최고의 예우로 보내드리고 싶었다. 하여 그는 일체의 장례를 왕후가 아닌 대왕의 예에 따라 진행한다. 여기까지만 해도 매우 이례적인 일이었다. 그런데 7개월 후, 성종은 한 걸음 더 나아간다.
정희왕후는 내가 어릴 때 국정을 맡으시어 나라를 위기에서 구하셨다. 지금 종사를 보전한 것이 모두 그분 덕이니 보통의 왕후와는 다르다. 대왕의 예를 갖춰 신하들도 3년 동안 상복을 입으라.*2
언뜻 비슷해 보이지만 장례 절차와 신하들의 상복 문제는 의미가 다르다. 장례는 할머니를 보내는 자식의 정성으로 이해할 수 있지만, 신하들의 상복은 군신(君臣)의 예에 해당했다. 그런데 신하들이 1년이 아닌 3년 간 상복을 입는다? 이는 정희왕후를 왕후가 아닌 군왕으로 대우하며, 그 신하임을 인정해야 가능했다.
때는 바야흐로 신분 질서, 남녀 구별이 엄격해지던 성종의 시대였다. 보통의 경우라면 신하들이 ‘아니되옵니다’를 외치며 벌떼같이 일어나야 했다. 그런데 어쩐 일인지 대신들은 대왕의 예에 따라 3년간 상복을 입는다. 조선 500년 역사상 전무후무, 유일한 경우였다.
눈물을 닦고
대책을 세우다
그렇다면 궁금하다. 도대체 정희왕후는 어떤 인물이었기에 여인의 몸으로 국왕의 대우를 받으며 떠났을까? 조선 최초로 임금을 대신해 ‘청정’을 한 대왕대비라서? 그러기에는 설명이 부족하다. 훗날 문정왕후 또한 명종을 대신해 수렴청정을 했지만 죽어서 군왕의 대우를 받지 못했다. 정희왕후의 전례가 있음에도 그랬다. 그뿐 아니다. 문정왕후가 승하한 날 사관은 그에 대한 혹평을 쏟아낸다. 임금을 마음대로 하고, 외척을 등용해 기강을 무너뜨렸으며, 상벌을 마음대로 했다고 말이다.*3
그런데 정희왕후의 죽음을 대하는 사관의 태도는 사뭇 다르다. 마치 어진 임금을 잃은 양 애통해하는 마음이 뚝뚝 흐른다. 성종을 왕위에 올려 나라를 구하고, 경연을 재개해 언로를 열었으며, 폐해가 심한 제도를 폐지하고, 문종의 영령을 위로하고……. 영락없는 어느 성군의 일대기다.
정희왕후가 정치 전면에 나서게 된 것은 아들 예종의 갑작스런 죽음 때문이었다. 그때 예종의 나이 스물, 그 아들 제안대군의 나이 넷이었다. 11살 때 혼인한 정희왕후는 세조와 금슬이 좋았다. 그러나 자식은 겨우 2남 1녀 뿐이었고, 그나마 첫아들 의경세자(성종의 아버지)는 스무살이 되던 해에 먼저 세상을 떴다. 그런데 이제 하나 남은 아들마저 앞세웠으니, 여느 어미라면 제 몸 하나 추스르기 힘든 상황이었다.
그러나 정희왕후는 구슬피 흘리던 눈물을 서둘러 닦았다. 갑작스레 생긴 왕권의 공백을 막을 사람은 자신뿐이었다. 제대로 후계를 세우지 않는다면 나라는 큰 혼란에 빠질 것이 뻔했다. 하여 곧바로 원자인 제안대군 대신 죽은 큰 아들의 둘째 아들인 자산군을 후계로 선택한다. 그리고 예종이 죽은 바로 그날 오후 4시경, 숨돌릴 틈 없이 자산군의 즉위식을 치른다. 성종의 탄생이다.
성종의 즉위는 파격이었다. 선왕이 죽은 그날 바로 즉위식을 치르는 것도 그랬지만, 성종은 후계 순위 3위였다. 예종의 아들인 제안대군은 그렇다 쳐도, 바로 위에는 성종의 친형 월산대군도 있었다. 예상치 못한 선택이었다. 이에 대해 정희왕후는 이렇게 설명한다. 제안대군은 아직 포대기 속에 있는 데다 병까지 있고, 월산대군은 어릴 때부터 병치레를 많이 했다고.
그러나 속내는 조금 더 복잡했을 것이다. 우선 후계 순위 1위인 제안대군의 어머니 안순왕후는 친정세력이 너무 약했다. 어리고 세력이 약한 단종이 어떻게 폐위되고 죽었는지 직접 보고 겪은 정희왕후였다. 게다가 당시 조정은 한명회, 신숙주 등 세조의 공신들이 장악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길은 하나였다. 그들을 한배에 태워 왕의 울타리로 만들자. 그것이 정희왕후의 판단이었을 것이다. 그런 측면에서 친정세력 빵빵한 인수대비의 아들이자 한명회의 사위인 성종만 한 이가 없었다. 정희왕후의 정치적 승부수였다.
준비된 군왕
이처럼 성종의 즉위에는 정희왕후의 결단이 가장 중요하게 작용했다. 이에 대해서는 당시 사관이나 대신들도 이견이 없었다. 그런데 후대로 갈수록 조금 다른 해석들이 힘을 얻기 시작한다. 실질적 결정권자는 신숙주, 한명회 등 원로 대신이었고, 정희왕후는 그저 정치적 결탁을 했을 뿐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추측은 정희왕후가 여인이라는 점, 한자를 몰랐다는 점과 연관되며 점점 정설처럼 굳어졌다. 그러나 남녀의 차이가, 학식의 유무가 정치적 능력이나 삶의 지혜를 보장하는 것은 아니다. 문자를 모른다고, 나이가 많은 여인이라고, 맥없이 원로 대신들에게 휘둘렸을 거라는 추측은 한갓 편견이다. 오히려 실록은 정희왕후가 나라의 비상상황을 수습할 만한 충분한 지혜와 경험이 있었음을 시사한다.
무엇보다 큰 힘은 사람을 포용하는 넉넉한 품이었다. 실록에 따르면 정희왕후는 성품이 겸손해서 많은 종친 여인들이 따랐다고 한다. 게다가 직접 자기 손으로 빨래를 하고 물레질을 했으며, 천한 노비도 공경한 태도로 대했다. 실제로 조두대라는 여자 노비를 발탁해 일을 맡겼고, 궁궐 문지기를 위해서 가건물을 지어 주기도 했다. 아랫사람에 대한 그의 태도를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그래서인지 시부모인 세종과 소헌왕후는 정희왕후를 각별하게 아꼈다. 아이를 낳을 때마다 직접 찾아가 축하했고, 친정에 갈 때마다 음식들을 바리바리 싸 보냈다.
이런 태도는 괴팍하기로 소문났던 세조도 말랑말랑하게 만들었던가 보다. 조카 단종을 무자비하게 몰아내고 반대세력을 잔인하게 능지처참했던 세조. 걸핏하면 신하들의 머리채를 휘어잡던 그가 어쩐 일인지 정희왕후 앞에서만큼은 순한 양이 됐다. 그리고는 평생 껌딱지처럼 붙어 다녔다. 지방관을 면대할 때도, 여진과 일본 사신을 만날 때도, 과거 급제자를 축하할 때도, 평안도를 순행할 때도, 군대를 사열할 때도……. 세조의 곁에는 정희왕후가 있었다.
덕분에 정희왕후는 종종 세조의 폭주를 막을 수 있었다. 정치적 조언도 가능했다. 예를 들면 이랬다. 세조가 자신의 공신을 모함했다며 김분을 죽이려 했을 때, 정희왕후는 언문 편지를 보내 그를 살렸다. 단종의 누나 경혜공주가 노비가 될 위기에 처했을 때, 공주를 적극적으로 보호한 것도 정희왕후다. 함경도에서 이시애가 대규모 반란을 일으켰을 때는 흔들리는 세조의 마음을 다잡았다. 불안해하지 말고 군대를 정비할 기회로 삼으라는 충고였다.
이처럼 정희왕후는 왕후로 있는 십여 년간 정치 현장, 그것도 권력의 한복판에 있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정치적 경험과 감각을 익혔다. 타고난 인성에 풍부한 경험까지 쌓은 그는 손색없는 준비된 군왕이었다.
공감의 정치를 펼치다
13살의 성종을 왕위에 올리고, 그를 대신해 청정을 시작한 정희왕후. 그에게 주어진 과제는 무거웠다. 한편으로는 어린 왕을 성군으로 길러야 했고, 다른 한편으로는 불안한 정국을 안정시켜야 했다. 자칫 둘 사이에 균형을 잃으면 길은 뻔했다. 대비가 어린 왕을 쥐고 흔들거나, 권력을 독점한 대신들이 왕권을 위협하거나. 그러나 정희왕후는 특유의 부드럽고 과감한 태도로 주어진 과제를 차근차근 수행해 나간다.
가장 시급한 과제는 뭐니뭐니 해도 국정의 정상화였다. 당시 조정은 세조의 상례도 끝나지 않은 상태에서 예종의 상까지 치러야 하는 비상상황이었다. 이에 정희왕후는 아들인 예종의 상례를 3년에서 1년으로 과감히 줄여 버린다. 국가 시스템을 하루빨리 정상 궤도에 올리기 위해서였다.
이후 조정 대신들은 정희왕후의 결재를 받으며 하나둘씩 국정을 정상화해 나간다. 그렇게 그의 지원 아래 『경국대전』이 완성됐고, 『국조오례의』가 편찬됐다. 성종의 가장 큰 업적이라 알려진 이 일들이 사실은 모두 정희왕후의 청정기간 동안 완성된 것이다. 엄밀히 말해 성종이 아닌 정희왕후의 업적이라 해야 맞다.
특히 정희왕후는 백성의 살림살이에 관심을 집중했다. 어지간한 일은 전문가인 대신들의 의견을 따랐지만, 민생에 관련된 문제만큼은 몸소 나섰다. 대신들의 만류에도 세조의 산릉에 석실을 만들지 않았고, 대비전에 소용되는 물품도 최대한 줄였다. 백성들의 품이 든다는 이유였다. 무엇보다 지방관들은 반드시 직접 만나 단속한 후에 파견했다. 백성과 직접 접촉하는 만큼 공정하고 부지런할 것을 당부하고 또 당부했다.
웬만해서 큰 소리를 내지 않던 정희왕후가 발끈한 것도 백성들의 공납 문제였다.
예전에 세조께서 여자 노비에게 활시위를 만들 소 힘줄을 쪼개게 하시기에, 나도 직접 해보았다. 마음으로는 쪼갠 소 힘줄로 활 스무개는 만들 수 있을 것 같았는데, 실제로는 겨우 예닐곱 줄만 나왔다. 그때 내가 활 만드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자세히 알았다. 그런데 지금 소와 말의 도살을 금지하고 있으니, 민간에서 어떻게 소 힘줄을 구하겠는가? 백성들이 공납을 바치려면 매우 고통스러울 것이다. 지난번에 여러 신하들에게 바른 말을 올리라고 한 것은 이런 폐단을 듣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지금 이런 일을 건의한 사람이 몇이나 되는가?*4
위에 언급한 교지는 정희왕후의 정치 스타일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조선의 역대 왕들은 대부분 정치 시스템과 제도에 집중했다. 제도를 완비해 민본정치를 완성하겠다는 구상이었다. 그러나 정희왕후가 주목한 것은 ‘공납’이라는 제도만이 아니었다. 그의 관심은 실제로 활을 만들어 바치는 백성들의 고단함에 있었다. 백성들의 희로애락, 그것이 제도를 만들고 폐지하는 기준이었다. 이른바 공감 정치다.
태평성대의 꽃길을 깔다
정희왕후의 공감 정치는 결과적으로 효과를 발휘했다. 호패법을 피해 전국을 떠돌다 고향으로 되돌아간 백성들, 변방에서 추위에 떨다 겨울옷을 받은 군사들, 역모죄에 연좌돼 노비가 됐다 방면된 여인들, 헐벗은 채 국문을 받다가 옷을 받은 죄수들…. 이들은 다시 왕실에 마음을 열었고, 세조가 뿌려 놓은 폭력과 권위의 문화는 끝이 났다. 자신의 남편 세조에 의해 막히고 묶였던 원망의 매듭들을 자신의 치세 동안 풀어냈다고 할까?
정희왕후는 약 6년 남짓 조선의 국정을 책임졌다. 그동안 성종은 그의 보호 아래 군왕의 기초를 탄탄히 닦았다. 그리고 성종이 스무 살이 되던 해, 정희왕후는 미련 없이 모든 권한을 내려놓는다. 처음 성종을 세웠을 때처럼 확고하고도 단호한 결정이었다. 이후 조선은 유례없는 태평성대를 누린다. 어쩌면 세조가 지은 업보를 풀어내며 정희왕후가 깔아 놓은 꽃길이었을지 모른다.
우리는 으레 ‘성군(聖君)’이란 좋은 제도를 만들어 나라를 안정시킨 군주라고 생각한다. 눈에 보이는 결과물들을 성군의 조건으로 삼는 것이다. 그런데 조선의 건국 철학이 담긴『조선경국전』을 보면 이야기가 좀 다르다. 정도전은 임금의 자격을 논하면서, 임금의 정당성은 ‘백성의 마음’에서 나온다고 규정한다. 그렇다면 소위 말하는 ‘성군(聖君)’은 백성의 마음을 얻은 군주, 공감하는 임금인 셈이다.
이런 측면에서 보면 정희왕후는 누가 뭐래도 성군이다. 그 어느 왕보다 백성의 소리에 귀를 기울였고, 그들의 마음에 공감했다. 유연하지만 품격 있는 조선의 성군, 정희왕후. 그렇다면 신하들의 3년 상은……, 충분히 합당했다.
*1 일반적으로 말하는 수렴청정. 수렴청정은 대왕대비나 왕후가 발을 내리고 국정을 처리한 데서 유래했다. 그러나 정희왕후는 발을 내리지 않고 직접 신하들과 마주 앉아 국정을 논의했다. 여성이 가진 제약으로부터 한결 자유로웠던 것이다. 하여 수렴청정 대신 ‘청정’이란 단어를 사용한다.
*2 성종14년 11월 1일
*3 명종 20년 4월 6일
*4 성종 즉위년 12월 30일
필자 정기재
오래된 건 다 좋아하는 옛이야기 덕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