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쌍해서 어째! 언니가 순장된 것도 모자라 이제 또 동생까지 죽으러 가다니…. 산송장이 따로 없구나. 산송장이 따로 없어…!*1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길, 죽어서도 돌아오지 못할 길, 한씨는 그 길을 나섰다. 한씨는 명나라 선덕제에게 바쳐진 공녀다. 공녀 또는 진헌녀라 불리는 이들은 진상하는 물품처럼 명나라 황실에 바쳐진 여성들을 말한다. 명나라 황제 영락제와 선덕제의 개인적 요구에 의해 보내진 조선의 공녀는 총 114명, 태종 8년에서 세종 15년까지 26년간 7차례에 걸쳐 보내졌다. 이들 114명 중 황제 또는 황족과의 결혼을 위한 공녀는 16명이고, 나머지는 황제의 음식과 유희를 위한 집찬녀와 가무녀, 후궁의 시종들이다.
언니에 이어
공녀로 차출된 한계란
황족과의 결혼을 넘어 황제의 여자가 된다는 것은 파격적인 신분 상승을 의미한다. 그 여성의 가족은 명실상부 명나라 황족의 외척이니 조선에서도 함부로 할 수 없었다. 하지만 당시 조선의 사족들은 딸이 공녀로 뽑히는 걸 막기 위해 갖은 방법을 다 동원했다. 열 살 전에 결혼시키기, 얼굴이 비슷한 여자를 사서 대리로 심사 받기, 말짱했던 팔다리를 심사 기간 중에만 아픈 척 하기, 없던 피부병 만들기 등…. 그러다 들통 나면? 부모에게 가혹한 매질과 함께 재산 몰수라는 형벌이 내려졌다. 하지만 이 모든 걸 감내하더라도 다들 공녀가 되는 것을 피하려 들었다.
이유가 뭘까? 답은 간단하다. 가면 죽는다. 그것도 비참하게! 급사 1명, 고문사 1명, 자살 2명, 참형 2명, 순장 2명*2. 11살에서 19살의 어린 나이에 차출된 영락제의 후궁 8명은 모두 이렇게 죽어갔다. 무고와 참소, 그리고 순장! 이들의 비극적인 죽음을 보고 어느 부모가 딸을 보내고 싶겠는가.
안타깝게도 영락제의 손자 선덕제 또한 공녀를 요구했다. 황제가 요구하니 누군가는 가야했다. 해서 후궁감으로 보내진 소녀는 8명*3. 그 중 마지막 공녀가 지금 떠나고 있는 공녀 한씨다. 심지어 한씨는 영락제의 후궁 중 순장당한 한씨의 동생이다. 상황이 이러니 떠나는 한씨를 보며 사람들이 ‘산송장’이라 부를 만 했다. 산송장이라 불린 한씨의 이름은 한계란*4, 여성으로서 보기 드물 게 실록에 이름이 기록된 여인이다.
한씨 집안 인물이 꽤 좋았나 보다. 환관들이 선덕제에게 앞서 죽은 여비 한씨의 여동생이 예쁘다고 귀띔을 한 탓에, 선발이고 뭐고 없이 한계란은 바로 공녀로 낙점된다. 하늘이 무너진 소식에 한계란은 식음을 전폐하고 몸져눕고 만다. 해서 한계란의 출발은 무기한 미뤄지고, 어쩌면 이대로 명단에서 빠질지도 모른다는 일말의 희망이 생겼다.
하지만 끙끙 앓고 있는 한계란에게 오빠 한확*5이 약 사발을 내미니, 몸을 추슬러 떠나야 한다는 무언의 압력이다. 약사발을 노려보던 한계란은 있는 힘껏 오빠의 손을 밀쳐내며 소리소리 질렀다. 이미 누이 하나를 팔아 부귀를 누렸으면서 이제 하나 남은 여동생마저 죽일 거냐고! 한확이라고 동생을 보내고야 싶겠는가. 황제의 명을, 나라의 결정을 바꿀 수 없는 것이지. 그걸 모르는 한계란이 아니다.
한계란은 자신의 운명을 베듯, 칼로 자신의 이부자리를 갈가리 찢어버리고, 혼수품으로 미리 준비해 뒀던 것들을 미련 없이 친척들에게 나눠줘 버린다.*6 당찬 성격의 19살 한계란은 조선에서의 삶을 이렇게 정리하고, 죽음을 각오한 채 명나라로 떠난다.
목숨을 건 승부수
산송장이라 불린 한계란은 74살까지 산다. 57년 동안*7 선덕제, 정통제, 경태제, 성화제라는 4명의 황제를 섬기며, 명황실의 지혜로운 여성으로 자리 매김하면서(한계란은 명 황실의 빈첩들에게 ‘모사(姆師)’, ‘여사(女師)’, ‘노노(老老)’라 불리고, 죽어서는 공신부인이라 봉해졌다).
일단 운이 좋았다. 한계란이 공녀로 간 사이 명나라에서 순장제가 사라졌다. 물론 운만 좋아서 살아남은 건 결코 아니다. 한계란은 영민했고, 정치 감각도 뛰어났다.
한계란의 배다른(?) 아들격인 정통제가 몽고 오이라트와의 전투에 직접 참가했다가 포로가 된다. 명나라 황실은 발 빠르게 정통제의 이복동생 경태제를 황위에 올리고, 정통제의 3살배기 어린 아들을 태자로 삼는다. 표면적인 이유는 황제 자리를 하루라도 비울 수 없어서였지만, 어찌됐든 정상적이지 않은 구도였고, 특히 어린 태자에겐 위험천만한 상황임은 분명했다.
1년 후, 오이라트는 유용한 인질이기 보단 짐이 된 정통제를 조건 없이 풀어준다. 물론 경태제는 돌아 온 형을 바로 유폐시켜 버리고, 어린 조카인 태자 또한 폐위시켜 버린다. 예상대로 황실은 전 황제 정통제파와 현 황제 경태제파로 나뉘어 5년간 치열한 권력싸움을 한다. 이런 상황에서 폐태자를 돌보고 키운다는 것은 틀림없이 목숨을 건 승부수다.
그리고 이런 승부를 띄운 사람이 바로 공녀 한계란이다. 한계란은 3살의 어린 폐세자를 8년 간 키워낸다. 결과적으로 정치 판세를 읽어내는 힘이 있었던 한계란의 선택은 옳았다. 황위에 오른 성화제는 어려운 시기 자신을 키워 준 한계란의 공을 잊지 않았으니. 성화제는 한계란에게 지극 정성을 다했고, 이로써 황실 내에서 한계란의 입지는 단단해졌다.
이후 한계란의 정치력은 조선과 명의 외교문제에서 빛을 발했다. 전례가 없는 회간왕(세조의 장남으로 성종의 친부이자 인수대비의 남편)의 추봉과 책봉을 받아내고, 명나라에서 금지한 병기의 재료(궁각. 활을 만드는 재료로 조선에서 생산되지 않아 명나라에서 수입해야 했다. 조선인이 밀무역을 하다 걸린 이후 명나라에서 조선에 대한 궁각의 수출을 금지시켰다. 그러나 이때 한씨와 환관 정동의 도움으로 1백 50부를 수입할 수 있었다)를 수입하게 하고, 폐비 윤씨 일과 새 왕비 정현왕후 윤씨의 책봉을 무리 없이 받아내는 등이다.
로비스트
이 당시 노련하게 조선 왕실을 대변한 한씨가 없었다면, 명나라와 관련한 일련의 일들은 크게 문제시 되거나 이뤄내기 힘들었을 것이다. 조선인 누구도 해내지 못한 결과를 얻어낸 한계란은 조선 초기 가장 뛰어난 로비스트였다.
물론 한계란은 일이 성사될 때마다 조선에 톡톡히 대가를 받았다. 한계란은 조선의 사신단에 꼭 한씨 집안사람을 보내라고 대놓고 요구했고, 조정에 지속적으로 물품을 요구했다. 당연하고 정당한 요구였다. 사신으로 친정사람을 보내라 한 것은 황실에 친정의 위세를 보여줌으로써 자신의 입지를 더욱 단단히 하는데 필요했다. 인정(선물) 역시 황제와 황실 내 사람들을 관리하는데 없어서는 안 될 필요조건이었다.
사안이 하나씩 해결될 때마다 한계란이 요구한 물품의 양도 늘어났다. 나중엔 조선 조정에서 골머리를 썩일 정도였다. 하지만 처세에 능했고, 자신이 처한 상황을 잘 이용할 줄 알았던 한계란의 요구는 다음 수를 위한 현실적인 포석이었다.
죽음 자리로 내몰린 곳에서 보란 듯이 잘 살아낸 한계란. 조선을 위급함에서 구해주며 철저히 대가를 요구한 한계란. 그야말로 저를 버린 조선에 진정한 복수를 한 것은 아닐까!
*2 급사(권씨), 고문사(여씨), 자살(임씨, 정씨), 참형(황씨, 이씨), 순장(한씨, 최씨).
*3 세종 9년(1427년)에 간 7명(성씨, 차씨, 안씨, 오씨, 정씨, 최씨, 노씨)이 선덕제의 후궁이 됐다는 기록은 없음.
*4 성종실록 162권, 성종 15년 1월 4일 임진 5번째기사
*5 성종의 외할아버지 한확이다. 한확의 두 여동생이 황제의 후궁이 되고, 한확의 딸(인수대비)이 세조의 장남과 결혼해 청주 한씨는 이 시기 최고 외척 집안의 하나가 된다.
*6 세종실록 36권, 세종 9년 5월 1일 무자 4번째기사
*7 계산하면 55년이나 성종실록. 162권. 15년 1월 4일 기사에 57년으로 기재됨.
필자 김석연
글향, 그 알싸한 꼬드김에 빠지다