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이 버린 여인들 3. 난신의 아내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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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이 버린 여인들 3. 난신의 아내들

실소

일러스트레이션: 이민

원수의 노비가 된 여인들

조선의 7대왕 세조 2년 6월 8일, 한양 군기감 앞 저잣거리는 참혹했다. 성삼문 등 12명의 팔다리는 수레에 차례로 묶였고, 사지는 피를 뿜으며 찢겨 나갔다. 그리고 그들의 머리는 이미 죽은 3명의 머리와 함께 3일간 저잣거리에 내걸렸다. 참혹한 피의 향연은 이후 20여 일간이나 계속됐다. 그렇게 능지처참을 당한 죄수만 48명, 목이 졸려 죽은 역적의 자손은 백여 명을 넘어섰다. 조카의 왕위를 찬탈한 세조에 맞서 단종을 복위시키려했던 ‘단종복위사건’은 이렇게 끝이 났다. 여기까지가 대역죄인이 된 단종의 충신들, 이른바 ‘사육신’들의 최후다.

이렇게 남자들의 이야기가 끝나갈 즈음, 실록에는 수백 개의 낯선 이름이 등장한다*1. 옥금, 미치, 가지, 귀금, 약비, 옥덕, 가구지, 자근아지, 무작지, 보배........ 모처럼 실록에서 여인들의 이름을 만났다는 반가움도 잠시, 그들의 사연이 서글프다. 하루 아침에 노비로 전락해 공신들에게 나눠진 단종 복위 세력의 아내, 딸, 누이들의 명단이기 때문이다. 아버지와 남편이 죽은 것도 원통한데, 원수나 다름없는 공신들의 시중을 들게 된 기막힌 처지의 여인들. 남자들의 권력투쟁이 끝난 그 자리에서 여인들의 생존투쟁이 시작되고 있었다.

아이를 지킨 이옥덕

죽어서 단종에 대한 절개를 지킨 여섯 명의 신하라는 뜻의 사육신, 그 중 대표적인 인물이 박팽년이다. 단종 복위 사건으로 박팽년의 가문은 그야말로 풍비박산 났다. 아버지인 박중림부터, 박팽년, 박기년, 박인년, 박대년 형제가 모두 사건의 주동자로 능지처참을 당했다. 사건에 연루된 가문 중 최대 규모였다. 그만큼 많은 박씨가의 여인들이 공신의 노비가 돼 뿔뿔이 흩어졌다.

이때 박팽년의 며느리 이옥덕은 임신 중이었다. 대명률에 따르면 아무리 대역죄인의 자손이라도 16세 이하인 경우에는 죽이지 않았다. 성인이 되기를 기다려 관비로 삼는 것이 관례였다. 그러나 화가 머리 끝까지 오른 세조는 나이를 불문하고 죄인의 아들을 모조리 죽이라고 펄펄 뛰고 있었다. 

낳을 아이가 남자라면 죽임을 당할 수도 있는 위험천만한 상황, 옥덕은 함께 임신 중이었던 몸종과 함께 궁여지책을 마련한다. 혹시라도 옥덕이 아들을 낳으면 서로 아이를 바꿔 기르기로 한 것이다. 그렇게 옥덕의 아들은 노비의 아들로 둔갑해 살아남았다. 박팽년이 사육신 중 유일하게 후손을 남길 수 있었던 이유다.

멸문지화의 위기 속에서 자식을 지키고, 집안을 일으킨 어머니. 절개를 지킨 여인이 끝내 보상 받았다는 이 감동적인 스토리는 사대부들의 마음에 꼭 들었다. 하여 옥덕의 이야기는 박씨 집안을 중심으로 사대부들 사이에 전파됐고, 갖가지 일화를 보태며 한편의 드라마로 거듭났다. 급기야 선조 대에는 옥덕의 이야기가 실록에까지 수록된다*2

여인들의 삶 따위에는 도통 관심 없던 주류 남성들. 그들은 ‘절개’라는 키워드가 작동하자마자 서둘러 옥덕을 역사로 소환했다.

죽은 남편보다 삶을 택한 윤정수

그런데 이상하다. 원수의 노비가 된 수백 명의 여인들 중에 이처럼 훈훈한(?) 미담을 남긴 이는 옥덕 뿐이다. 억울하게 죽은 충신들, 그리고 원수의 노비가 된 아내들. 우리가 아는 조선 여인이라면 원수의 시중을 드느니 차라리 죽음을 택했을 법도 하다. 아니, 씩씩한 조선 전기의 여인들이라면 복수의 칼부림을 했다 해도 놀랍지 않다. 그러나 단종 복위 세력의 아내들은 죽음 대신 삶을, 과거 대신 현재를 선택했다. 박팽년가의 또 다른 여인, 윤정수 또한 그랬다*3

윤정수는 박팽년의 막내 동생의 아내였다. 촌수로 따지면 박팽년의 제수이자, 앞의 이옥덕의 작은 어머니다. 그런데 정수의 삶은 옥덕과는 사뭇 달랐다. 명문거족 출신인 윤정수는 나이도 젊고 용모도 아름다웠다고 전한다. 때문인지 남편 박대년은 자신이 죽은 후 아내가 다른 남자와 행복하게 살게 될까봐 겁이 났던 모양이다. 그는 옥중에서 정강이 피로 아내에게 마지막으로 편지를 썼다. 

부디 우리 서로 잊지 말고, 사람으로 수치스러운 짓은 하지 맙시다.”

윤정수 또한 죽음을 앞둔 남편에게 답장을 썼다. 

밝은 해처럼 떳떳하게 살겠소.

마침내 남편은 죽고, 윤정수는 세조의 최측근인 봉석주의 노비가 됐다. 무관인 봉석주는 성격이 탐욕스럽고 난폭하기로 유명했다. 무엇보다 그는 여자를 몹시 탐했다. 그런 봉석주가 윤정수를 고이 보고만 있을 리 없었다. 실록에 따르면 봉석주는 윤정수를 위세로 협박하고, 좋은 말로 회유했다고 한다.

이때 윤정수 앞에 펼쳐진 선택지는 둘뿐이었다. 남편과의 약속을 지키며 과거의 존재로 살 것인지, 아니면 상황을 직시하고 현재를 살 것인지. 만약 대갓집 부인이었던 과거의 삶을 고집한다면 현재의 삶은 꽤나 고단할 터였다. 하여 정수가 택한 길은 생존을 위한 자기변신이었다. 노비라는 현재에 빠르게 적응하기, 이왕이면 그 속에서 잘 살아보기.

그렇게 윤정수는 봉석주의 요청을 받아들인다. 아예 한 술 더 떠서 정식으로 예를 갖춰 맞아 줄 것도 요구한다. 번듯한 말을 타고 하는 폼나는 예식을 말이다. 윤정수는 그렇게 고개를 빳빳이 들고 자신이 얻을 수 있는 최대의 것을 쟁취했다. 그리고 아직도 전남편의 혈서를 생각하느냐는 봉석주의 물음에 이렇게 대답한다. 

지금은 이미 모두 잊었소. 다시는 말하지 마시오.
일러스트 이민

여인들, 현재를 살다

이처럼 현재를 살아 간 대역죄인의 아내는 윤정수만이 아니었다. 윤영손의 아내 권씨는 주인과의 동침을 부끄러워하지 않았고, 성삼고의 아내는 이웃집 남자와 즐기며 살았다. 그리고 안잉의 처는 전답까지 팔아 젊은 향교생과 뜨겁게 연애했다. 그들은 각자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해 행복하려고 분투했다.

당시 주류 남성들은 이런 여인들이 못마땅했다. 때문에 사관들은 실록에 “하나도 죽어서 절개를 지킨 일이 없고, 도리어 그 지아비를 욕하며 다투어 아양을 떨었다”*4 고 맹비난했다. 

그런데 이는 남성들의 적반하장이다. 아직 세상은 세조의 것이었고, 단종 복위 세력은 반역자였다. 남은 여인들 또한 여전히 역적의 가족일 뿐이었고, 그들의 삶은 팍팍했다. 실록에 따르면 유성원의 아내 미치가 이집 저집 품팔이를 하는데도 오라비인 송처관은 거들떠보지도 않았다.*5 심지어는 집안의 노비들까지 곤궁한 주인을 강간하고 핍박하곤 했다*6

남은 여인의 시선으로 보자면, 그들의 남편과 아버지는 대역죄를 짓고 무책임하게 죽어버렸다. 신념이라는 명분으로 자신들을 버린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러한 남편을 위해 현재의 행복을 버리고 과거의 불행 속에 살라니. 이는 여성의 세계를 ‘남편’과 ‘아버지’에 가둬두려는 주류 남성들의 파렴치였다. 동시에 ‘충성’과 ‘절개’라는 남성들의 가치를 여성들의 피로 덧칠하겠다는 뻔뻔함이기도 했다.

사대부들은 옥덕이 남편과 박씨 가문을 위해 절개를 지켰다고 추켜세웠다. 그러나 사대부들의 바램처럼 옥덕이 남편과 가문을 위해서만 살아갔는지는 의문이다. 여인의 입장에서 보면, 그 또한 정수처럼 자신의 위치에서 최선을 다해 살았다. 다만 옥덕에게는 가까스로 살아남은 피붙이가 있었고, 그 아이가 그의 현재이자 행복이었을 뿐이다. 결국 열녀와 탕녀는 따로 있는 게 아니다. 단지 ‘절개’라는 잣대로 세상을 바라보는 비뚤어진 시선이 있을 뿐이다.

*1 세조 2년 9월7일
*2 선조 36년 4월21일
*3 세조 9년 6월23일
*4 세조 9년 6월23일
*5 성종 8년 1월8일
*6 성종 3년 5월19일

 

필자 정기재

오래된 건 다 좋아하는 옛이야기 덕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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