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이 버린 여인들 5. 처인가 첩인가? 이소근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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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이 버린 여인들 5. 처인가 첩인가? 이소근소사

실소

일러스트레이션: 이민

처? 첩? 처? 첩?
투쟁하는 이소근소사

성종 7년 5월 27일, 조정에는 왕실 종친들의 상소 하나가 도착한다.

상산군 황효원의 첩을 처로 인정하는 것은 불가합니다. 대신이 대역죄인의 딸을 첩으로 삼는 것도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런데 예를 갖춰 정식으로 혼례까지 올렸다니요? 그가 제출한 혼인 문서는 가짜가 분명합니다. 대역죄인의 딸 중에 첩이 된 여인이 한둘이 아닙니다. 지금 황효원의 청을 들어주면 나머지 사람들도 전례로 삼을 것입니다.

상소에 얽힌 이야기는 이렇다. 황효원의 아내 이소근소사는 고려 말 유명한 학자 이색의 고손녀이자 왕실의 인척이었다. 그러나 아버지 이유기가 단종 복위 사건에 가담하면서 하루 아침에 노비로 전락했다. 이후 성인이 된 그는 주인 황효원의 아내가 된다. 그런데 성종 7년, 이소근소사가 처인지, 첩인지를 두고 뜨거운 논쟁이 벌어진 것이다.

세조 때 일어난 단종 복위 사건으로 수많은 양반가 여식들이 노비가 됐다. 또 그 중 상당수는 주인의 ‘첩’이 됐다. 불행 중 다행으로, 훗날 이 여인들 대부분이 노비 신분을 벗었다. 그런데 이상한 건 그들 중 누구도 ‘첩’의 꼬리표를 떼겠다고 조정을 들쑤시지 않았다는 점이다. 예외는 오직 이소근소사 뿐이었다.

조정을 상대로 싸우다

조선에서 처·첩 문제가 중요하게 제기된 것은 성종대의 일이었다.『경국대전』에 서자의 과거 응시 금지를 명시하면서, 어머니의 신분도 덩달아 중요해졌기 때문이다. 때문에 1476년, 성종은 대신의 아내들이 처인지 첩인지 조사하라는 명을 내린다. 이소근소사의 길고 긴 싸움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이때 황효원은 이소근소사를 ‘처’라고 보고한다. 전처들이 모두 죽은 후 정식으로 ‘혼례’를 올렸으니 하자 없는 ‘처’라고 했다. 증거로 혼인 때 주고받은 혼서도 제시했다. 그러나 대신들의 생각은 달랐다. 세상에 어느 누가 노비를 처로 들이겠냐며, 이소근소사는 ‘첩’이라고 펄펄 뛰었다. 결과는 소근소사의 패배였다. 성종은 처음에는 ‘처’로 판결했지만, 나중에는 ‘첩’이라고 뒤집었다*1. 너무 갑작스런 논란인 탓에 소근소사는 미처 손쓸 틈도 없었다.

소근소사가 본격적으로 전투태세에 돌입한 것은 4년 후였다. 황효원은 소근소사를 처로 인정해달라며 조정에 끈질기게 상소를 넣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조목조목 논리적으로 따졌고*2, 나중에는 눈물로 호소했다*3. 심지어 불법인줄 알면서도 대간에게 청탁을 넣기도 했다*4. 이소근소사를 처로 인정받으려는 황효원의 노력은 이토록 눈물겨웠다.

공식적인 기록으로 보면 이 모든 싸움을 주도한 사람은 황효원이다. 그런데 궁금하다. 황효원은 왜 그토록 필사적이었을까? 당시 아내가 첩으로 확정된 사람은 황효원 뿐이 아니었다. 게다가 황효원에게는 이미 장성한 전처의 아들들, 즉 후사를 이을 적자(嫡子)들도 있었다. 조정을 상대로 무리한 싸움을 벌일 이유가 없었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이 싸움의 진짜 주인은 황효원이 아니라 이소근소사가 아닐까? 시대가 시대이니만큼 황효원의 입을 빌리기는 했지만 말이다.

일러스트 이민

왕가의 여인들과 맞짱 뜨다

조정과 싸움을 벌인 실제가 이소근소사라고 보는 데는 이유가 있다. 실록의 기록을 보면 그는 결코 부당한 일에 잠자코 있을 여인이 못 됐다. 오죽하면 태종의 딸 경신옹주가 아직 노비 신분이었던 소근소사를 어쩌지 못해 상소를 올렸을까?*5

경신옹주의 손녀는 황효원의 며느리였다. 그런데 문제는 그 며느리의 친정어머니, 그러니까 안사돈 이씨였다. 그는 마치 주인인양 황씨 집안을 휘젓고 다녔다. 황효원의 전처와 친분이 깊었던 데다, 딸을 보러 다닌다는 이유였다.

소근소사가 혼례를 치르고 황씨 집안에 들어 온 이후에도 안사돈 이씨의 행동은 변함이 없었다. 오히려 노비 신분인 소근소사를 노골적으로 무시한 것으로 보인다. 경신옹주가 상소를 올리며 꼬박꼬박 ‘노비 첩’이라고 호칭한 것을 보면 말이다.

그런데 이를 가만 두고 볼 소근소사가 아니었다. 그의 입장에서, 자신은 정식으로 혼례를 치르고 들어온 집안의 안주인이었다. 아무리 노비 신분이라 해도 집안의 질서를 바로잡는 것은 자신의 권리이자 의무였다. 상대가 왕가의 피붙이인 것은 문제가 되지 않았다.

우선 소근소사는 과감히 안사돈 이씨의 출입부터 금지시켰다. 갑자기 왕래를 금지당한 안사돈 이씨는 길길이 뛰었다. 온갖 험한 말로 욕을 해댔고, 원수 대하듯 공격했다. 물론, 소근소사도 지지 않고 맞받아쳤다.

이 와중에 며느리는 친정 엄마 편을 들며 집 안팎으로 나쁜 소문을 퍼뜨렸던 모양이다. 하여 소근소사는 이웃에 떠도는 가짜(?)뉴스에 강력히 대응하기로 결정했다. 며느리의 주장을 조목조목 반박하는 글을 작성해 이웃에 두루 돌린 것이다. 글은 며느리에게 기우는 여론을 깨뜨릴 유일한 카드였다. 그렇게 황씨 집안을 모질게 욕하던 며느리는 친정으로 쫓겨났다.

노비, 혼례를 요구하다

이처럼 소근소사는 소리쳐야 할 때 소리쳤고, 싸워야 할 때 싸웠다. 상대가 사대부건, 왕가의 피붙이건 가리지 않았다. 그런데 조선에서, 여인이, 그것도 노비였던 주제에, 조정과 왕가를 상대로, 거칠게 싸웠다고? 도대체 이 여인, 무슨 배짱으로 이토록 대담한 싸움을 벌였을까?

일차적으로는 ‘혼례’에 대한 자신감이었다. 당시 ‘처’와 ‘첩’을 가르는 중요한 기준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다른 처가 없을 것, 또 하나는 절차대로 혼례를 치를 것. 그만큼 여인에게 ‘혼례’는 중요했다. 오늘날로 치자면 혼인신고 정도?

그런데 당시 여자 노비의 성(姓)은 주인의 소유나 마찬가지였다. 양반이 노비를 취하면서 혼서를 주고받고 혼례를 치른다?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그만큼 소근소사의 혼례는 이례적이었다.

그렇다면 유독 황효원이 노비를 맞이하면서 정식으로 혼례를 치른 이유는 무엇일까? 황효원이 소근소사를 너무 사랑해서 자발적으로? 그런 망상은 일단 접어두자. 가장 현실적인 것은 소근소사가 강력히 요청했을 가능성이다.

사실 황효원은 소근소사의 외가와 인척이었다. 때문에 노비가 됐을 때 소근소사는 황효원의 집에 가는 대신 외가에 머물 수 있었다. 실제로 종살이를 하지 않았다는 뜻이다. 게다가 기록에 따르면 소근소사는 글을 읽고 쓸 줄 알았다. 앞의 세조 13년 9월 21일에는 소근소사가 며느리의 잘못을 ‘거짓으로 글로 썼다(誣書)’는 기록이 보인다.

당시 여인이 글을 깨치려면 영특한 머리와 남다른 의지가 필요했다. 무엇보다 스스로의 정체성을 노비가 아닌 양반에 두지 않고는 불가능했다.

스스로 양반이라 믿었던 영특한 소근소사, 그가 ‘혼례’의 의미를 몰랐을 리 없다. 혼례 없이는 영원히 첩 신세를 면치 못할 것임을 말이다. 하여 홀아비가 된 황효원이 은근슬쩍 접근했을 때, 그는 수락조건으로 ‘혼례’를 요구했을 것이다. 아버지뻘 되는 주인에게 시집 가면서 그만한 대책은 세워야 했다. 어쩌면 혼례를 치러주지 않으면 차라리 죽겠다고 뻗댔을 지도 모를 일이다.

그렇게 소근소사는 혼례를 올렸고, 혼서를 고이 간직했다. 그리고 그 혼서는 훗날 소근소사의 전투에 요긴하게 활용된다.

사나움? 용맹함!

소근소사는 노비 신분일 때도, 다시 양반 신분을 되찾고도 늘 당당했다. 주저 없이 자신의 목소리를 냈고, 필요하면 맹렬히 싸웠다. 이런 소근소사가 조선 사대부들 눈에 곱게 보일 리 없었다. 하여 사관(史官)은 그녀에게 투한(妬悍)’, 그러니까 ‘시기하고 사납다’는 딱지를 붙였다*6

그런데 사납다는 뜻의 ‘한(悍)’자가 재미있다. 이 수식어가 남성들에게 붙을 때는 은근히 ‘거침없다’, ‘용맹하다’는 뉘앙스를 풍긴다. 그러니까 여자라는 전제를 제거하면 ‘투한’은 ‘승부욕이 강하고 용맹하다’는 뜻으로 해석될 수 있다. 조선에서 ‘사나운 여인’이란 소리 높여 행동하는 여인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잠깐, 그토록 사나웠던 소근소사는 어떻게 됐을까? 성종 대 소근소사는 4번이나 신분이 바뀌었다. 처에서 첩으로, 다시 처에서 첩으로. 그렇다면 사대부들의 주장대로 요란한 암탉은 끝내 비참해지는 걸까? 대답은 NO다. 20여년 후 중종은 이소근소사를 황효원의 정처로 인정한다.*7 근거는 역시 ‘혼례’였다. 결국 소근소사는 사나웠고, 그래서 승리했다. 

*1 성종 7년 5월2일, 성종 7년 5월28일
*2 성종 11년 6월12일
*3 성종 12년 5월25일
*4 성종 12년 8월18일
*5 세조 13년 9월21일 기사. 이 기사에는 언급된 노비 첩이 소근소사라고 명시되어 있지 않다. 그러나 세조 9년 소근소사가 혼례를 올렸고, 세조 12년에 황효원의 어머니가 돌아가셨다. 시기상 어머니의 상중에 아이를 낳고, 왕가의 여인들과 대적할 수 있었던 노비 첩은 이소근소사뿐이었을 것이다.
*6 세조 13년 9월21일
*7 중종 2년 윤1월30일, 중종 2년 2월1일

 

필자 정기재

오래된 건 다 좋아하는 옛이야기 덕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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