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을 하드캐리한 왕후들 5. 인수대비 한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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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을 하드캐리한 왕후들 5. 인수대비 한씨

실소

일러스트레이션: 이민

15세기 최고의 여성 지식인
인수대비 한씨

내 나이 열일곱에 결혼했지만, 시부모님을 모시느라 남편과 오붓한 시간 한번 가지기 어려웠다. 결혼 4년 후 병든 남편이 다른 곳으로 옮겨 요양할 때는 임신 중이어서 곁에서 간호할 수도 없었다. 그렇게 서로 떨어진 채 영영 이별했으니 그 슬픔을 이루 다 말할 수 있겠는가?

‘조선왕조실록’ 성종 8년 3월 7일 기록에는 성종의 어머니인 인수대비가 남편과 사별했을 때의 심정을 아들에게 절절하게 호소한 내용이 나온다. 사극에 자주 등장하는 인수대비의 이미지와는 사뭇 다르다. 드라마나 영화에서 인수대비는 며느리 폐비 윤 씨를 내쫓아 죽이는 냉혹한 시어머니로 주로 그려진다. 하지만 그에게도 갓 결혼한 새색시 시절이 있었고, 일찍 남편을 잃고 인고(忍苦)의 세월을 보내야 했던 때가 있었다.

명문가 한확의 딸
세조의 맏며느리가 되다

인수대비는 실제로 어떤 인물이었을까? 인수대비는 세조 때 좌의정을 지낸 한확의 9남매 중 일곱째로 태어났다. 한확이 젊었을 때 누나와 여동생이 연이어 명나라 황제의 후궁이 되면서 한확 집안은 조선 최고 명문가가 되었다. 당시 명나라 황실은 조선 사대부 집안의 미모가 뛰어난 처녀들을 공녀로 데려갔다. 한확의 누이들은 연이어 공녀로 뽑혀 명나라로 갔고, 황제의 총애를 받았다. 명나라 3대 황제 영락제의 후궁 여비 한 씨와 5대 황제 선덕제의 후궁 공신부인 한계란이다. 덕분에 한확은 명나라와의 외교 관계에서 영향력을 발휘하면서 입지가 높아졌다. 그는 명나라 세력을 등에 업고 위세를 부릴 수도 있었지만, 올곧고 겸손해서 평판이 좋았고, 세종과 세조의 신임을 모두 얻었다.

인수대비가 태어난 해는 한확이 세종과 사돈 사이가 되어 더욱 더 최고의 집안으로 이름을 떨치던 때였다. 한확의 둘째 딸이 세종의 서자인 계양군과 결혼했다. 인수대비는 계유정난이 일어나던 해(1453년)에 야심 많은 수양대군의 맏며느리가 되었다. 2년 후, 수양대군은 단종을 폐위하고 조선의 7대 왕(세조)이 되었고, 세조의 맏아들인 남편(덕종)은 세자, 인수대비는 세자빈이 되었다. 인수대비는 맏아들(월산대군)을 낳은 지 7개월 만에 남편과 함께 궁궐로 들어갔다. 그리고 훗날 누구보다 훌륭한 국모(國母)가 되려고 준비하고 노력했다.

수양대군이 왕위에 오르려면 명나라로부터 정당성을 인정받아야 했고, 그 문제를 해결해줄 수 있는 사람이 한확이었다. 세조 입장에서 한확의 딸인 인수대비는 얼마나 귀하고 예쁜 며느리였을까? 집안이 좋을 뿐 아니라 매사에 빈틈이 없고 총명한 며느리였다. 기록에 따르면 세조가 너무 흡족해하면서 인수대비에게 효부(孝婦)라는 도장까지 만들어 주었다고 한다.*1 

롤러코스터처럼 굴곡이 많았던
인수대비의 삶

인생은 새옹지마(塞翁之馬)라고 했던가? 다시 2년 후, 인수대비의 처지는 완전히 바뀌었다. 둘째 아들(성종)을 낳은 지 두 달도 되지 않았을 때 남편이 갑자기 사망했다. 세상 사람들은 단종의 어머니 현덕왕후의 귀신이 저주했다고 수군댔다. 21세 젊은 나이에 남편을 잃은 인수대비는 이제 2남 1녀를 혼자 키워야 했다. 든든한 배경이 되어주었던 아버지 한확조차 세상을 떠난 후였다. 한 해 전 명나라에 갔다 돌아오는 길에 과로로 사망했다. 세조는 맏아들이 죽자 둘째 아들(예종)을 세자로 책봉했다. 인수대비는 이제 왕비도 대비도 될 수 없었다. 궁궐에서 계속 생활할 수조차 없어서 자식들을 데리고 나왔다.

보통 사람이라면 낙담한 채 실의에 빠져 세월을 보내지 않았을까? 그런데 인수대비는 이 시기에 더욱 자신을 다잡고 학문에 열중했던 것 같다. 계속 궁궐에 있었다면 세조와 정희왕후, 남편의 뒷바라지를 하면서 며느리와 아내 역할에 골몰하느라 자기 시간을 갖기 어렵지 않았을까? 궁궐에서 나와 혼자 자식들을 키운 시기가 있었기에 공부로 내공을 쌓을 수 있었고, 15세기 최고의 여성 지식인으로 거듭날 수 있었던 것 같다. 그가 이 시기에 학문에 심취했다는 사실은 몇몇 단서를 통해서도 드러난다.

세조는 애정을 쏟아 직접 주관하던 불경 간행 사업에 인수대비를 참여시켰다. 왕이 며느리에게 이런 일을 시키는 예는 극히 드물었다. 그만큼 며느리의 실력을 인정했음을 알 수 있다. 세조가 발간한 불교 경전 ‘능엄겸언해’의 발문에는 ‘언문으로 토를 달면 정빈 한 씨(인수대비)가 그 문장을 소리 내어 읽으면서 교정했다’는 기록이 나온다. 한문과 불경에 모두 밝지 않으면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유교 경전과 불경에 모두 통달했던 김수온, 고승 신미 등과 함께 불경 언해 사업에 참여한 것으로 볼 때 인수대비의 학문 수준도 상당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남편과 사별한 지 12년 만에 인수대비의 삶은 다시 완전히 바뀌었다. 시아버지에 이어 왕위에 오른 시동생(예종)이 갑자기 사망하고, 인수대비의 둘째 아들(성종)이 왕위에 올랐다. 33세였던 인수대비는 왕의 어머니가 되어 대궐로 돌아갔다. 13세에 왕이 된 성종은 정희왕후의 수렴청정(垂簾聽政) 기간을 거쳐 재위 7년째부터 나라를 직접 다스렸다.

일러스트 이민

‘내훈’ 펴낸
최초의 여성 저술가

인수대비는 성종 6년(1475년), 여성에게 성리학적 질서를 가르치는 책 ‘내훈內訓’을 펴냈다. ‘내훈’은 영조 12년(1736년)까지 판본을 새롭게 하면서 다섯 차례나 거듭 간행되었다. 오랫동안 영향력을 발휘하면서 조선시대 여성과 가정의 생활 규범을 제시했다. 

인수대비는 왜 아들이 실질적으로 왕 역할을 시작하던 시기에 ‘내훈’을 펴냈을까? 성종은 경국대전을 완성하면서 유교 국가의 기틀을 다진 왕으로 평가된다. 인수대비는 그런 아들을 뒷받침하기 위해, 각 가정에서부터 유교 질서가 자리 잡히도록 ‘내훈’을 펴낸 게 아닐까?

나는 일찍이 책을 읽다가 달기의 웃음과 포사의 총애와 여희의 울음과 비연의 참소*2 에 이르러 책을 덮고 마음에 서늘함을 느끼지 않은 적이 없었다. 이로써 보건대 나라와 집안의 치란흥망(治亂興亡)이 비록 남편과 군주의 총명함과 우매함에 달려 있으나 부녀자의 착하고 착하지 못함에도 관계된다. 따라서 부녀자도 가르치지 않을 수 없다.

인수대비가 쓴 ‘내훈’의 서문을 보면 그가 일찍이 중국 고전을 즐겨 읽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조선 초기에는 한문을 자유자재로 읽을 수 있는 여성이 극히 드물었다. 사대부 집안에서도 딸에게는 글을 가르치지 않았기 때문이다. 정희왕후조차 “나는 문자를 알지 못하지만 수빈(인수대비)은 문자도 알고 사리에도 통달하니 국사를 다스릴만하다*3”면서 글을 아는 인수대비에게 수렴청정을 양보하겠다는 뜻을 여러 번 밝혔을 정도다.

인수대비가 어떻게 학문을 익힐 수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정확한 기록이 남아있지 않다. 명나라에서도 관직을 받았던 아버지 한확이 명나라를 오가면서 가져온 중국 책을 어려서부터 쉽게 접할 수 있었고, 남자 형제들이 공부할 때 어깨너머로 글을 익히지 않았을까 짐작될 뿐이다. 무엇보다 인수대비 자신이 지적 호기심이 넘쳤던 인물 아니었을까?

인수대비는 자식들도 엄하게 가르쳤다. 왕위에서 멀어진 왕손은 보통 학문에 소홀했다. 아무리 열심히 공부해도 관리로 등용될 수 없었던 데다, 학식과 명망이 높아지면 왕권을 위협하는 존재로 비칠 수도 있었다. 세조도 어린 손자인 월산대군과 성종을 볼 때마다 “글 읽기를 일삼지 마라. 글 읽기는 너희들이 서두를 일이 아니다*4”라고 말했다. 

하지만 인수대비는 달랐다. “타고난 성품이 바르고 엄해 왕손들이 조금이라도 잘못을 하거나 실수를 하면 대충 덮어주지 않고 바로 정색을 하며 훈계하고 바로잡아 세조와 정희왕후가 농담으로 ‘폭빈暴嬪’이라고 부를 정도였다.” *5

인수대비는 아들이 왕위에 오를 줄 예상이라도 한 듯 자식들을 교육하고 자신도 준비했다. 덕분에 성종이나 월산대군이나 모두 학문을 좋아했다. 조선에서는 임금의 맏아들이 태어나자마자 왕세자 교육을 시켰다. 그만큼 일찍부터 왕으로서의 자질을 훈련했다. 그런데 성종은 전혀 예기치 못한 상황에서 왕이 되었다. 13세에 갑자기 왕이 되자마자 하루에 서너 차례씩 경연*6에 참석해야 했다. 인수대비가 엄하게 가르치고 공부시키지 않았다면 성종이 순조롭게 왕 노릇을 할 수 있었을까? 성종은 인수대비의 교육 덕분에 준비된 왕처럼 행동했다.

여성도 교육해야 한다고
주장한 선각자

인수대비는 자식들을 교육하기 이전에 자신부터 공부에 매진했던 어머니였다. ‘내훈’은 그렇게 쌓아온 인수대비의 내공을 엿볼 수 있는 책이다. ‘내훈’을 발간했을 때는 유교를 통치 이념으로 내세운 조선이 건국된 지 80여 년이 지났을 때였다. 하지만 조선은 성리학을 공부한 '남자'들이 다스리는 나라였다. 여자들은 성리학을 접할 기회조차 없었다. 

인수대비는 그런 현실이 안타까웠다. 그는 ‘내훈’ 서문에서 “여자는 한갓 길쌈의 굵고 가는 것에 만족하고 덕행의 높음을 알지 못하니, 내가 이를 날마다 안타깝게 여긴다.…너희들은 이를 마음에 새기고 뼈에 새겨 날마다 성인이 되기를 기약하라”고 조선의 여성들에게 당부했다. 그 시대에는 인수대비처럼 여성에게 ‘성인이 되기 위해 노력하라’고 말하는 사람이 없었다. 여성은 성리학이라는 조선의 시대정신에서도 소외된 존재였기 때문이다.

인수대비는 확고한 신념을 가지고 시대의 당면 과제를 해낸 15세기 최고의 여성 지식인이었다. 여성도 국가의 흥망에 중요한 역할을 하니 교육해야 한다고 주장한 선각자이기도 했다. 인수대비는 정희왕후가 사망한 후 왕실의 최고 웃어른으로서 분명한 목소리를 냈다. 뚜렷한 철학과 신념에 따른 목소리였다. 하지만 냉철한 완벽주의자인 시어머니 인수대비와 감정을 절제하지 못하는 며느리 폐비 윤 씨는 처음부터 ‘잘못된 만남’이었을 것 같다. 그렇다 해도 며느리를 내쫓아 죽인 못된 시어머니로만 인수대비가 기억된다면 너무 억울하지 않을까?


*1 ‘내훈’ 발문

*2 달기는 은나라 마지막 왕의 아내, 포사는 주나라 마지막 왕의 아내, 여희는 춘추시대 진나라 헌공의 후비, 비연은 한나라 성제의 후궁으로 모두 나라를 망치거나 어지럽힌 여자로 꼽힌다.

*3 예종실록 8권, 예종 1년 11월 28일

*4 성종실록 2권, 성종 1년 1월 10일

*5 ‘내훈’ 발문

*6 임금이 신하들과 더불어 학문을 논하면서 국정을 협의하던 일

 


선리 

조선왕조실록이 지닌 날것 그대로의 맛을 새록새록 느끼고 있다. 소소한 이야기들을 통해 만나는 인물은 훨씬 입체적으로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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